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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 118:27~29, 마 27: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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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히 높은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신약에는 전체 복음서에 약 200번 가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흔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만 아버지라는 호칭이 100번 이상 나타납니다. 이전의 높고 높은 곳의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곁에 계시는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친밀한 관계로서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버지는 그 개념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일입니다. 이제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의 목요일에 예수님은 성만찬을 행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유다의 반역으로 잡히시고, 밤새 심문을 받게 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얼마 전에만 하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마가복음 14:36에는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조금 후에 십자가에서 다시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23:46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합니다.
  “아버지”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유독 십자가상에서 이 부분에서만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요? 아버지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아버지가 딸에 대하여 분노에 찼던 기억을 얘기해 줍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분노에 찬 느낌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말합니다. “너는 정원에 있던 그 나무를 기억하니? 그 나무가 밑둥만 남고 다 잘라진 것을 아니? 내가 네게 분노에 찰 때마다 나는 밖에 나가 나무를 자르곤 했지”. 하나님의 죄에 대한 분노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아들을 잘리게 하셨습니다. 아들을 고통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소리가 십자가 상에서 들려옵니다.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내 영혼을 주님의 손에 부탁합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게 하신 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고통당하신 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일도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습니다. 아들이 정신질환으로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 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답니다. 인도에는 ‘다우리’라는 지참금 제도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어느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시집 올 때 다우리를 적게 가지고 왔다고 하여 임신 3개월의 며느리를 죽였습니다. 온 몸에 기름을 끼얹고 성냥을 주면서 스스로 불을 질러라고 했지만 며느리가 거절하자 성냥불을 던져서 죽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인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온 인류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 지구상에 있는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모든 질고를 짊어지셨을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신 것은 나를 위한 예수님의 절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수를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회개자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머니를 위한 배려를 하셨습니다.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시편 22:1의 인용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신 의미를 새기며 고난주간을 살고 십자가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말씀 가운데 앞의 세 마디의 말씀은 개인적인 고통 보다 사람에 대한 용서와 함께 달린 강도에 대한 배려와 어머니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개인적인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파하셨습니다.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은 ‘포기하다’(abandon)란 뜻입니다. 이 말은 ‘궁지에 버려두다,’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도 못 본체 하다’(to leave in the lurch)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곤경에 빠져 있는 아들로부터 고개를 돌리시고 못 본채하신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을 가중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비가 아들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버리십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 버리지 않는다 해놓고 왜 나는 버립니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십자가라는 이름 자체는 로마 시민의 몸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눈과 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시민들은 십자가형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민족적 설움이었습니다. “하나님, 이럴 줄 알았으면 로마인으로 이 땅에 오게 하시지 그랬습니까?”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애절한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 애절한 기도에도 듣지 않고 귀를 막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 옆에 아무도 없는 소외감입니다. 고통이 고독을 겸하면 고통은 가중됩니다. 혼자 당하는 고통이야말로 극도의 고통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는 가장 어렵고 우리에게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가 없이 죽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죄가 있어 고통당하고 죽으면 억울하지야 않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억울한 죽음까지 당하시면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를 부르짖고 계십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살았고,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목에도 상처를 입어 음식을 간신히 삼키는 정도였습니다. 이 소년은 매일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가서 점심을 챙겨 드리는 일을 하였지만 별로 즐겁지 않았습니다. 조금 자라 청년기가 되자 이 일이 싫증이 났습니다. “이제부터 엄마가 할아버지 점심을 먹여드리세요”. 그 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너도 이제 할아버지의 일을 알 때가 되었구나. 할아버지는 원래 아주 건강한 분이셨지. 네가 아기 때 우리 집에 큰 사고가 났지. 집에 불이 난거야. 아빠는 네가 엄마와 함께 있을 줄 알았고, 엄마는 네가 아빠와 함께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너는 불타는 집 안에 있었던 거야. 이때 할아버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 너를 젖은 담요로 싸서 안고 나왔지. 너는 무사했지만 할아버지는 화상을 온 몸에 입고, 연기에 질식하여 응급실로 가서 오랜 치료를 받으셨단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일어나 앉지도 못하시고 얼굴도 일그러지신 채로이고, 음식도 못 드시는 거란다”.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랜 세월동안 한번도 소년에게 이 말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소년은 이제 아무 불평 없이 점심을 챙겨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보살펴 드립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통은 고독입니다. 예수님의 고통도 고독입니다. 함께 당하신 하나님의 고통은 누구도 몰라주는 고독한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소연 하듯 표현하신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는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정신적 고통이 많았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주지 못했을 때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걱정하며 “왜 여기에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나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합니다. 어머니도 몰라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얘기했지만 몰라주고,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수난 예고를 했을 때에 사랑하는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산 위에 올라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이런 모든 고통이 혼자서만 당해야 하는 메시야의 고통이었습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은 참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입맞춤으로 반역의 신호가 된 제자의 배신은 예수님께는 너무나 아픈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제자를 저주해야 하는 메시야의 또 다른 고통입니다.

최근에 ‘유다복음’이란 고문서가 번역되어 발표됨으로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가룟유다의 입장에서 씌어진 고문서입니다. 유다복음은 성경의 4복음서의 기록과 전혀 다른 예수님과 유다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신의 계획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고 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부탁으로 배신했다”고 합니다. 이 문서는 서기 180년경에 이레니우스가 이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2세기 ‘영지주의’의 한 파인 ‘가인파’의 영향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인파’는 가인 등 성경 속의 지탄받는 인물을 추종하는 종파입니다. 유다복음과 같은 또 다른 고문서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역사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고문서가 또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가치와 권위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성경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경에는 ‘도마복음’이 있고, 오래 전에는 ‘빌라도 보고서’라는 글도 있었지만 그것이 성경에 버금가는 가치는 없습니다.

김경일 교수는 ‘나는 오랑캐가 그립다’란 그의 저서에서 “버리지 않고 바꿀 수 없고, 죽지 않고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심으로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사적인 부름이 아닌 공적인 부름으로 인류의 구원자로서 소리입니다.

  지금까지 지상에서의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호칭입니다. 공적으로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모든 구세주로서의 공생애를 끝내시면서 하나님께 “하나님”이라고 공적인 칭호로 부르십니다.

  옛날 조선의 역사에 보면 중국에서 칙사가 오면 조선에서는 사신을 보냅니다. 봉명사신이 중국을 많이 갔습니다. 사신들이 갈 때는 지위에 무게를 두기 위하여 조선의 왕자들이 갈 때가 많았습니다. 여러 달 동안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인 왕에게 보고합니다. 그 때 왕자는 아버지에게 “아바마마” 하지 않고 “전하”라고 합니다. 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와서 아버지이지만 왕에게 공적 칭호를 사용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이제 공적으로 구세주로 와서 모든 임무 끝냈다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 시릴은 “하나님은 지구를 최대한 끌어안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팔을 뻗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며 벌리신 팔은 지구를 다 끌어안으시는 구세주의 팔입니다. 릭 워렌은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고 계시면서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너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이제 팔을 벌리고 다 껴안았습니다. 이제 더 벌릴 팔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신호입니다.

  일전에 어느 목사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외국에 여행 중이었는데 어머니께서 위급하시다는 전갈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목사님을 일정을 서둘러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직행하였습니다. 어머니 곁에 가서 “어머니 저 왔습니다”라고 하니 갑자기 어머니께서 눈을 크게 뜨시고 한참 바라보시더랍니다. 그러시더니 두 시간 후에 어머니께서 운명하셨답니다. 아들이 오지 않으니 숨도 거두시지 못하시는 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기 전에는 돌아가시지도 못하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시기 전에는 돌아가시지 못하고 “나의 하나님”만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세운 뉴욕의 에이즈 병원에서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에이즈로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의 눈은 생을 마감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한 수녀가 가서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제 아버지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알아내어 속히 오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오자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내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부드럽게 안았습니다. 두 시간 뒤에 그 젊은이는 눈을 감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제 아버지가 다시 아들을 하늘에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마지막 공적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구세주로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고 숨을 거두시기 전의 마지막 보고입니다.

결론

  바울의 패러독스를 보세요.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해놓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못 박혀 죽었다고 하면서 다시 산다고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해놓고 다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는 것도 초월했고, 죽은 것도 초월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혼자 외롭게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절규하시며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고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죽지만 우리는 함께 죽는 것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우리나라에 와서 언론이 자신을 혹평하는 것을 보고 언론에 한 마디 했답니다. “당신들은 언론도 아닙니다” 이 말을 “You are not alone” 그랬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닌 것은 예수님께서 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홀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그 분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우리 예수님은 높은 십자가에 혼자 매달리셔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주님의 이 절규를 기억하며, 동참하며, 감사하며 지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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