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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보이려는 눈과 보는 눈 (마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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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 형제의 눈 속의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끊임없습니다. 그 부르심의 핵심 내용 또한 언제나 동일합니다. 창 3:9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던 그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기 원하시며, 그 정체성에 따라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찾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창조주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를 거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한 채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 그 위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이 모습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합니다. 창세기 3장 이후 끊임없이 인간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한 정면 도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정죄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남들과 비교한 수준과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그러한 안목으로 다른 사람들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간직된 자기 인식을 근거로 남들을 판단합니다. 이러한 판단은 언제나 남들을 정죄하는 목적의 판단으로만 나타납니다. 결코 지혜를 얻을 목적의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지혜를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관계하지 않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식에 실패하는 외식하는 자들의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진들은 한결같이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 아래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의 고백도 동일합니다. 모세는 시 90:5-6에서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도 시 103:15-16에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사 40:6-7에서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고 고백 합니다. 지혜자 솔로몬도 전 3:19-20에서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라고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신약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그 고백을 바탕으로 벧전 1:24-25에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들이 이러한 기본적인 자기 정체성 확인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보며, 이웃을 보게 하십니다. 이러한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존재입니다. 이 정체성을 벗어난 자들이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7:3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말씀은 모든 인간 존재가 티나 들보를 지닌 죽을 운명, 들의 풀과 꽃과 같은 운명의 존재라는 기본 인식을 전제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티”가 있는 자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들보”가 있는 자도 동일한 죄인입니다.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할 위치에 서 있지 못한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확인하고 반응할 존재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며, 포기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티와 들보를 통하여 남들을 정죄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작게 보이는 티를 보며 정죄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줄 모르는 자는 들보를 지닌 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죽을 운명의 피조물임을 모르는 자입니다.

2. 자기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 형제의 눈의 티를 뺄 수 있느냐?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무엇인가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죽을 운명의 것을 통하여 판단할 수 없습니다. 티가 있는 자도, 들보가 있는 자도 모두 정죄의 판단을 할 판단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판단 척도가 없는 자들이 행하는 판단이 불법이며 하나님 앞에서 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 7:4에서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7:3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나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수사법적 질문이며, 마 7:4는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들을 정죄 목적의 판단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수사법적 질문입니다. 남들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살펴보라는 수준의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말씀이 아닙니다. 신구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수사법적 질문은 답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 대답을 들을 필요 없는 문제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질문법입니다.

그만큼 유대인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창조주 안에서의 자기 존재 인식인데, 외식하는 자들은 그러한 인간의 피조물 된 존재인식을 무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정죄 목적의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인식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한계를 인식하는 자로서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한계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전도서의 전도자처럼 삶을 즐기는 달인이 되어갑니다.

그 한계를 인식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며 감사함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그 한계를 인식하며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자는 그들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그들을 정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정죄의 욕구나 압력도 받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어 누립니다.

이것이 죽을 운명의 사람들이 동식물과 다른 특성입니다. 이것이 정죄 받을 외식하는 자들과 영생의 복을 누릴 온전한 자들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존재의 한계와 정체성을 아는 가운데 바라보는 눈이 복된 눈입니다. 일찍이 시편 기자 중에서 고라 자손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하나의 시로 정리하여 읊었습니다. 그 시가 시편 49편입니다. 시 49:1-4는 서론이며, 시 49:5-12와 시 49:13-20의 두 개의 절로 구성된 시입니다. 자신의 삶을 선물로 아는 자들은 이 시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반복되는 후렴구에서 시 49:12는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시 49:20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인간이 죽을 운명의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존재가 남의 티를 뺄 수도 없습니다. 남의 들보도 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자들만이 온전한 자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회복시키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 49:3-4의 서론에서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며 네 가지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하십니다. 첫째는 “지혜”입니다. 둘째는 “명철”입니다. 셋째는 “비유”로 번역된 “잠언”입니다. 넷째는 “오묘한 말”로 표현된 “수수께끼” 등의 격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아는 자는 온전한 판단을 통해 이 네 가지의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아는 자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며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 들보를 처리하는 명철을 얻습니다. 그 들보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회복해 나갈 수 있는 잠언의 경험을 누립니다. 그 들보의 경험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제에게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는 정죄 대신에 그 지혜와 명철과 잠언과 수수께끼를 통해 그를 사랑하며, 그가 회복되도록 섬길 수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의 죽을 운명의 헛된 것을 측정 도구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한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흙과 같은 존재 인식을 하는 온전한 자들은 그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과 잠언과 수수께끼의 측정 도구를 통하여 사랑하며 회복을 위한 섬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 누리고 있는 삶임을 아는 자들은 그 티와 들보를 통하여 자신을 깨달으며, 그 티와 들보로 인하여 겸손과 감사함의 손길로 나아갑니다.

3. 먼저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뺀 후에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빼라!

그래서 예수님은 마 7:5에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세 단계의 절차를 확정해 주는 명령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눈 속의 들보를 빼내는 작업”입니다. 둘째는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밝히 보는 작업”입니다. 셋째는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빼 내는 작업”입니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작업이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내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외식하는 자가 결코 행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자기가 자신의 눈의 들보를 볼 수 없습니다. 창조주를 바라보며, 창조주 안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들보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들보를 보는 온전한 사람들은 형제의 눈 속의 티도 밝히 볼 수 있으며, 사랑의 수고를 통하여 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빼어 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보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어떤 측정 도구로 어떤 목적을 위해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 척도”는 “보는 척도”입니다. “보는 것”의 중요성은 성경 상에 나타나는 “보다”라는 단어의 빈도수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 7:3-5에서만도 보는 것과 관련된 단어가 세 가지나 나타납니다. 마 7:3의 “보다”와 “깨닫다”, 그리고 마 7:5의 “보다”입니다. 마 7:3의 “보다(블레포)”라는 단어는 신약에만 132회가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시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볼 줄 아는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보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이때 성경에서 알려주는 보는 척도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모든 것,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모든 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척도”입니다. 즉 자신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분석적인 바라봄입니다. 죽을 운명의 자신의 것들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 안에 박혀 있는 들보까지도 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며, 고집과 교만 가운데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하는 자의 바라보는 측정 도구입니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내려놓고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척도”입니다.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며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식, 경험, 위치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라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의식까지도 포기하며 바라봅니다. 이것이 온전한 자의 바라보는 척도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바라봄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내어 놓는 바라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을 운명의 피조물의 정체성 속의 바라봄입니다.

외식하는 자의 바라봄은 자신의 것을 통해 인간예측을 하며 다른 사람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바라봄은 모두 정죄를 위한 판단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할 수 없는 바라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히 평생 동안 바라보아도 자신의 눈 속의 들보를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라보는 사람마다 정죄당합니다. 그가 남의 눈의 티를 빼러 다가갈 때마다 온전하지 못한 눈으로 바라보며 행하는 사역이기에 상처를 주며 영혼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의 바라봄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다른 사람을 바라봅니다. 아래 있는 것으로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자신에게 내려올 선물을 기대하는 바라봄입니다. 지혜와 명철과 잠언과 수수께끼의 은혜가 선물로 임할 것을 기대하며, 성령께 의지하는 바라봄입니다. 분석적인 바라봄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는 감성적인 바라봄입니다. 자신의 정보 축적의 산물을 통한 바라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축적의 선물을 통한 바라봄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들보를 빼내는 바라봄입니다.

마 7:3에서 “깨닫다”로 번역된 “카타노에오”라는 단어는 “주의 깊게 관찰하다”라는 단어의 바라봄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들보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는다고 책망하십니다. 자신의 욕심의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주의 깊게 관찰하라는 요구입니다. 성경의 모든 계시, 환상, 꿈, 이상, 묵시들은 인간의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은혜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바라봄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카타노에오”의 주의 깊은 바라봄을 회복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마 7:5의 “보다”로 번역된 단어는 “디아블레포”라는 새로운 단어로서 “꿰뚫어보다” 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온전한 성도로서의 바라봄이 회복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확히 꿰뚫어 보며 그들의 티를 빼내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바라봄과 판단입니다. 사랑과 회복을 위한 바라봄과 판단입니다. 이것이 남들에게 보이려는 눈이 아니라 남들을 살리기 위해서 보는 눈입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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