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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세상의 소망인 부활신앙 (창 22:7-8, 22:1-19, 마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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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마 28:1)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마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마 28: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마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 쌔
(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8: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 세 여인이 좌절과 낙담 속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 본 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실망과 좌절, 낙담과 불안, 두려움 속에서 금요일 밤과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 후 첫 날 새벽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들은 믿고 따랐던 지도자를 잃고, 마음에 상실감과 패배감이 가득 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도 예수님과 한 패라는 이유로 처형당할 위협 속에서 두려워하며, 숨어 지냈습니다. 이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좌절과 두려움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여러 번 약속하신 말씀들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요 20:9에서 사도 요한은,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고 설명합니다.

이들 중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세 여인이 있었습니다. 막 16:1은 그들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고 알려 줍니다. 이들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는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마 27:61). 이들은 장사 후 슬픔 중에,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에 예수님의 장례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보인 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아닌 초자연적인 현상과 빈 무덤입니다.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무덤을 막았던 돌을 굴려내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된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도 세 여인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서만 슬퍼했습니다. 주의 천사는 초자연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망과 좌절 속에 잠겨 있는 세 여인에게 마 28:5-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주의 천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알려줍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제자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이적적인 사건들을 목격하고, 천사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들은 세 여인은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심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들을 깨달으며 한 편으로는 무서움 속에서, 또 한 편으로는 큰 기쁨 속에서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들을 직접 만나 “평안하뇨”라고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기쁨은 기적의 체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할 때는 여전히 실망과 좌절과, 슬픔뿐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말씀이 회복되었을 때, 부활의 증인으로서 제자들에게 달려갈 수 있고, 더 나아가 부활의 주님을 친히 만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약속의 회복은 삶의 회복입니다. 좌절과 상실이 소망으로 회복됩니다. 상실한 마음이 큰 기쁨으로 회복됩니다. 부활의 약속의 회복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의 약속의 회복을 통해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게 합니다. 부활에의 약속의 회복이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부활의 약속의 회복이 죽음의 권세를 물리쳤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이러한 부활을 보장 받는 자들입니다. 부활의 약속이 우리에게 임하여 있습니다.

고전 15:16-20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절망에서 소망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평강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큰 기쁨 속에 다른 지체들과 이웃을 향해 달려갑니다. 부활의 약속을 믿는 부활신앙은 우리의 새로운 삶을 전개시키는 원동력입니다. 부활신앙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천입니다. 부활의 약속을 믿고,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미래의 소망을 심어줍니다. 이 땅의 연약함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습니다.

2. 부활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 미래를 향한 소망을 전이시킨다.

우리는 구약의 아브라함에게서 이러한 부활신앙의 소망 있는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창 22:1-19에 나타나는 네 번째 장면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을 바라보며 단 둘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의 장면입니다. 번제를 시행하기 전의 마지막 발걸음입니다. 단 둘만의 마지막 등반길에서 아브라함은 또 한 가지의 시험을 받습니다. 그 시험은 믿음 중 소망의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소망은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인 확신입니다. 이 소망이 현실 속에서는 인내로 나타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현실을 이기는 삶이 인내입니다. 이 소망과 인내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과 인내는 믿음에서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영원 전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경험적으로 확인된 하나님의 예정을 알고 감사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앞으로 남은 영원한 미래도 그와 같이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현실 속에서 소망과 인내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이 소망이 믿음 가운데 있는지 시험받는 장면입니다.

본 장면에서 마침내 아들 이삭이 입을 열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할 이야기도 많았겠지만 두 사환과 다른 요소들이 모두 정리된 상태에서 이제야 아버지와 아들의 단 둘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7절을 보면, 단 둘의 대화는 마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은밀히 이루어졌을 그 대화,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알 수 없던 그 대화를 나누셨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갈보리 언덕으로 친히 이끌어 내셔야만 했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모습과도 같습니다. 마 26:36-46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리듯이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들리지 않는 단어이다. 이 말씀에서 “에게”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매우 깊은 사실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에게”의 “에게”는 전치사로서 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향한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즉, 무엇을 향한 육체적, 정신적 움직임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 단어는 이삭의 몸과 마음이 모두 아브라함을 향한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대화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집중한 상태에서 오직 아버지의 말씀만 듣고 반응할 자세로 아버지를 향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삭의 간절한 질문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제자를 따로 머물게 두시고 홀로 하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마 26:39-42를 보면 첫마디 말씀이 이삭의 첫마디와 같습니다. “내 아버지여!”라는 외마디의 부름이었습니다. 긴장의 순간을 느끼며 부르는 부름입니다. 이 외마디 속에는 이삭의 모든 삶이 들어 있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리며, 아버지와 즐거움으로 동행하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은 분명히 제사를 드리러 가는 상황인데 제물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 동안 제사를 드릴 때마다 이삭이 연로한 아버지를 도와 제물에 대한 관리를 해 왔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고르고, 그가 끌고 갔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은 없고, 나무만 등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될 “어린양”이 없었습니다. 출발 때에 아버지께서 준비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에게 명령을 하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었습니다.

그 동안의 경험을 볼 때 아버지가 제물에 대한 준비를 잊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이삭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 더 이상한 것은 자신들을 도와 줄 두 사환까지도 멀리 떼어놓은 것입니다. 경건한 훈련을 받았을 이삭이 이런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사환까지 떼어놓을 때는 그 사환들에게도 알려지지 말아야 할 비밀스런 사건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상황에서 이삭은 제물이 될 존재가 자기 자신뿐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환까지도 머물게 했을 것이라고 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깨달았다면 두려운 상황입니다. 분명히 제물은 드려져야 하고, 대치하거나 말릴 만한 사환들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의 경험상, 받은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 오신 아버지 아브라함의 손에 놓여진, 자신을 바라볼 때 두렵고 고민스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몸과 마음을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로 향하게 하여 아버지를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 이 부름은 그 동안의 이삭의 모든 삶에 종지부를 찍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여!” 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원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한 데 자신 외에는 제물로 대치될 대상도 없고, 하나님을 알기에 불순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점점 다가오는 갈보리의 모습이 아버지를 향하여 외마디의 부름으로 부르게 한 것입니다.

마 26:38에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표현합니다. 이 고민스런 부름이 곧 이삭의 부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피할 수 없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이삭의 고민스런 상황이, 겟세마네 기도 때의 예수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고민스런 부름은 이삭에게만 슬픔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상황으로 이끌고 가야만 하는 아브라함의 고민과, 슬픔과, 고통은 더욱 더 큰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를 갈보리 십자가로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은 인간적 표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러한 고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체험케 하시고자 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선물로 주셨던 그 “약속”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러한 고통스런 결정과 인도하심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신 것임을 체험케 하신 사건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고, 감사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 시험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이 부름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마음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자신이 받은 “의”가 하나님의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고민과, 슬픔 가운데서 주어진 것임을 알도록 준비시키십니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야만 했던 하나님의 고통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체험케 하시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름에 대해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던 모습과 동일한 모습으로 응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아들의 부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응답하였습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향한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아브라함의 응답입니다. 이 응답에 의해 이삭은 자신의 현재의 문제를 말씀드리고 해결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의 세 번의 기도에서 자신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모든 인성적 문제의 해결을 본 그분 예수님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셨던 그 응답을 확신 가운데 아들 이삭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아들 이삭에게로 문이 열려져서 이삭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 주는 아브라함의 응답은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응답과도 같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응답은 이삭에게 소망을 주는 응답입니다. 모든 것이 보장된 분이 보여주시는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는 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반응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지닌 자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소망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그분, 끝까지 성취시키실 그분 하나님을 믿는 소망의 믿음이 자신을 남에게 열어서 소망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응답 속에서 아브라함의 소망의 믿음이 확증되고 전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응답을 통해 소망을 지니게 된 이삭은 질문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의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이삭이 확인하길 원하는 하나의 질문이다. “보십시오, 그 불과 그 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할 그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서 오직 “어디에”라는 질문이 그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태워 올릴 “그 불”이 아브라함의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제물을 태울 “그 나무”는 이삭의 등에 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로 태워 올릴 제물인 “그 어린양”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의 의문은 “그 어린양”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경건한 믿음 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제사 행위를 통해 이삭도 제사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과 필요한 제물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판단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산에 오르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지금 “그 어린양”이 쥐어져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번제로 태워져 드려져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은 이 “어디”라는 것을 확인 받기 원했습니다. 이삭이 출발 때부터 마음에 두어 왔던 질문입니다. 지시한 산까지 오며 이 문제가 이삭의 최대 관심거리였을 것입니다.

9절에서 순순히 결박을 받는 이삭의 모습을 보면, 이삭은 “그 어린양이 내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인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입장에서는 피하길 원하고, 지나가 주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예수님과도 같이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의미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는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그 “어디”가 자신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대답하였습니다. 8절 말씀을 살펴보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대답 속에서 두려움을 이기고, 계속 모리아 땅의 한 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대답 속에서, 준비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준비하시는 분이 아브라함이 아닌 하나님 자신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히브리어 “라아”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친히 예비해 주심에 대한 확신이 이삭으로 하여금 담대함과 평안함으로 산에 오르게 했습니다. 응답을 받은 이삭은 아브라함과 함께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므로 그 어린양이 어디에 있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삭 자신이 이방 풍습처럼 제물로 되어진다 하여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확신이 주어졌습니다.

이삭이 갖게 된 이러한 확신은 바로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확신입니다. 명령하신 하나님이 그 명령을 이루실 줄 아는 확신입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 분이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은 약속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과의 동행의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믿음을 주셔서 의롭게 하시고, 동행하시며, 그 믿음을 체험케 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에게 그 믿음을 주게 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대답을 통해 자신이 제물이어도 좋다는 확신과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에서 확신을 얻고 담대히 갈보리를 향해 간 것과도 같은 담대함입니다(마 26:45-46). 소망을 지닌 부활신앙은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자에게도 동일한 소망을 주며, 동일한 증거를 받게 하고, 동일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이끕니다. 부활신앙이 주는 소망은 부활신앙의 고백을 믿음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대로 전파됩니다.

3. 부활신앙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의 영원한 사역에 의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경험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 속에 살아오게 했습니다.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을 향한 소망 가운데서 살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의 대화 속에서 그 소망을 확인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소망을 아들 이삭 앞에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의 믿음이 있음을 체험케 된 것입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시험하시기 원하셨던 믿음의 부분이 바로 소망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소망을 통해 마음을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소망, 경험으로 알게 한 소망은 바로 “자신을 위하여 번제할 그 어린양”을 준비해 주신다는 소망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자녀를 주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난 세월처럼 미래에도 영원히 자신을 위해 준비해 주시리라는 소망이 아브라함의 믿음 가운데 정확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한 변명이나 핑계가 아닙니다. 믿음의 반응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제물로 준비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서열이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제물로 준비하는 것은 이방 풍습입니다. 사람을 준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십니다. 사람은 동물을 제물로 준비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이미 명령하실 때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제물이었습니다. 이삭을 제물로 고르시고, 선택하신 분도 아브라함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제물과 하나님께서 “지명”하시는 제물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제물은 인간이 준비하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명하시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제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직접 지명한 것은 오직 이삭뿐입니다.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영원한 속죄의 제물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지명하신 것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켰습니다. 이 제물은 우리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였습니다. 이 제물은 영원한 축복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삭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제물로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이삭은 평상시의 제사에서 자신의 제물을 골랐습니다. 아브라함도 동물 중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을 자신의 제물로 친히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선택한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순종하며 따라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인 이삭에 대해 아브라함은 명령을 집행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제물로 삼으신 후 이루어질 일들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제물 된 이삭을 사용하신 후 자신과의 약속대로 이루어 주시기 위해 회복시키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표현 속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시는 부분에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동행 속에서 그 약속의 그리스도를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 그리스도가 어린양이심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관사를 붙여서 “그 어린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어린양”은 요 1:29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외쳤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그 어린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삭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실제 어린양이신, “먼저 계신”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믿은 것입니다. 이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과거나 현재나 영원까지 준비되어져질 어린양이심을 소망 가운데 믿은 것입니다.

이삭의 손을 잡고 있는 아브라함의 손에는 이 소망의 믿음이 담겨져서 이삭에게 증거 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번제할 그 어린양을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확신과 소망이 전달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약속을 이루실 소망이 믿음에 포함될 때 기이한 환경 속에서도, 기이한 명령 속에서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평강 가운데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믿음을 준비케 하고자 하십니다. 이 소망의 믿음은 부활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미 이 자리에 오기 전의 앞선 시험을 통해 그 믿음이 준비되었으며, 이곳에서 최종적으로 정리, 확인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자신의 부활신앙, 소망의 믿음이 드러날 때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평강 가운데 길을 걷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제 평강 가운데 마지막 길을 걷습니다. 8절의 마지막 문장은 “그리고 그들은 그들 둘이 함께 갔다”라고 하며, 평강 속의 마지막 걸음을 표현합니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다시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걸음입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처럼 “내가 다 이루었다.”라는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는 상태 속에서의 걸음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라는 마지막 말은 영원한 사역의 완성에서만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서도 쓰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제물의 영원성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 예수를 제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제물의 영원성이 이것을 가능케 합니다. 이삭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영원한 제물의 영원한 사역을 통해 영원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바로 부활신앙의 영원성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이러한 영원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영원한 제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믿고 나가는 삶은 부활신앙의 삶이며, 이 땅의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처럼 부활에의 약속을 믿는 믿음 가운데, 절망 중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만나 소망을 주는 존재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에의 약속은 우리의 새로운 삶의 능력이 머무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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