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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사순절(4)골고다 언덕 위의 세 십자가 (눅 2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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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④ : 골고다 언덕 위의 세 십자가(눅23:32~43)

  교회력으로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열렬하게 환영했던 사람들이 불과 며칠 만에 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으라고 소리쳤으니 얼마나 이상합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관심은 천국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해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근본적 차이 때문에 그들은 제풀에 실망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기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세에 무관심한 채 현세만을 위해 살아가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분명히 이 세상 너머 내세가 있습니다. 게다가 천국만 있는 게 아니고, 지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죽음과 내세를 맞이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말입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장기수가 출옥을 하루 앞두고 탈옥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기자가 찾아갔더니 교도소 대변인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매일 그 사람을 관찰하고 관리했지만 우리도 그가 왜 탈옥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체포되면 최장 20년까지 형량이 연장되는데 이 사람이 정신이 있나 없나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세상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세의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100년도 안 되는 지상 생애는 마치 하루 같이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영원에 대해 무관심한 채 살아간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내세를 천국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도록 촉구합니다. 천국으로 갈 것인가? 지옥으로 갈 것인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다시 한번 정리하고 확인하는 기회를 갖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은 빌라도 총독에게 애매한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께서 사형장에 당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형장은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언덕이었는데, 33절 보니까 ‘해골’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27:33 보면 히브리어로 ‘골고다’라고 되어 있는데 ‘해골’이란 뜻입니다. 그 언덕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으로 멀리서 보면 둥근 형상이 마치 해골같이 생겨서 그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우리가 ‘갈보리’라는 말도 사용하는데, 이 말은 역시 해골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그날 예수님이 혼자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아니라, 두 행악자(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한 가운데 있고, 좌우편에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높은 언덕이라 멀리서도 눈에 잘 띄었을 겁니다. 한번 그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그 몇 가지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갈림길이 되십니다. 

  4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두 행악자는 공범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두 사람의 십자가를 한쪽에 모아놓고, 다른 한쪽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워놓아야 합당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 십자가를 떼어 놓고, 그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의 심리를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인데도 유대인 무리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내심 얼마나 양심에 가책이 되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 그 강도들 사이에 끼워서 한 패거리인 것처럼 은폐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도를 오히려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사53:12 “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 ”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범죄자들 틈에 끼어 마치 죄인처럼 돌아가실 것을 예언했는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겁니다.(고후5:21 참조)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한 가운데 계시면서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 영생과 영벌 등으로 나눠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피부 색깔을 기준으로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셋으로 나눠지듯이 예수 믿는 인종인 ‘크리스천’(Christians)과 예수 안 믿는 인종인 ‘넌 크리스천’(Non-Christians)으로 나눠집니다. 그래서 요3:17~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려 죽어 가는데 좋은 주사 한 대를 맞으면 낫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병에 걸려 죽은 게 아니라 주사를 거부해서 죽은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듣고도 거부하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의 영생과 영벌의 갈림길이 되는 셈입니다.

  로키산맥의 캐나다 쪽 줄기에 한 산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분수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삼각형 모양의 지붕이 있는 집인데, 빗물이 그 지붕에 떨어질 때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내립니다. 한쪽으로 떨어지면 지류로 흘러들어가 대서양에 합류됩니다. 다른 쪽으로 떨어지면 지류로 흘러들어가 태평양으로 합류됩니다. 같은 데 있던 빗물이지만 영영 갈라져 만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이산가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롯의 가족이 그랬습니다.(창세기 19장 참조) 소돔성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지만 가족들의 반응이 각각이었습니다. 두 딸은 롯을 따라 나왔지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롯의 아내를 마지못해 따라 나오다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았고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가지만, 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 따라 영적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예수님 쪽에 속합니까? 모두 예수님 쪽에 속하여 다 함께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2] 구원은 오직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이 맨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했습니다.(막15:32 참조)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도 덩달아 욕설을 퍼부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의 모습이 범상치 않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욕을 들으면 맞받아치면서 같이 욕하고 난리를 피울 겁니다. 더욱이 십자가 고통이 크므로 소리를 치면서 저주를 할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침묵 가운데 모든 고통과 조롱을 감수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입을 열어 말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기도였습니다. 그 내용이 자기를 괴롭히는 악한 죄인들을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리들이 조롱하는 말들이 오히려 사실 그대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의 회개는 다른 강도를 책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39절~41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난 후 다른 강도를 책망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죄값으로 당연히 십자가에 달려 죽지만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는 이어서 예수님을 향해 간구합니다. 42절. “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실진대 천국에 들어갈 테니까 자기도 인도해 달라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이 뭐라고 응답하셨습니까? 43절. “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 여기서 ‘낙원’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행운아입니다. 누가 예수님으로부터 육성으로 직접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분명히 그날 운명한 후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평생 죄만 짓고 사형수가 됐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쉽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옥 가는 것은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노우 비자’(No Visa)이거든요. 모든 인간이 죄인이므로 그냥 가만히 있어도 지옥이 들어갑니다. 비자가 필요 없습니다. 반면 천국에는 비자가 있어야 들어갑니다.

  우리가 외국에 갈 때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나라마다 자기들이 제시하는 비자 심사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다 다릅니다. 그 기준에 합당하면 비자가 발급되고 입국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준에 합당하지 않으면 다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입국할 수 없습니다. 천국 입국 비자의 심사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른 인간 조건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죄인이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만이 의인이 되고(롬3:24 以信稱義)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하나님이 사랑이라면서 어떻게 지옥이 있다고 말하느냐 이겁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공의란 죄를 반드시 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는 길을 지시했는데 바로 그게 십자가입니다. 공의를 상하지 않으면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 외에 없습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가 됐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상대를 졸업하고 사업가가 됐습니다. 사업가 친구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주식에 손을 대다 그만 망하게 되었습니다. 만회해 보려고 불법을 저지르다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판사 친구가 담당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 판사 친구가 과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드디어 판결일이 되었습니다. 방청석에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면서 귀를 기울입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 갑니다. 그런데 벌금형으로 법정 최고형을 선고합니다. 사업가 친구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실망감이 역력합니다. 그런 재판이 끝나자마자 판사 친구는 법복을 벗어버리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얼싸안고 말합니다. “미안하네. 어쩔 수 없었네. 벌금은 내가 내겠네.” 거액의 벌금을 감당하느라 판사 친구를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판사를 정말 현명한 사람입니다. 판사로서 정의를 지키면서 동시에 친구로서 사랑을 지킨 것입니다. 

  강도가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간 것은 이렇게 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의인이 됩니다.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신의 죽음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3] 구원의 기회는 한시적이며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한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정말 아슬아슬합니다. 운명하기 직전에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기기막합니까? 천만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일생 중 언제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인생이 마감될지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우물쭈물하다 구원의 기회를 영영 놓칠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기회를 놓치고, 상대방도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내시고 한국 해비타트 대표로 수고하시는 정근모 장로님의 간증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 분이 있었는데, 하도 똑똑하신 분이라 전도할 마음은 있으면서도 혹시 면박이나 당하지 않을까 싶어 선뜻 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보를 들었습니다. 5공화국 당시 대통령 수석비서관이던 그 친구 분이 버마(미얀마)에 대통령을 수행하러 갔다가 아웅산 참사를 당해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나중으로 미뤘는데 영원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 비보를 듣고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하고 회개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 긴 것 같아도 기회가 항상 있는 게 아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 아니 영원을 좌우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른 강도는 그 순간의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림으로 영영 멸망당하고 만 것입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마치는 시각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찬스가 잇는 게 아니죠. 경기 몇 차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인생은 더 어렵습니다. 인생은 마감 시각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강도에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좀더 일찍 예수를 알았더라면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았을 텐데,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을 텐데, 천국의 상급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골고다 언덕 위에 세 십자가의 영상을 가슴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면서 십자가 구원을 다시 한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남은 생애 세월을 아끼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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