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실패하지 않는 비결 (눅 22:54-62, 막 14:66-72)

  • 잡초 잡초
  • 210
  • 0

첨부 1


고대<그리스>와<트로이>의 유명한 싸움이 있습니다. 그 때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진멸시키고 난 뒤에 보복할 수 없게끔 트로이의 남자는 갓난아기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학살해버립니다. 유일하게 숨겨진 채 트로이의 구세주로 촉망받던 한 소년마저 적발해내어 그의 어머니로 하여금 천 길 벼랑에서 밀어뜨리게 함으로써 여자만의 슬픈 트로이로 변모시켜버립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최초의 실패로 휴머니즘이 상처 입을 때마다 곧잘 거론되어왔던 사실(史實)입니다. 그런데 이 실패를 실패로 묻어두지 않고 교훈으로 삼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그리스 합리주의>라고 합니다. 그 학살을 저지른 같은 희랍의 동시대인인 작가[유리피데스]로 하여금<트로이의 여인>이라는 비극을 남기게 하여 그 잔혹한 희랍인 자신들의 실패를 고발하고 참회하게 하며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 공유 재산으로 후세에 물렸다는 점입니다. 스스로의 실패를 자인하는 겸허함과 그 실패를 발전의 도약으로 삼는 희랍 합리주의가 바로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문화를 이끌어온 원점이 되고 있으며 유럽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실패로부터 발전적 교훈을 얻어낸다는 데는 대체로 서툰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실패의 이유에 대한 추궁은 대부분 감정적이거나, 도덕적 책임 추궁이 되고 책임자의 탄핵으로 끝나버릴 뿐이지 그것이 유사한 실패로 번질 수 없게끔 하는 사회 전체의 교훈이나 공유 재산으로 남아나질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패란 성공의 또 다른 교과서입니다. 똑같은 실패를 범하지 않는 비결은 이미 경험한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실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된 실패는 잘못 된 것입니다.

[로라 슐레징어]박사의 책「인생을 망치는 7가지 변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늘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 생각은 있으나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을 망치더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책 서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고집대로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고 꿈꾸던 그 환상을 모조리 이루어 보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가능한 한 노력은 하지 않고 희생을 적게 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나쁜 짓 하고서도 벌 받지 않고 피해가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상처주고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멋진 복수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의 원수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여러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행복의 순간, 기쁨의 순간이 있지만 고난과 실패의 자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실패의 자리에서 대비책을 강구해 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고안한 기업이 보험회사입니다. 건강보험, 사고보험, 실직보험, 노후생활보험, 화재보험, 사망보험, 심지어 서양에서는 이혼보험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는 단순히 돈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그 아픔의 깊이와 복잡성이 있습니다. 돈으로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을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실패 자체를 보상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 이제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리입니다. 신앙의 자리에서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에도 실패는 있습니다.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가끔은 신앙의 자리에서 실패하여 아파할 때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 실패를 인정하며 늘 환영하며 살수는 없는 일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될 수 있으면 실패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실패의 경험이 많을수록 나에게 유익이 되는 실패도 있다지만 신앙의 실패는 거듭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거저 묵묵히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그 안에 소망을 두고 최종목적지에 안착할 때까지 달려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신앙에 실패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고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깊이 새겨보아 베드로 같은 신앙의 실패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습니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 곁에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누가 옆에 있는 주는 것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겠는데 제자들은 다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구경꾼들 틈에 끼여 붙들려가는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그렇게 가야바의 법정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계집종과 또 다른 사람들이 숨어서 따라 온 베드로를 알아봅니다. 그럴 수밖에요. 그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어떻게 했습니까? 늘 돌출 행동과 언제나 앞장서서 거들먹거리던 모습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너도 한 패가 아니야?”고 종 주먹을 들이댑니다. 그때 베드로의 모습이 너무나도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비겁하고 회피적일 수가 없습니다.“나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맹세코 아니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이 일로 베드로는<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라는 평생에 씻지 못할 낙인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물론 회개는 했습니다만 오늘 이런 실패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남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이 종려 주일에 베드로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는 결코 똑같은 실패를 저질러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오늘 바로 우리가 베드로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실히 알고 신앙의 실패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베드로가 실패한 내막을 살펴보면 기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3년 동안이나 매일 예수님을 쫒았던 베드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앙적 가르침을 적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과 삶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순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예수님, 심지어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까지 가르치시던 예수님, 뿐만 아니라“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본문까지 주신 예수님, 무엇보다도 바로 이 자리에 서기 전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이르시던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까지도 무시하고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은 지금 생명을 부여잡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당신의 생명이 아니라 베드로의 생명이요, 제자들의 생명이며, 당신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 땅의 인생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당신이 지금 살아야 되겠다는 기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과 사랑하는 백성들을 살리려는 기도였습니다.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질 때 마치 핏방울처럼 되는 생명의 진액이 담긴 기도를 드리고 계실 때 베드로는 뭐하고 있었습니까? 관심조차 없이 늘어지게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지금 베드로는 그가 누구인지 손사래 치며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실패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우리교회는 내일부터 고난주간 한 주간동안 전교인새벽기도회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길지도 않습니다. 한 주간입니다. 이 정도의 작정에도 실패한다면 기도가 없어서 신앙의 실패자가 되었던 베드로를 나무랄 자격이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깨어서 기도하는 내 신앙이 되도록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베드로의 실패 원인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들었습니다만 귀담아 듣지도 않고 기억도 하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의 의미도 알법하고 그 말씀하시는 심중을 헤아릴 만도 합니다만 그런데 언제나 결정적으로 그 놈의 잘 난 성격 때문에 실수를 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혈질적이고 게 잘난 체 하는 성격이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이 당신을 모두 버릴 것이며 뒷날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는 장면이 막14장에 나옵니다. 그때 제자들이“그런 일을 할 사람이 바로 나입니까?”라며 서로 걱정을 하는데 그때도 베드로의 대답에는 자기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옵니다.“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뭐라 하십니까?“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하셨을 때도“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 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합니다. 그런데요 베드로의 이 말을 잘 분석해 보십시오.‘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린다.’고 은근히 자기우월감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자기 우월감과 교만함에‘내가 죽을 지언 정’이라고 하는 생명을 건 약속을 함부로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합니다.<내가 누구냐?>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확고부동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입니까? 말씀을 건성건성 듣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도, 기억하지도 않아도 될 만큼 능력 있는 사람입니까? 어쩌면 베드로도 딴에는 자신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막14:30에 보면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또박 또박 말씀하십니까?“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때와 시간과 방법까지 정확하게 꼬집어 주시면서 말씀 하실 때에 그가 귀담아 듣고 마음에 담아두었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에게는 숱하게 들리는 주의 음성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들려지는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면 성공할 것이요, 내 팽개치고 살아가면 틀림없이 실패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결정적인 또 하나는 주님 곁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실 때에 베드로가 보인 모습은 어떻습니까? 54절입니다.“멀찍이 따라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런데 이것이 실패한 자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가야바의 뜰에는 하속들과 군병들과 구경꾼들로 대 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들 사이에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밀려나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군중들 틈에 묻혀 버린 모습니다. 그리고는“나는 예수의 예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딱 잡아떼고 있었습니다. 아마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안타까운 듯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을지 모릅니다. 만약베드로가 좀 더 주님께 가까이 있었다면 그래서 도망갈 틈도 없이 바짝 붙어 있었다고 하면 어쩌면 모른다고 잡아 뗄 엄두도 못 냈을 것입니다. 섭섭해 하는 주님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가책에서 순간적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일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떠나 버릴 위험이 있는 사람은 늘 주님과 멀찍이 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를 나서면 여러분들이 주로 서 있는 자리는 어딥니까? 직장입니까? 가정 입니까? 사업장입니까? 그곳이 어디이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적당히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믿음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이라면 늘 주님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바짝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하라는 주님의 부탁이 들립니다. 그래야만 말씀에 귀 기울여집니다.
오늘 베드로의 실패가 곧 우리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고난 주간에 다시 한번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신앙적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철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