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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호산나의 명암 (사 50:4~9,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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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 상으로 종려주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가대의 성가를 들으면서 이 절기의 이름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려주일에서 호산나 주일로!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마 주위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모여든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칠 때, 아마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호산나! 주님 우리를 좀 구원해주소서. 우리는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로마의 지배와 갈취 아래에서, 자유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당시 하루에 두 끼 먹으면 잘 먹는 것이었습니다―죽을 지경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종려나무는 유대백성들이 좋아하는 나무인데, 성전으로 갈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리는 표시로 종려나무의 가지를 꺾어서 가지고 갑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군대가 성으로 돌아올 때, 나팔을 불고 깃발을 흔들며 들어올 때, 승리의 표시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합니다. 개업할 경우에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사업이 잘 되고 복을 받기를 빕니다. 번영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렇게 종려나무는 거룩함, 승리,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학자의 기록을 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모여든 유대인의 숫자가 줄잡아 27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수가 부풀려졌다 하더라도, 엄청난 인파가 몰린 것은 사실입니다. 유대교 명절에 이 엄청난 인파가 몰렸는데, 백성들의 입에 회자되던 한 사람, 메시아라고 칭송받는 한 사람, 이름하여 나사렛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등장합니다.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영화로 만든다면, 멋진 장면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이 등극할 때에 종려나무 가지로 축하하는데, 그 왕은 말을 타고 즉위식에 나섰습니다. 그 기원은 다윗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윗 왕이 자기 후계자로, 큰아들, 작은아들을 다 물리치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난 서자인 솔로몬을 세웁니다.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큰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솔로몬 왕이 등극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에 등극할 때에는 반드시 두 사람이 축복해야 하는데, 하나는 대제장이고 다른 하나는 선지자입니다. 대제사장은 머리에 기름을 붓고, 선지자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하나님과 선왕의 뜻에 따라 왕으로 세웠다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당시의 선지자 나단, 제사장은 사독이었는데, 이 두 사람이 왕명을 받들고 기혼 강가로 가서 솔로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과 왕의 이름으로 왕으로 세우고, 다윗 왕이 타던 말에 태워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렇게 솔로몬이 입성할 때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솔로몬 왕 만세! 호산나 솔로몬 왕! 솔로몬 왕이여, 선왕인 다윗 왕의 뜻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소서. 호산나!” 이 호산나를 솔로몬 왕 때도 외쳤습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이스라엘은 다윗 왕 때 누리던 풍성한 복, 솔로몬 왕 때 누리던 번영과 문화적 창달―이스라엘의 르네상스는 솔로몬 왕 시대라고들 합니다―그 모든 것이 지금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사렛에서 온 예수라는 사람이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계통을 잇는 후임자로 입성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옛날과 똑 같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고 또 흔들며 소리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복받으소서.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우리 교회의 장식을 살펴보십시오. 단의 옆을 보시면, 수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장식에다가 군데군데 초록색 빛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푸른 잎, 막 돋아나온 종려 잎사귀를 상징합니다. 수난절이 시작되는 이 주일 아침에 보라와 초록의 장식은 우리에게 대비되는 두 가지 의미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희망과 새로운 탄생이요, 다른 하나는 수난의 시작입니다. 수난과 희망, 좌절과 소망, 이 둘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여!” 여러분 여기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나라를 자랑할 때, 자기 민족의 자긍심을 이야기할 때, 여러 조상들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특별히 세 사람의 이름을 내세웁니다.

첫째로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분의 아들은 이삭, 이삭의 아들은 야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사람의 이름은 항상 붙어 다닙니다만, 어쨌든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선민의 대표인 아브라함입니다. 둘째로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해방시키고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한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분이었습니다. 또 하나 자랑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지파로 갈라져서 다투고 또한 외국의 침략을 받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부족들을 통일시켜서 통일 왕국을 이룬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강력한 통일왕국을 이루어서 이방국가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고, 민족자주와 번영을 가능하게 한 분, 다윗!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이 셋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이름들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메시아가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여 호산나!”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모세의 자손 예수, 우리의 구세주, 호산나!” 하지도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 우리의 구세주 예수여, 우리를 구하소서.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수많은 군중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를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 왕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우러 오시는 분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새로 등극하는 왕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종려주일에 유대 백성들이 예수께 거는 기대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기대하십니까? 예수는 다윗과 솔로몬 왕을 이어갈 또다른 정치 지도자이고, 민족의 지도자이고, 통일 왕국의 지도자입니까?

그러나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분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모세의 후손이었지만, 거기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합니까? 바울은 예수님은 누구의 후손이 아니라 “새 아담”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이름 짓고 규정한 신앙, 아브라함의 선민신앙에 묶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한 모세라는 민족 지도자의 굴레에도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상인 다윗 왕조에도 국한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이 처음 만든 사람,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대신할 새로운 아담으로 그들 앞에 나서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그 새 아담의 계보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분을 다윗 왕조를 잇는 정치적 지도자로만 본다면, 그것은 결코 예수께서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기대치와 평가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 귀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왕으로 여겼던 예수가 그로부터 겨우 닷새를 지나고 나서, 예루살렘 성 안에서도 아니고, 성 밖으로 쫓겨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달고 십자가에서 죽어갑니다. 기대치에 못 미치자 실망한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 새 세계, 새 인간의 시조가 되실 분, 유대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온 피조물을 다 끌어안으시는 그분에게 유대인들은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오실 때, 오늘 성서 말씀에 보면, 군중들이 열렬히 따르고 환호했기 때문에 예수를 없애려던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한탄했습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다 그를 따라갔소.” 그 사람들은 그로부터 닷새 뒤 금요일 저녁, 예수가 붙잡혀 심문당하고 십자가형이 확정되던 때에,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보시오. 이제 다 잘됐소. 온 세상이 그를 버렸소. 제자들까지도.”

온 세상이 다 따르며 충성을 다짐하고 환호를 보내던 그 왕 같은 예수가 불과 닷새 만에 처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에서, 갈보리 언덕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의 엄청났던 기대치와 금요일의 완전한 절망! 그러나 예수는 다윗 왕가를 이을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아담으로 와서 이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으나,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장에 급하고 중요한 것은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다윗 왕조의 재건이었습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뭔가 허공을 떠도는 듯한 하나님의 나라, 평생 손에 쥐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 나라,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그 나라에 매혹을 느낄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새로운 아담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할 사람으로 그 길을 갑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제사는 있었지만, 그 속에 인간은 없었습니다. 율법은 공고히 서 있고, 성전체제도 있고, 종교이데올로기도 있었지만, 그 속에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슴을 담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담은 사람은 다윗이나 모세나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아니라, 처음 창조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담의 후손들, 새 아담의 계보에 속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다 뒤집어엎습니다. 성전 정화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단순히 성전의 장사꾼들을 몰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찾으러 왔는데, 당신들의 성전과 이념과 체제와 제도 속에는 왜 인간이 없느냐는 질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똑같습니다. 정치 투쟁으로 정당들은 난리입니다. 그들이 사람을 위해서 정치합니까? 정당들이 그렇게 합니까? 권력을 위해 정치하는 것 아닙니까? 정치만이 아닙니다. 경제도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때문에, 돈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 속 어디에 인간이 보입니까?

예수님은 웅장한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인간―아담이 없어서, 스스로 새로운 아담―인간이 되시겠다고 나섭니다. 군중들이 흔들던 종려나무는 새로운 아담, 새 인간을 찾으려는 예수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환호하던 군중들의 종려나무 가지는 기대가 무너지자, 서로 얽혀서 거대한 줄기가 되고 그 줄기는 십자가 형틀이 되어 예수님의 몸을 매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군중의 함성은 배반의 함성입니다만, 어찌 보면, 이건 기대치의 자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대 땅의 군중이 자신들의 기대를 담아 호산나를 외치던 그런 예수를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부르는 오늘의 호산나, 그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습니까? 다윗 왕조입니까?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정치권력입니까? 돈입니까? 출세입니까? 뭡니까?

다윗 전승도, 모세 전승도, 아브라함 전승도 다 새 아담을 만드는 하나님의 바다 같은 은혜 속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권력도, 재물도, 지위도 무시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님의 뜻이 그 속에 살아 있다면 말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이 그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면, 그것은 복된 힘, 복된 물질, 복된 지위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방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지만, 예루살렘은 비통하게도 그분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금요일까지의 닷새 동안에 인생을 압축해서 살아가십니다. 우리도 한번 시도해 보십시다. 오늘부터 예수와 함께 신앙이라 이름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십시오. 내일, 모레, 그리고 금요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 자신의 자만심이 완전히 죽어서, 예수와 함께 죽어서 그분과 함께 부활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때까지, 한번 우리 인생을 압축해서 한번 살아보십시다.

유대백성들은 예수의 처형 사건 속에서 ‘사실’을 보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두 강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기록에도 남아 있고, 우리도 예수께서 2천년 전에 그렇게 죽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 역사적 사실을 보면서 유대백성들은 단지 한 사람의 비참한 죽음을 보았습니다. 자칭 메시아,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 비참하게 죽었다.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 왜? 다윗 왕조를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들은 비참하게 죽은 예수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건으로는 인정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진 예수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사실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역사 안의 인물로서 예수는 한번 죽지 두 번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럼 왜 지금 십자가를 말합니까? 2천 년 전에 죽은 십자가 사건 속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는, 그 구원의 뜻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실은 보았지만,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역사적 사실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진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실이 다 진실일 필요도 없고, 진실도 아닙니다. 거꾸로 모든 진실이 다 역사적 사실인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진실도 있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는 진실도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믿든, 안 믿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사실’입니다.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음을 발견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라는 사실이 역사적, 영적 진실이 됩니다. 이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 십자가를 보면, 진실은 결코 손쉬운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찔림을 당합니다. 진실은 배척을 당합니다. 진실은 오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진실은 얻어맞기도 합니다. 진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진실은 죽임까지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실은 어둠 속에서, 죽임 속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동합니다.

이 과정을 빌립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똑같았으나 새로운 하나님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스스로를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처럼 됐으며,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를 졌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진실과 함께 하시렵니까? 진실의 길, 넓은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가셨던 아주 좁은 길, 골목길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길,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달려 죽었던 십자가, 그 처형의 서곡이 된 종려주일의 행진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구원의 진실을 믿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그 진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역사에서 진실을 배우지 못한 민족은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역사에서 진실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역사가 무슨 필요이겠습니까?

십자가라는 ‘역사’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새 구원의 사건을, 그 하나님의 진실을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나귀 타고 갔던 예루살렘 길, 왕이 되어서 간 그 길은 화려하고 넓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으로 간 길은 예수님 스스로가 나귀가 되어 우리 죄인들을 태우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려가신 길입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우리를 끌어안고 간 그 길의 끝에서, 바로 다음주일 아침에 우리와 함께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분과 같이 가시겠습니까?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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