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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깨달음과 영성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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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서 많은 교훈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별명은 반석이었고, 별명처럼 초기 기독교사의 기초를 놓은 사람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에 관한 기록의 양으로 보나 열두제자 중에서 위치를 보나 상당한 비중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서 맡기시려고 했던 일을 감당하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자질도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다혈질에, 무엇을 하나 시키면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주 바뀌는 변덕이 많은 사람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개념과는 어찌 보면 거리가 좀 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존귀히 쓰임받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생애를 돌아보며 다른 이들을 권면하는 편지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굳게 하시고 견고케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고...’ 자기 인생 경험에 비추어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견고하지도 못했고 온전치도 못했고 실수 투성이요, 약점 투성이였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 주셨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변화시켜 주셨을까요?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생각해볼 때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변화시킨 과정에서 실패라는 훈련과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온전케 하시고 성장시키기 위해 실패와 좌절을 사용하셨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겪고 싶지 않은 과정을 통해서 베드로는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며 온전히 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염려와 불안, 초조와 두려움 등 모두 주께 맡겨 버려라! 주님께서 권고하실 그때에 다 맡겨 버려라! 원래 우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라고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실패를 허락하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실패라는 과정을 겪어야만 훈련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은 잘 아시는데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던 그 시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와 재판광경을 구경하면서 뜰 안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계집아이가 와서 베드로에게 예수와 함께 있던 자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조금 불안해진 베드로는 밖으로 나와 바깥 뜰에서 불을 쬐었습니다. 또 다른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예수와 같이 있던 사람 같다고 말합니다. 다시 베드로는 맹세코 예수를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다른 사람이 베드로의 말 소리를 들어보더니 억양 좀 보라며 갈릴리 예수와 똑같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베드로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밖에 보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저주하면서 절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이 생각 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 장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제자로서 크게 실패하는 모습입니다. 한 남자로, 한 인간으로서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모습, 제자 그룹의 리더로서도 실패하는 모습, 인생의 모든 면에서 무너지는 베드로의 실패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무너진 자기 인생을 보며 통곡하며 울고 있는 한 남자의 회복될 수 없는 깊은 울음을 듣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또 커가는 자녀를 바라보며 남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는 실패한 사람이요, 부모로구나.’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정을 잘못 꾸려왔다고, 잘못 살아온 남편이고 아내였다고 고백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정말 행복하기를 꿈꿨지만 가정이 깨지거나 건강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문제가 생겨 자기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이런 실패가 많은 인생이 되었는가 싶어 가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쓸어 담는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가르치는 자로서 배우는 자로서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다시 일어설 힘이 없어 주저 앉아 통곡하는 베드로처럼 흐느끼며 계실 수도 있습니다. 실패라는 과목을 통해 베드로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도 배우면서, 오늘 우리 아픔과 실패를 통한 주님의 뜻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실패로 끝나는 삶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더욱 새롭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찾는 시간이고 싶습니다.

첫째로 고난과 실패를 통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은, 삶의 주인은 언제나처럼 여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복되다는 사실을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형제 베드로는 세례요한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외침을 듣게 됩니다.

또 마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이 잡힌 이후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던 안드레와 베드로를 찾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지 못해 그물을 정리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배를 다시 조금 띄우라고 말씀하시고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저는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고기를 언제 어디에서 잡을 수 있는지 저는 잘 알고 있으며 이 분야에서 저는 전문가입니다. 당신이 목수출신임을 잘 알고 있고 당신을 믿을 만한 근거가 아무것도 없지만, 한 가지 당신의 말씀이라는 사실만을 믿고 그물을 내려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기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밤새 잡고자 했건만 잡히지 않던 고기가 불가능한 가운데 잡힌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가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고기의 흐름을 알고 바다 밑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역시 꿰뚫어 보실 분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제껏 자기 나름의 인생 기준으로 살아왔지만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 말씀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일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불가능한 이야기 같지요? 오라 한다고 바로 따라가는 사람이 어디있습니다. 자기 그물까지 내팽겨치고 말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에게는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만큼 예수님 말씀을 신뢰하고 있었는지는 이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가운데서 물위를 걷고 있던 자를 모두들 유령이라고 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십니까? 예수님이시거든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그 시절 통통배를 타고 가는데 한 밤 중에 태풍이 몰아친다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더구나 그 밤에 물위를 걷는 사람이라니, 다들 유령이라고 무서워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일 거라고 확신한데다가 그처럼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까지 합니다. 보통 믿음이 아니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위를 걷는 다는 것은 말씀을 의지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물 속에 빠지긴 했습니다만, 단순히 결과를 보기보다 물위를 걸었다는 사실로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닥쳤는데,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칼을 빼들고 휘둘렀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칼을 빼들 만한 위인이 아니었는데도 칼을 빼들었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만큼 큰 확신으로 존재하는 분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잡혀갈 분이 아니고, 무언가 새로운 힘을 가지고 나라를 점령할 기회가 왔다고 여기곤 칼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검으로 선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이 사건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크게 실망한 듯합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장면에서, 저는 단순히 베드로가 자기 목숨이 아까워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순순히 잡혀가는데서부터 깊은 실망감을 느꼈지만 그 때까지의 관계와 의리 때문에 따라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아느냐란 질문에 모른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예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잡혀올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맹세까지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닭이 웁니다. 닭이 울 때 베드로에게 떠오른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전에 자기에게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전에 예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던 역사들, 또 한번의 역사가 바로 지금 자기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당신 말씀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말씀을 믿고 따라온 삶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경험에 의존한 믿음이었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의 통곡의 눈물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편지 마지막에 가서 자기가 실패한 것을 근거로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씀을 남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은 마음대로 착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바라는 예수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의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며 말씀대로 따라갔지만, ‘믿는다고 다 되냐?’, ‘기도한다고 다 되냐?’라며 냉랭하게 식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꼭 살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말씀대로 안산다고 그게 또 무슨 문제냐 라며 미지근하게 살고 있는 분이 있다면 베드로를 보며 다시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경험과 자기 지식대로가 아니라 약속하신 말씀대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따르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실패했습니까? 내 계획과 경험대로 살다가 실패한 것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다가 실패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사실은 자기 욕심대로 살지는 않았습니까?

실패한 여러분, 한 주간의 삶도 실패투성이가 되어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기보다 실패의 자국과 상처만 가지고 나오신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주님앞에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내 인생의 기초를 세워나가는 결단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주님 다시금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듯이 오늘 내 삶도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환경과 사람들과 감정과 내 이성과 지식을 의지하지 않겠노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결단을 주님은 요청하고 계십니다.

둘째 주님은 베드로가 실패를 통해 자기가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대부분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하나님 은혜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입술로는 주님 은혜라고 말할지 몰라도 실제로 가슴 깊이 하나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6:33을 보면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 주를 버릴 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다’ 와 ‘언제든지’라는 표현은 조심해서 써야 될 단어들입니다. 계속해서 35절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큰소리 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원래 모습입니다. 본래 사탄이 베드로를 가지고 논다는 것입니다. 성격과 성품, 기질이나 좋아하는 것, 생각하는 것으로 보자면 사탄이 가지고 놀기에 너무 좋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께서 계속 기도하고 계시기에 그 이상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다 버릴찌라도’, ‘저는 언제든지 죽을찌언정’이라며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닭이 울자 자기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 곁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자기 의지와 신념, 노력과 인간성 그리고 인격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중보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연약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는 것과 동시에 그럼에도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셨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스스로 인격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한 꺼풀, 두 꺼풀 벗겨내고 우리 본성이 드러나면, 아니 본성까지 아니라도 좋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선한 성품 한 순간에 사람이 그렇게 악해 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내 자신이 잘나서 잘 살고 지식이 대단해서 이만큼 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사니까 교만한 것입니다.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듯 알았지만 어린 계집종의 한마디 말 앞에서 무너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결심을 단단히 크게 하고 기도도 몇 시간씩, 십일조에 감사헌금까지 하지만 조그만 문제 앞에서 단 한순간 왕장창 무너지고 마는 것을 이미 여러분이 체험하신 것 아닙니까? 베드로가 3년간 주님과 닦아 놓은 관계가 어린 계집종의 말 한마디로 한 순간에 무더진 것과 같이 저나 여러분이나 그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며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통곡하고 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존재밖에 되지 않는구나, 남들이 존경해주는 것 같아도 혼자 있을 때 내 모습을 보니 나 같은 인간은 인간도 아니구나 라며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는 정직하게 자기를 직면하였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은혜 중에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실패를 거듭한 사람, 깨어져보고 부서져본 사람이 사람 앞에 관대합니다. 용서를 잘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별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패해보고 아파해본 적이 없는 사람, 죽음의 지경에 이르러 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베드로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은 사명의 자리에 베드로 자신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56을 보면 한 비자가 베드로에게 바른 말을 합니다. ‘베드로씨, 당신이 있어야 될 자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될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두 번째 여종도 말합니다. ‘당신은 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이들은 베드로가 어디에 있어야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함께 있어야 될 사람도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이전에 베드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가 있는 곳에 가겠다라고, 죽는 자리라도 함께 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쳐놓고선 한 여자아이가 당신의 자리가 예수 옆이 아니냐고 물어보니 바로 부인을 하고 맙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자기가 있어야 될 자리를 깨닫고 얼마나 통곡합니까?

여러분 오늘 ‘내가 원했던 자리가 이 자리가 아닌데...’, ‘내 인생이 이렇게 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 온 게 아닌데...’, ‘내가 이런 아버지 되려고 살아온 것이 아니야.’ 라고 울부짖으며 자신이 원치 않는 자리에 왜 와있을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는 그 자리를 떠나 이전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쫒아가셔서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심으로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네가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네 뜻대로 살았지. 거기엔 자유가 있고 좋은 것 같았지만 결국 기쁨이 없지 않았니? 나를 의지해라. 내가 네 삶을 지금부터 인도하겠다. 네 삶을 나에게 맡기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시며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삶을 인도해 가시기로 하시고 다시금 베드로에게 사명의 자리, 사랑의 자리, 기쁘고 복된 자리로 옮겨 주십니다.

여러분, 같은 아버지라도 아버지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어쩌다보니 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차원이 다릅니다. 살다보니 이렇게 됐다라는 남편과 남편으로서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실패와 아픔을 통해서 좋은 남편이 되어야겠구나, 좋은 아버지 되어야겠구나,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진정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겠구나 라고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어쩌면 예수님의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있었기에 우리 죄가 씻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를 그냥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실패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저도 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 아픔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까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실패는 우리를 인도해온 것이지 결코 파멸시킨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겪고 있는 실패는 앞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해 나갈 것입니다. 주 안에 있을 때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실패를 통해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주님은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따라 갈 때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릴 때 세상의 논리와 조건, 상황에 맞지 않아도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될 역사를 우리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바라보는 나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만이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며 사명의 자리, 내게 생명을 공급해주어 지금까지 살게 하신 사명의 자리에서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주님의 뜻을 이루며 또 이루어 주시기를 소원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 한 걸음 한걸음 걸어가시는 용기 있는 믿음의 동역자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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