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눅 15:11~24)

  • 잡초 잡초
  • 385
  • 0

첨부 1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8-20상)

  우리 그리스도인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은 무엇에서부터일까요? 우리 인간의 삶을 값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에서부터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회개의 역사’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회개해야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의 말씀임과 동시에 세례요한의 설교의 주제이기도합니다(마 3:2). 또한 회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선포하도록 일러주신 내용이었고(막 6:2), 오순절 성령감림 사건이후 베드로의 설교의 결론이기도 했습니다(행 2:37)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삶에 있어서,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함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현하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첫째과정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해야만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로막는 그 많은 죄와 허물에서 용서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멸망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럼 회개는 무엇입니까?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우리들이 해야 할 회개를 찾게 됩니다.

  회개는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에,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을 재산의 분깃을 달라고 졸라, 그것을 팔아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허랑방탕하여 모든 제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곳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겨우 돼지 치는 일자리를 얻어 일하게 되었고, 먹을 것이 귀함으로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둘째 아들은 이렇게 깨닫습니다. 이 부분이 새 번역 성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둘째아들은 너무나 비참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의 근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돌이켜, 잊고 있었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떠난 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신의 범죄를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은 더욱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들의 문제의 심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격어야 하는 아픔과 괴로움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왜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잃고 살아갑니까? 왜 우리의 삶은 더럽고 제멋대로이고 엉망이고 고약합니까?

  그런가 하면, 그런대로 갖출 것 갖추고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채워질 수 없는 것처럼 만족치 못합니까? 이 정도면 내 믿음생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 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없고 불안과 두려움만이 가득합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멀리 떠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둘째 아들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내 멋대로 살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깨닫는 것입니다. 잘못되어 있고, 온전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데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는 자기 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의 아픔과 고달픔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만들어가는 죄 된 삶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회개는 깨닫는 것뿐만 아니라
돌이켜 아버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아달라는 아들처럼 회개와 함께 겸손의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아버지를 향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과거의 자리와 절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돼지우리와 단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 돌이켜 아버지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삭개오처럼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고 회개의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할 것을 에스겔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겔 18:30-31)

  ‘아버지에게로’ 의 길은 자신의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버림의 길이며 앞으로의 자신을 아버지의 판단과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완전한 순종의 길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희랍어로 회개라는 말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마음의 완전한 변화’, ‘의지의 새로운 결단’, ‘삶의 목적에 대한 갱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의 또 다른 말, ‘에피스트레페인’(έπιστρέϕειν)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한다(Turning away frum Sin, Turning to the Load)는 뜻입니다.
  돌아서는 것(turning) 이것이 회개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자복과 함께 절대 그 죄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책임의 다짐을 져야 합니다. 

  한 시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개들이 밤중에 심하게 짖어댔습니다. 개들이 심하게 짖은 다음날은 흔히 뭔가 도둑맞은 것을 발견하게 나름인데, 이번에는 잃은 것도 없이 도리어 대신에 되돌려 받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6주 전에 도둑맞았던 자동차용 스피커 세트가 한 메모지와 함께 남겨져 있었습니다.
  “당신의 스피커를 훔쳤던 일을 사과드립니다. 그렇지만 이제 저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또 당신의 용서를 구하면서 여기 돌려드립니다. 다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으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처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제 삶 속에 영접해 드렸거든요. - 구원받은 자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범죄에 대하여 갚을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갚을 수 있는 것을 갚는 이유는 회개의 증거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단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의 축복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아달라는 아들처럼, 회개의 증거를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분명하게 다가가는 회개의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는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멀리서도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죄를 구하기 전에 먼저 측은히 여겼습니다. 아들을 보자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긍휼히 여긴 것입니다. 괘씸하게 여기기보다 먼저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급히 달려와서 열렬하게 입맞추었습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아들로서의 관계회복을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더욱 분명해 집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시는 아픔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예수님을 희생하시기까지 하시는 큰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당신의 자녀들을 이미 용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돌아와 죄를 자복하며 품군의 하나로 써주기를 간구하는 아들에게, 무조건 용서하시고 아들로서의 관계 회복과 함께 아들의 영광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기쁨과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회개는 하나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흘려주신 보혈 안에서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녀는 이미 그 용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아올 때에 측은히 여기시며  무조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관계회복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해주는 하나님자녀의 권위의 가락지를 끼워주십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의 권리를 회복시켜주시는 신을 신겨주십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고난주간 한 주간동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전교인 총동원 특별 새벽예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자손이라고 생각지 말라”(마 3:8, 9)고 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각하는 신앙적 우월감을 벗어버립시다. “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질문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는 기도의 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회개함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함으로 제일 좋은 옷을 입혀주시고 신발을 신겨주시고 가락지를 끼워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영광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성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