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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그 누구도 주님의 부활 권세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마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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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의 감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힘차게 다가오는 생명에 관한 동적인 느낌입니다. 죽은 듯 엎드러져 있던 만물들이 마치 전원 스위치를 넣은 텔레비전 화면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겨우내 생명의 호흡조차 정지된 것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 그것이 다시 꿈틀거린다는 것은 겨울의 긴 정적이 잠들었을 뿐이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생명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 껍질은 죽어있는 낙엽으로 덧 씌어져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보호받았다 때가 되어 발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올라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순이 자라며 생명의 활력을 구가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주일 내내 고난주간을 보내며 또 한편 그 고난 뒤에 임하시는 주님의 부활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부활을 생각할 때 대자연의 봄과 함께 새로이 움돋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자연 속에 생명의 움돋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유사함이 매우 많은 것을 봅니다. 겨우내 추위에 덧씌워져 엎드러져 있던 생명이 봄기운의 따뜻한 능력에 힘을 입어 그 활동을 재개하는 것과 사망의 권세에 덮여져 있었으나 사흘 만에 말씀대로 능력으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서로 간에 교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번 한 주간 내내 약간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고 우리 가슴을 쿵쾅거리게 할 충분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사실입니다.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확인시켜주시는 생생한 감격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오늘 성경을 통해서 부활에 놀라운 기운을 인간적인 힘으로 막아보고자 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어리석음을 헤치고 일어나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직접 보여주시며 힘을 주시고 역사하시는 부활의 권세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부활의 권세가 있었기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 삶에 척박한 곤경 속에서 다시 일어나며 우리 삶과 생활에 부활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죄악으로 말미암아 얼룩진 우리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소망을 꽃피우고 낙심과 좌절과 눈물로 얼룩져 있던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소망으로 피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잃었던 사랑이 우리에게 다시 소생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회복하는 이와 같은 영광의 부활이 우리의 생활과 삶 속에서도 있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부활절을 기하여 우리 삶 속에 주님께서 회복하시는 새로운 은혜를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고자 아무도 막지 못하는 부활의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믿음을 갖지 못한 인간들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의심의 모습을 봅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근본적인 두려움과 의심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어떻게 될까 두려워 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63절에 보니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한순간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못 박아 끝냈으니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들의 심령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그들은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이와 같은 내용이 그들의 귓전을 다시 스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까짓 것 미친 소리야’라고 스쳐버리도록 애를 썼지만 그 소리의 진폭은 점점 넓어져 그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마침내 두려운 음성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려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 뜻을 이루지 않으려고 대항했던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고집이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두터운 옷을 입어도 차가운 겨울바람을 다 가리지 못합니다. 어떤 틈새로든 차가운 겨울바람은 스며들게 마련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하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고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모른척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우리의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하늘아래 나를 감출 수 없고 그 틈사이로 햇빛은 비취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두려움 그 누구도 이것을 피하고 져버릴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선택하여 범죄하였지만 그들 또한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수풀에 숨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나도 하나님을 벗어나려다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스스로의 아픔을 토설합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영적인 관점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해석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바른 일이지만 그들은 영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거부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개념 두려움의 음성이 들려 질 때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녕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마음에 들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재촉하시는구나 생각하고 속히 믿음 안에 돌아오면 그래도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억지로 거부하며 영적인 관점의 해석을 포기하고 자기마음대로 생각하고 반응하여 자기의 길을 간다면 이때는 구제할 수 없는 불쌍한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어리석은 군중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고가 그의 가슴에 다시 한번 솟아오르게 될 때 그들은 무엇인가 마음에 새로운 생각을 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으나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는 마음의 두려움이 엄습했을 때 그들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회심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64절을 보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찾아가 말을 합니다. 무덤에 갇힌 예수를 사흘까지 지키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두려웠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살아나시면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억지로 논리를 부여합니다. 인간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다가 예수님이 정말 사흘 만에 살아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무덤의 입구를 큰 돌로 가로막아 인봉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금 살아났다는 얘기 자체가 나오지 않게 합시다.” 그들에게 영적인 부딪힘이 있을 때 그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두려운 마음이 듭니까? 우리 마음에 예측하지 못한 두려운 심정이 들 때 우리는 부적을 만드는 것 같은 유사한 처방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합니다. 돌아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숨은 아담을 찾은 것은 아담을 벌주고 징계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아담에게 회개의 기회를 부여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숨은 아담을 찾으시는 것처럼 우리를 모두 찾으실 때 우리는 비록 잘못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정면으로 나아가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심방할 때가 있었습니다. 저희 교구목사님이 저를 기다리다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제가 이제 가야할 곳을 생각하고 선뜻 버튼을 눌렀는데 도착해보니 15층이었습니다. 15층은 저희 집입니다. 제가 언제나 엘리베이터 혹시 탈 기회가 있으면 15층을 누르다 보니 엘리베이터를 탐과 동시에 제가 버튼 누른 게 15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서슴없이 누르니까 같이 갔던 목사님이 ‘아, 목사님이 갈 곳 잘 알고 누르시겠지’ 하고 역시 그분도 가만히 있다가 같이 내려보니 엉뚱한 곳에 내린 것입니다.

삶의 관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늘 하던 대로 그대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의식하면서 우리의 행위를 의도적으로 이끌어 나가지 않고 가만 놔두면 우리는 이전에 하던 대로 움직입니다. 우리의 하던 관성이 무엇이지요. 죄악을 따르던 습관입니다. 우리의 관성의 법칙은 죄악을 따르는 습관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만 놔두면 의를 행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만 놔두면 죄를 행하게 되고 우리는 가만 놔두면 이전에 살았던 죄악의 방법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마음에 긴장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노력과 바들거리는 노력이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 흘러가는 대로 간다면 죄짓기 딱 맞습니다. 생각대로 한다, 내 마음 편한 대로 한다, 죄짓는 일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엉뚱하게 아무 소용없는 일에 괜한 힘을 쏟습니다. 65절과 66절을 보니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엉뚱하게 돌로 무덤입구를 막고 파수꾼으로 지키게 하는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엉뚱하게 되지도 않는 일에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힘만 쏟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힘만 쏟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힘껏 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바른가의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는 게 의미가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 없이 수고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뜻과 관계없는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악인들도 그들의 악한 행동을 성취하기 위하여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만 아니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대로 굳게 지키고 파수꾼이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한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세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 정도 가지고는 막을 수 없는 온 세상을 능가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주의 뜻을 거스르고 누가 주의 뜻을 가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부활의 권능을 가로막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능력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지금도 우리 생활에 세미한 부분까지 내려 오셔서 관여함을 누가 부인하고 외면하겠습니까? 우리의 은밀한 곳까지 찾아오셔서 능력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죄악이나 결단하지 못한 헌신의 부분을 끝까지 고집하고 소유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기운과 우리의 삶을 움직여가는 능력을 부인할 자가 이 세상에 없을 진대 우리의 우매함과 무지함과 의심과 가로막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품은 자들답게 새로운 은혜와 능력의 삶 속에 우리의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용입니다. 어떠한 방해도 막지 못하는 부활의 권세입니다. 왜 어떠한 방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세를 막지 못할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적인 소행이 아니라 신적인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한 인간이 태어나 고통을 받고 죽은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소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역사의 행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시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세 있는 신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떤 인간의 소행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위대하고 강하십니다. 화산의 폭발, 지진의 발생, 해일의 난무가 온 세상을 떠들썩할 터인데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역사를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만든 것들 중에서 비행기를 보면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큰 물체가 그렇게 무거운 짐을 많이 싣고 수많은 사람들을 싣고 나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첨단과학이 만들어낸 이와 같은 비행기가 어찌 작은 새 한마리의 자유로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새는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 언제든지 높아지고 낮아지고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을 텐데 아무리 비행기가 힘이 있어도 이 자유로운 작은 새의 선회함을 유연히 따를 수 없음을 우리는 봅니다. 자연을 능가할 예술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관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간으로서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의 행위로 보는데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 생활 속에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의 소행을 구별해 내는 영적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별 후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할 자세를 가지게 되면 우리 주님을 깨닫게 하시고 순종함이 비록 힘이 들어도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실 것입니다.

인간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를 가로막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역사 앞에 인간의 가로막음은 한갓 하잘 것 없는 작은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돌을 굴려내는데 어떤 인간이 그것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누가복음 23장 44절을 보면 하늘의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어두움이 지속됨을 보고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버텨보고자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사형을 집행하는 병졸, 백부장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됨을 고백합니다. 구경하러 모였던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며 가슴을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간적인 힘으로 막아보고자 했습니다.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긴 강에 조약돌 몇 개 던진다고 해서 그 파문이 계속 될 것은 아닙니다. 마침내 천지의 대세는 아무에게도 막힘을 받지 않고 흘러갑니다. 아무도 그 힘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막아보고, 피해보려고 애를 써도, 부인하려고 해도,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흐르는 개울을 흙으로 둑을 쌓아서 막을 수 있을까요? 잠시 뿐이겠지요. 시간이 되면 물이 흘러 넘쳐서 흙으로 만든 둑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옆으로 흘러넘쳐 결국 그것은 개울이 강으로 가고 강이 바다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은 아무리 막아보아도 이와 같이 인간의 힘으로 막기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포기하려고 그리스도를 피하려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려고 해도 우리 생활에서 잊어버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주님은 우리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어느 날 문득 우리 주님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나십니다. 어느 날 문득 우리의 목구멍 속에서 살아나십니다. 어느 날 문득 음성으로 우리 귓전을 스치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사실만큼 강한 능력을 가진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힘도 사실을 위조하고 변조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사실보다 더 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술이요, 그것은 괴변이고 그것은 사변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가로막는 인간의 행위는 어리석음 자체입니다. 우리 삶에 이러한 어리석음은 없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가로막는 일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말씀대로 되어진 계획과 섭리 속의 사건이며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6절을 보니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견적이고 우발적인 행위나 약한 인간의 지략을 가지고 그 권세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에 종횡 무진한 삶의 내달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신 다섯 번째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아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데 목마르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시편 69편 21절을 보면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쓸개 탄 해융을 주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절치 않으셨고 그 포도주를 적신 것을 마셨던 것을 봅니다. 즉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존재하고 이루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아주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오늘 성경이 이제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은 이차적인 축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게 어떤 여건이 주어졌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제가 여러분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시죠? 한번 대답해봅시다. 행복하시죠? 기쁘시죠? 감사하시죠? 축복을 받았다고 믿으시죠? 제가 또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 있으시죠? 눈물도 있으시죠? 아픔도 있으시죠? 고통도 있으시죠? 안 되는 일도 있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행복하시죠? 감사하시죠? 기쁘시죠? 여러분 이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내용이 우리들에게 조화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믿음의 축복입니다. 눈물 있어도 기쁘고, 아픔 있어도 감사하고, 슬픔 있어도 웃을 수 있고, 고통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극복의 자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위대한 유업의 출발선상에 설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교회 나오셔도 교회가 크게 부흥한다 해도 성도들의 기업이 확장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기력해진다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주의 교회의 일꾼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이제까지 지내오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이룸이었고 따라서 내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룸이 될 때 의미있고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돼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랑이 실현돼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인내가 실현돼야 해요. 우리를 통해서 선이 실현돼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여호와의 꿈이 실현돼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실현돼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일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의 성취를 이루어 부활하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대로 살고 우리를 통해서 말씀이 이 세상에 그대로 체(體)화될 수 있어야 됩니다.

자, 우리 옆에 계신 분들과 한번 인사합시다. ‘당신은 참 말씀을 이루고 사시는군요.’ 사실이죠? 쉽게 얘기합시다. ‘당신을 보면 늘 말씀이 이루어지는 걸 나는 보고 있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것같이 있으신데 이렇게 다시 한 번 얘기합시다. ‘당신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늘 봅니다.’ 스스로에게 얘기해 봅시다. ‘나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있어요.’ 그런데 왜 얘기를 안 하시죠?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이 돼야 합니다. ‘사랑하라’ 하셨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라’ 했으면 용서해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입니다. ‘고난을 받으라’ 하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승리하라’ 하면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물을 딛고 ‘기쁨으로 일어서라’ 하면 눈물을 딛고 기쁨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리라 하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거두는 삶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대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삶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세 번째 말씀입니다. 열심히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지는 부활의 권능과 기쁨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열심이 있는 사람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안식 후 미명에 그들은 안식일이 다 가기를 숨죽이며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은 죽어서 십자가에 못 막히셨고 무덤에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꿈을 이루어 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모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며 두려움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이들은 눈물로 울며 울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갔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거두려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라도 바르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사람들입니다. 내게 어떤 것도 해줄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첫 번째 부활의 소식을 전해주었고 예수님이 그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했습니다. 주님을 찾고,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하고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 바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탄의 별을 발견한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천사들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달려와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합니다. 부활의 기쁨은 새벽부터 달려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거두려고 했던 예수님을 진심으로 아꼈던 자들에게 첫 번째 소식으로 알려지고 곧 그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지금도 뜨거운 열심히 있고 사랑이 있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부활의 기쁨과 감동을 선물 하십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분, 축복을 원하시는 분, 말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더 큰 은혜와 역사를 더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여인들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것을 말로 하지 않고 그들의 삶으로 보였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끝났구나.’ 생각하고 통곡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찾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오늘 2절 이하를 보면 무덤을 보러온 이들에게 주님은 천사를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주셨습니다. 약간의 시간 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이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찾는 것 이상 구하는 것 이상을 주십니다. 한번 따라서 합시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구하는 것 이상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구하는 것 이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예배당에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을 봅니다. 때로는 낮에도 예배당에 기도하러 오시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늦은 밤에도 기도하러 오시는 모습을 봅니다. 무슨 안타까운 사연이 있기에 이 시간에 와서 저렇게 눈물을 흘리며 애곡하며 기도할까 하는 가슴 아픈 모습을 보며 생각하며 또한 같이 기도해 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때로는 가슴 아파 주님 앞에 나오지만 주님께선 우리의 기도보다 더 많은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다섯 가지 소원 있으면 열 가지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 조그마한 손으로 움켜봐야 얼마나 움킵니까? 여러분 평생 동안 얼마나 움키셨어요? 평생 동안 먹고 쓰고 남은 것 얼마나 되세요? 우리 조그만 손으로 별로 움키지 못해요. 주님의 손으로 우리들에게 축복하시도록 만드셔야 합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주님의 큰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게 합시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면 주님이 그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내 작은 것 챙기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더 주실 것이 없잖아요. 내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면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을 채워주시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손은 너무 커서 그 손으로 축복하시면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감당 못할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열심을 품은 순종은 현재보다 더 큰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오늘 7절 이하를 보니 빨리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는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해서 달음질쳐 갑니다. 그 과정가운데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평안하뇨’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시는 은혜는 말씀으로 인한 명령과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자에게 축복의 순서로 임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구하라 찾으라 문 두드리라’ 말씀하셨으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함 따라 순종하여 의심치 않고 구하고 실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말씀을 성취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자의 순서입니다. 이 사람은 구하는 것을 얻을 뿐 아니라 말씀 성취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이제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성도로서 대단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부활절을 왜 이렇게 부산스럽고 시끄럽고 또 우리들에게 기뻐야 될지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 그것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과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한 개인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인류사적인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게도 의미가 있고, 우리 모두에게 의미가 있어 내 삶을 바꾸고 기쁘고 감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어떤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우리 삶 속에서 부활해야 합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분들은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부활을 이루어야 합니다. 깨진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 깨진 관계를 화합하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은 고통 속에서 부활하셔야 합니다. 아픔 가운데 있는 분들은 아픔 가운데서 부활하셔야 합니다. 모든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과 인간적인 모든 괴로움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는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은혜로 다시 부활하는 능력을 이루셔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앞에 슬픔도 그만이고 눈물도 그만이고 아픔도 그만이고 우리들 마음속의 쓰라림도 그만이고 갈등도 그만이고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의 시대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성공해도 겸손해야 합니다. 풍족해도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감사 속에 베풂과 나눔을 이루어야 됩니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실패해도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생명의 소망을 가지고 넘어져도 일어나는 것이 부활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생활 속에 부활의 능력으로 체화되어 우리의 삶이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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