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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루살렘에서 골고다로 (눅 2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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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입니다. 지난주간 마지막 출발지인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주님은, 어제 베다니에서 잠시 머물고 오늘 예루살렘으로 어린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열광적으로 주님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며 분주한 날들을 보내시다가 금요일 새벽에 체포당하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메 달리십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이제 골고다로, 주님은 그 발걸음을 옮기시며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완수하시고 돌아가십니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지금 우리가 주님이 가셨던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곳을 ‘골고다’라고 부릅니다. ‘골고다’라는 말은 ‘해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33절에 주님이 죽으신 곳을 ‘해골’이라고 말하고, 다른 성경에서는 ‘해골이라고 부르는 골고다’라고 언급합니다. 골고다가 왜 해골인지, 역사가들은 몇 가지 추정을 합니다. 우선, 이곳이 당시와 오래 전부터 시체와 해골들이 널려있는 폐허가 된 땅이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둘째로, 이곳 지역의 모양이 사람의 해골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셋째로, 이곳에 아담의 유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확실한지는 잘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을 해골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요, 거기에서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한번 그곳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여기 해골이 있습니다. 해골의 정수리에 십자가가 꽂힙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주님의 보배로운 피가 흘러 십자가를 타고 해골에게 내려갑니다. 그래서 죽은 해골과 같은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고, 주님은 위대한 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며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이고, 이것을 ‘구원’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완성된 것입니다. 그 구원은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 구원에 관한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선,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좌 우편에 있던 강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강도 중에 한 강도는 주님을 비방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주님은 그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며 주님이 가시는 곳, 주님이 머무는 천국으로 그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가 여기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요내용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강도가 지금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만 할 뿐, 그가 구원을 위해 노력하거나 수고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선행을 한 것도 아니고, 착하게 산 것도 아니고, 무슨 업적이나 공로를 남긴 것도 더욱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노력해서, 수고해서, 무슨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와 주님의 사랑으로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이렇게 구원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믿음도 은혜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구원은 행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처럼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얼마나 자랑하겠습니까? 얼마나 사람들을 비난하고 판단하겠습니까? 그러나 구원은 행위가 아니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은혜로 받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사모해야 은혜가 임합니다. 은혜가 임하면 위대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반드시 연주되는 곡 중에 ‘메시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음악의 어머니로 부르는 헨델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헨델의 메시야를 듣고 있으면 하늘의 어떤 신비한 그 무엇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 힘이 있을까요? 거기에는 그 작품 속에 놀라운 구원과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곡을 만들 당시 헨델은 큰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헨델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그의 음악에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 때 헨델은 신앙이 깊은 친구로부터 ‘주님도 사람으로부터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부활시켜 만 왕의 왕이 되었습니다. 힘을 내시오.’ 라는 격려의 편지와 함께 메시야의 대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성경적으로 보여주는 대본을 읽으면서 그는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주님의 고통 앞에 눈물과 통곡을 흘리며 지난날의 죄를 회개할 때 큰 은혜와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헨델은 23일 동안 거의 식음을 전폐하며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날, 하인이 방에 들어갔을 때 헨델은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빛나는 얼굴과 떨리는 음성으로 ‘하늘이 열렸다! 나는 전능 왕 메시야를 보았다!’ 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그렇게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놀라운 능력으로 가장 위대한 작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위대한 일이 벌어집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받아 여러분의 삶에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둘째,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골고다의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비방하기로 말하면 여기 강도 못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도 두 강도가 주님 좌 우편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개를 하늘로 향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어디인가에 시선을 두고 계셨을 것입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에도 주님은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오른편에 있는 강도에게만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분명하게 그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셨고, ‘네가’라는 그 사람을 지목하여 낙원으로 그를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입니다. 오직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주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이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주님은 목자로서 양을 불러내는데, 각각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 ‘one by one’입니다. 얼마가 있든 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 한 사람, 한 영혼 한 영혼을 불러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구원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의지나 결정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따라다닌다고 구원이 임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잘 믿는다고 덩달아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그렇게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많이 사면 하나 더 주는 그런 장사 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좋은 영향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고, 내가 영접해야 하고, 내가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은 얻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 많은 생명들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모두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있다가 산고 끝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생명도 그냥 덤으로 주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뻥튀기 하듯이 무더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명, 한 영혼, 그렇게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요, 신앙도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잘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해야 하고, 내가 섬기고, 내가 봉사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제’를 보내소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소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아무리 잘 되어도 내가 안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를 돌아보시고, 십자가 앞에 내가 거듭나고, 새로워지기를 다짐하면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앞에 감격과 헌신으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구원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강도는 그야말로 ‘강도’입니다. 이 말로서 그가 평생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당시 아무나 사람을 사형시키지 않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은 보통 형벌이 아닙니다. 가장 흉악한 죄인에게만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십자가형은 면제가 되었습니다. 여기 강도가 사형을 당하고, 그것도 십자가로 죽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짐작합니다. 그는 평생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아마 여러 사람을 죽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 살인자도 어떤 때는 동정이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쇄살인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지능범은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인간쓰레기라 하여 빨리 처리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지금 강도가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정도면,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그는 죽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동정이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구원이나 은혜는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안 된다고, 끝났다고, 고개를 젓고 있는 순간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복음서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좌 우편, 그러니까 예수님을 포함한 3명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습니다. 당시 오직 주님 외에 2명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누가복음인데, 마태와 마가는 조금 다르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한번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말하는 보십시오. 마태복음 27장 44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가복음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누가복음과 다르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는 분명 오른편의 강도는 욕하지 않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복수’로 그러니까 둘 다 욕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경이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오른편 강도도 처음에는 주님을 욕하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최후, 불과 얼마 남지 않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믿음을 고백하여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평생 강도 짓을 하여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지고,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조그만 동정이라도 주고 싶던 사람마저 더 마음에서 멀어졌을 것입니다. ‘그래 저런 사람은 빨리 가는 게 낫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저런 사람에게 무슨 구원, 무슨 은혜가 필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 접고, 다 관심에서 멀어지고, 다 포기한 그 순간에, 그에게 커다란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여기 강도에게 임한 구원은 바로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구원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끝났다, 안된다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기적적으로, 극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 어떤 사람도, 어떤 못된 사람도,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극적인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일어납니다.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렵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났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자는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끝나도 하나님이 끝나지 않으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이 큰 죄입니다. 포기라는 말은 아예 입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우리 삶에 극적인 반전과 놀라운 일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이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 믿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모두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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