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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두번째 창조 (창 2:15~17, 요 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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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창세기에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무슨 힘을 가지고 창조했습니까? 성서에서 보면, 분명히 사랑의 힘으로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사랑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의 마지막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하는 말도, 하나님이 사람처럼 코와 입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이런 말을 하십니다. “이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는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라. 그러나 딱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 그걸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맘대로 먹으라고 하신 그 수많은 나무들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을까?’ 하면서 선악과나무로 인해 유혹을 받습니다.

결국 “내가 이 열매를 먹으면, 나도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아야지.” 그런 탐욕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슨 변화가 생겼느냐 하면, 아담과 이브,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로 대립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탐욕이 이 세계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거기에서 죽음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관계가 깨어지자, 가인이 친동생 아벨을 죽이는, 그래서 죽이고 죽고 미워하고 대립하고 그런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하든지 고쳐서, 정말 생명을 가지고 살게 하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저히 그 율법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이제 사람은 죽음에 내던져지고 말든지,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와서 인간들의 탐욕과 죽음의 세력을 직접 해결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직접 몸으로 세상에 오신 분, 와서 인간들 속에 있는 탐욕과 분열을 사랑으로 바꾸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2년 전 저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비판도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받은 고통이란 게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를 달아놓고 예배를 드립니다만, 정말 그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며 볼 수 있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성서의 얘기를 그대로 상영하는 것을 보면서 제 가슴속에 다시금 드는 생각은 십자가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고통, 최악의 멸시, 그리고 살해 가운데서 제일 잔인한 살해라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감당했을까? 그 고난의 모습을 보지 않고는 부활이란 것이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당한 바로 그 고통,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잔인한 죽임을 당하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는 그분의 기도,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서에서 나오는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란 구체적으로 뭐냐? 저는 탐욕이라고 생각합니다. 탐욕, 그것을 없애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생명으로 사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이 세계를 다시 창조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세계는 인간의 탐욕과 죄로 인해서 죽이고 죽는 죽음의 세계가 되어버렸습니다만,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시작하신 두 번째 창조, 그것은 죽음을 생명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탐욕을 자기를 나누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요한일서에 있는 대로 사랑이란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는,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내지 못하는 최후의 승리자지만, 이 죽음보다 더 강한 것, 그것은 오직 참된 사랑뿐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사랑이란 게 없다면, 죽음은 슬프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가져와서 고스란히 상영한 것이 예수님의 삶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그분은 “나는 세상에 온 생명 자체다. 내가 곧 생명이다. 이 세상에 온 생명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빵을 떼어주면서,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찢기는 내 살이다.” 잔을 주면서 “이건 바로 내 피다.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받아 마심으로써 나의 사랑을 받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죽음을 자기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 죽음 속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탐욕을 사랑으로 바꾸는 그런 두 번째 창조가 생겼습니다.

그 생명, 예수 안에 나타난 그 생명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그를 믿는 우리 안에, 내 안에 와 계십니다. 바로 그 생명이 내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옛날에 있던 사건으로 믿거나, 앞으로 예수가 재림하는 때에 있을 것으로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현재 이곳에서 숨쉬고 살아있는 내 삶 속에 이미 예수님이 와 있는 것입니다. 와 있단 말은 이미 생명으로 내 안에 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오늘 읽은 요한일서 3장 14절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음으로써, 이미 죽음의 나라를 떠나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왔다. 왜? 여러분도 그 사랑을 받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아직도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사람은 여전히 죽음에 남아있다. 그러나 정말 여러분이 예수가 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반사하는 반사체로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진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요한일서에 쓰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창조에 나타난 그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와 있지만, 그래서 그 생명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보는 세상에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보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죽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빌라도의 법정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종교, 그 정치, 그 민중을 오늘 서울거리에서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골로새서 3장에 있는 대로, 현재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을 알고 삽니다.

내가 왜 세상에 사느냐? 하루하루 무엇 때문에 일하고 있느냐? 내가 무엇 때문에 살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냐? 탐욕으로, 나와 내 가족만 잘 살겠다는 그런 이기심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는 인기주의, 이런 것으로 산다면 그것은 죽음의 나라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부활한 생명이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증거는 뭐냐? 사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처럼 비참한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받아들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내 이웃을 위해 사느냐? 늘 그대로 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고, 넘어지고, 그렇게 하자고 하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을 보면, 죽어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던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다 도망쳐 달아나고 숨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나쁜 놈들, 배신자들이라고 내버리지 않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화가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 그런 제자들을 품에 안고 “내가 너희들에게 평화를 주러 왔다.”고 하시는 그 주님이 오늘도 나 같은 사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오셔서 힘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 힘을 입어서, 루터가 말한 것처럼,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일어서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나는 신자라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추어져 있던 생명이 온 세상에 환하게 드러나는 날, 그날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는 날입니다. 나는 그것을 세 번째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창조에 속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창조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어디를 바라봅니까? 세 번째 창조, 사랑만이 승리하고 생명만이 지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로 그 나라를 향해 용기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나가기로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원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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