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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라 (막 15: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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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복음서의 기록 목적

사람들은 대체로 사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히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삼년 남짓한 공생애에 대한 증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공생애에 있었던 일을 다 기록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내용만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이 말씀처럼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복음서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대적들에게 붙잡히신 예수님

세인들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 대적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밤중쯤 되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다 칼과 몽치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에게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한쪽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만류하시면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2-54)

당시 로마군의 보병 군단이 6천명으로 구성된 점을 감안할 때 열 두 영은 7만 2천이나 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적들을 멸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말씀 한 마디면 적들을 제압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순순히 붙잡혀 고난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잔인한 십자가 형벌을 당하신 예수님

복음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아침 9시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6시간만인 오후 3시 경에 운명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십자가처럼 좋은 이미지를 가진 상징물도 드물지만, 원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장 흉측한 사형도구가 십자가였습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형은 인간들이 생각해낸 형벌 중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당국은 로마 시민에게는 이 형벌을 가하지 않았으며, 도망 노예나 반역을 도모한 식민지 백성을 처형하는 데만 썼습니다.

십자가형을 시행하는 방법은 이와 같았습니다. 먼저,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죄수를 무참하게 채찍질했습니다. 채찍은 보통 아홉 갈래난 것으로 중간 중간에 쇠붙이나 뼈 조각이 끼워져 있어서 그것으로 맞은 죄수는 살점이 묻어나오고 선혈이 낭자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채찍에 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예외 없이 이 같은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에 보니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채찍질을 당한 후에,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의 가로지르는 나무를 들쳐 메고 처형장까지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밤에 한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심문을 받으신 데다 채찍질을 당하셨기에 너무나 기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자주 쓰러지셨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인들은 마침 그리로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붙잡아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처형장에 당도하면 십자가 형틀을 땅바닥에 놓고 죄수를 그 위에 눕혀 놓고 그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아 고정시킨 후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세웠습니다. 이 때 죄수를 벌거벗겨서 수치와 모욕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죄수의 의복은 현장에 있던 로마 군병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4절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군병 네 사람이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하여 제비를 뽑았다고 증언합니다. 또 로마 총독 빌라도는 히브리와 헬라와 로마의 글자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패를 주님의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부자연스런 자세로 인해 죄수는 피의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심장에 극심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금방 죽는 것이 아니고 고통 중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몸이 튼튼한 사람의 경우에는 이틀을 넘기는 경우도 흔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비교적 짧은 여섯 시간 만에 운명하신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인해서 심장이 파열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날카로운 쇠못은 인체에서 가장 민감한 신경이 몰려 있는 손목과 발목에 박혀서 극심한 고통을 주게 되는데, 못에 박힌 상처와 채찍에 맞아 생긴 상처가 곧 곪거나 썩어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극심한 갈증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증을 견디다 못해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때로 형을 집행하는 로마 군병들이 죄수를 동정해서 마취재가 섞인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려 했으나 맛보시고는 마시고자 아니하셨습니다(마 27:3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되 그 쓴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날 골고다 언덕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대거 몰려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는가 하면,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정오가 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고난을 받으시니 해도 그 빛을 잃었습니다. 오후 3시 즈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육신적인 고통이나 동족의 모욕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신 예수님 위에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쏟아졌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셔서 그에게 모든 진노를 퍼부으셨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온 인류의 대속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 놓은 휘장을 가리키는데, 이 휘장은 어찌나 질긴지 황소 두 마리를 양쪽에 붙잡아매서 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아래서부터 위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손수 찢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혔던 불화의 장벽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의 피로써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20절에 보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기 때문에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현세적인 축복에 가려진 십자가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현세적인 축복을 받는 데만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음과 저주를 받으셨으니 이제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모든 복스런 결과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언뜻 보면,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고 현세적인 축복에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은 믿음 때문에 환난과 시련이 닥쳐오면 당황하면서 물러가고 맙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아 만사형통할 줄로만 알았는데 어려움이 다가오니 잘못 믿었다고 하면서 신앙을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싫어합니다. 이미 구원은 받아 놓았으니 이제는 편하게 믿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데 전심전력하는 사람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도들의 최대 관심사는 현세적인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싶지만 세속적인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으로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 출신인데다 당대 최고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할 만큼 철저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어딜 가든지 대접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여기서 “위하여”라는 말의 본뜻은 “대신하여”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지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양이나 소를 이끌고 성막으로 제사장에게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그 사람은 제물로 바칠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함으로 짐승에게 자기 죄를 전가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이 칼로써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짐승의 피와 고기를 제물로 삼아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구약시대에 당사자가 직접 짐승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죽인 자가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결국 내가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은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할머니가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앞에서 세례 문답을 해야 하는데 며느리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어머니, 목사님이 묻기를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하시거든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라고 대답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세례 문답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목사님이 묻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할머니는 도무지 답이 생각나질 않았습니다. ‘누구 때문이었더라’ 그 때 며느리가 시어머니께서 문답을 잘 하는지 보려고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며느리의 얼굴을 보자 할머니는 갑자기 답이 생각나서 “우리 집 며느리 죄 때문이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십자가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실감나게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야

오늘날 주일마다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직분도 받았으나 마음에 구원의 기쁨이 없이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지겹고 싫증이 납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타산적으로 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구원이 무엇인지 올바로 알지 못하거나, 그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 믿는 것이 감격 그 자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처음 사랑은 곧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 하던 때가 있었건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순수하던 신앙 위에 덕지덕지 때가 끼었습니다. 첫 사랑이 변질되어서 이기적이고 타산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하기가 싫고, 십자가에 대하여 설교해도 그거 다 아는 이야긴데 또 반복하는구나 하고 생각되거든 ‘내가 큰 병에 걸렸구나’ 라고 진단을 내리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대신하여 목숨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반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할지라도 받은바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드리는 데 너무나 인색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회개하고 더욱 주님을 섬기는 데 열심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에 열심내지 못하는 데 대하여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서 지셨습니다. 우리는 대속의 십자가를 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은 성도들이 져야 할 십자가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수반되는 핍박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에는 고통과 수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어려움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설교하면, 율법주의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고 하였습니다.

현대 문명의 특징은 편의주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안락한 것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음식을 씹어 먹는 것조차 귀찮아서 입에 넣으면 살며시 녹는 것을 좋아합니다. 편하고 안락한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닌데도 이제 완전히 몸에 익어서 고질적인 병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편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부드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들이 축복, 위로, 격려, 번영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편하게 하는 신앙생활은 그 만큼 은혜도 적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무죄를 변호해야 할 시간에 열렬하게 자기의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총독 베스도가 바울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다 미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성공에 미쳐있고, 또 어떤 사람은 공부에 미쳐있고, 또 어떤 사람은 쾌락에 미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무엇을 이루려면 자기 일에 미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몰두해서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미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미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말세지말에는 예수님께 미치지 않으면 세상에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불신앙이 가장 큰 죄요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데는 우리의 공로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는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날,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도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중 하나가 처형당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말하기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그 강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고난 주간에 할 일

사랑하는 성도님들,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모처럼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과연, 나는 얼마나 주님의 대속의 고난을 감사하면서 살아왔는가?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붙들고 있지는 아니한가 반성해 봅시다.

십자가가 옛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고 우리의 삶 가운데 생생하게 능력으로 살아 역사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을 향하던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감격의 눈물이 고이고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한 분도 예외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세상과 마귀와 자아를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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