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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종려주일의 어린 나귀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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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2,000년 전 바로 오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2부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로비와 통로에서 교회학교 아동부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이 광경이 재연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말고도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차례대로 보면, 제자들, 어린 나귀의 임자들, 제자의 온 무리들, 어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실망을 주고, 본받지 말아야할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이때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에 타시는데 안장이 없으니까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에 걸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의 목요일 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시자 도망갔습니다.
그 가운데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았습니다.

요즘 매스컴이 「유다복음서」라는 문서를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유다복음서」의 내용은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한 유일한 제자이다. 훌륭한 인물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목요일 사순절특별새벽기도회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아하, 그런 주장도 있나보구나!’ 하는 것에서 끝나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교회 홈페이지의 ‘말씀’ 코너에 들어가서 ‘성서일과’ 방에서 4월 6일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제자의 온 무리, 마가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들은 이때는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의 금요일,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 21) 아우성을 쳤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어린 나귀의 임자들입니다.
이들은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린 나귀의 임자들은 “주께서 쓰시겠다”라는 말 한마디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자기의 어린 나귀를 내 주었습니다.
우리도 “주께서 쓰시겠다”하면 우리가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시간을 써야겠다.’ 하면 주저하지 말고, 말없이, 나의 시간을 내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너의 재능을 써야겠다.’ 하면  주저하지 말고, 말없이 나의 재능을 내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너의 물질을 써야겠다.’하면 주저하지 말고, 말없이 나의 물질을 내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자녀를 써야겠다.’ 하면 자녀를 주의 종으로, 선교사로, 말없이 내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학개서 2장 8절은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놓으셨던 것을 주님이 필요해서 찾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금주가 돈 쓸 일이 생겨서 은행에 예금한 돈을 인출하려고 할 때 ‘안 됩니다.’ 하는 은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이자까지 붙여서 내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나를 원하시면 둘을 내드릴 수 있는 데까지 이를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주님이 쓰겠다고 할 때 어린 나귀의 임자들처럼 시간, 재능, 물질, 자녀,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주저하지 말고 내드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존재들 가운데 우리에게 제일 많은 교훈과 은혜를, 변함없이 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타신 어린 나귀입니다.
본문에는 “나귀 새끼”라고 나오는데 이 말이 어감이 좋지 않아 “어린 나귀”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4절에는 “나귀 새끼”라는 말 대신에 “어린 나귀”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바꾸는 실제적인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행한 설교는 그 원고가 거의 대부분 홈페이지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는 욕설이나 점잖지 못한 말이 들어있는 글은 올라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올라가지 않는 말들 가운데 대표적인 말이 ‘새끼’입니다. 
제가 오늘 “나귀 새끼” “나귀 새끼‘ 하면 이 설교 원고는 홈페이지에 올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2,000년 전 바로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타신 어린 나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하며 그 일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구원의 역사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이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십자가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의 역사는 한참 헛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뒤따라가지 않고 앞서서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이 만일 가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아, 예수님은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해, 귀족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구나!’ 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때 예수님이 잘 꾸며진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아, 예수님은 장군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구나! 이제 로마 군인들과 큰 싸움을 벌여 그들을 물리치겠구나!’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때 나귀는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타는 동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에 대해 친근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분이로구나!  우리 편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요즘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서민적인 행동이 중국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오래 전부터 입던 낡은 점퍼를 입고 다니고, 학생들이 보낸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하고, 공장에 시찰을 가면 여공들과 공장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그래서 선전(深川)이라는 곳에서는 환경미화원들이 원자바오 총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예수님에게서 그 이상의 친근미를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주일 아침에는 예배 시작 직전에 찬양대실에 가서 찬양대를 위한 기도를 하고 예배실 문앞에서 잠시 성도들을 영접하다가 단에 오릅니다.
오늘도 그렇게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2부 예배 때 찬양대를 위한 기도를 좀 일찍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예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일부러 밖에 나와서 성도들이 교회에 오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몇 가지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아, 우리 교회 주일 아침 교회 풍경이 참 활기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주차장이 벌써 부족하네!’ 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조금만 더 일찍 오면 주차안내 하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본인은 온전한 예배로 은혜를 더 받을 수 있을 텐데…’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일 강하게 느낀 것은 ‘주차 안내하시는 남선교회 회원들, 수고가 참 많구나!’ 하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때 차량 안내하는 분들, 수고를 참 많이 하시는데  아셔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목양교회에 오실지 모르는데 예수님이 이 교회에 오신다면  티코 승용차를 타고 오실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가마나 말을 타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예수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내위원들, 새신자양육위원들, 전도사님들도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목양교회에 오신다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12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의 강점 가운데 하나가 서민층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  낮은 계층의 사람들, 대접 받지 못하는 사람들,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도 누구나 알고 있는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만일 이 때 기독교가 한문성경을 사용했다면  기독교는 한문을 이해할 수 있는 양반 중심의 종교, 제2의 유교와 같은 종교로 인식 되었을 것입니다.

전덕기(全德基 1875~1914))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1900년대 초기에 상동교회를 담임했던 분입니다.
상동교회는 우리나라 민족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던 교회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가들을 ‘상동파’라고 부릅니다.
전덕기 목사님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를 비롯해서 세 사람의 특사를 파견하는 일도 전덕기 목사님이 주도하였습니다.
전덕기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민중을 돌보는 일에 힘썼습니다.
항상 나막신, 쑥 가루, 관을 준비하고 있다가 가난한 집에 초상이 나면 가서 시체를 염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으레 길이 진창이어서 나막신을 준비했고, 쑥은 시체 썩는 냄새를 막기 위해 코에 넣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 아무도 접근하지 않으려하는 시신들은 전덕기 목사님이 도맡았다고 합니다.
일본이 기독교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105인 사건’이라는 것을 꾸몄습니다.
이 때 기소된 사람이 105인이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전덕기 목사님도 이 때 체포되었습니다. 취조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늑막염을 얻었습니다.
이 늑막염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1914년,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 목사님의 장례를 치룰 때 상여가 나가는데 남대문 일대의 천한 백성들, 기생, 백정, 상두꾼, 심지어는 불량배들까지 십리 행렬을 이루어서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돌아가셨다.’고 울면서 장지인 고양(高陽)까지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서민층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이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린 나귀는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일을 했습니다.
구약성경 스가랴서 9장 9절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아,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구나!’ ‘이 분은 공의로운 분이로구나!’ ‘이 분은 구원을 베푸실 분이로구나!’ ‘이 분은 겸손한 분이로구나!’ 알았을 것입니다.
나귀는 말로써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나귀니까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겠지요.
예수님을 태우고 묵묵히 걸음으로써 알려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의 일,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그리고 내가 속한 회사나 단체에서 일을 하는데, 제자들 같이, 또 많은 무리들 같이 처음에는 들떠서 열심을 내다가 얼마가지 못해 돌아서 버리는 그런 존재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린 나귀와 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일, 중요한 일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하는 것을 잘 알려주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 보잘 것 없는 나를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귀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모두 사람과 가까운 가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나귀가 여러 군데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귀라는 말이 성경에는 149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나귀가 좋게 쓰인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저 나귀는 운송수단이었다(창22: 3, 출4: 20 삼상 25: 20), 농사짓는데 쓰였다(사30: 24), 재산의 일부였다(창24: 25,  30: 43, 32: 5, 욥1: 3, 24: 3), 짐을 운반하는데 쓰였다(창42: 26, 수9: 4, 삼상 16: 20, 25: 18 느13: 15), 때로는 식량으로도 쓰였다(왕하 6: 25), 이렇게 나옵니다.
성경에서 나귀가 좋은 뜻으로 나오는 것은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 정도일 것입니다.
‘발람이 모압 왕으로부터 ‘와서 우리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귀를 타고 가는데 그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람에게 충고를 했다,‘ 그런 내용이지요.
그밖에는 이사야서 1장 3절의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을 비롯해서 한두 군데에 좋은 뜻으로 나귀가 언급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나귀는 나쁜 것을 말하는데  나옵니다.
먼저 나귀는 사납고 싸움 잘하는 존재를 말할 때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가 출산을 하지 못하니까 자기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하갈이 임신하니까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하갈은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여주인에게 돌아가라고 하시고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하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16: 12)

나귀가 있는 곳에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24절에는 나귀는 음탕한 존재로 나오고, 호세아서 8장 9절에는 나귀가 방종한 존재로 나옵니다.
신명기 22장 10절에는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와 나귀는 힘이 다르고 걸음걸이가 다릅니다.
소와 나귀를 짝을 지어 밭을 갈면 나귀는 소가 농사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나귀는 이렇게 남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나귀인데, 주님은 그 나귀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나귀인데 주님이 타시니 공의를 상징하는 동물,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도 나귀와 같은 존재인데, 거칠고, 부족한 것이 많은 존재인데 주님께서 불러 귀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소녀가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사람들의 동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앞에는 낡은 그릇이 하나 놓여있고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거리에 나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는 사연이 적힌 종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이 대단히 낡은 것이었습니다.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습니다.
지나가던 신사 한 분이 이 광경을 보더니 소녀에게 그 바이올린을 잠시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바이올린인데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신사가 연주를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신사는 사람들에게 이 소녀의 딱한 사정을 말하고 우리 힘을 합해 이 소녀를 도와주자고 했습니다. 순식간에 많은 돈이 모였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사라지는 신사의 뒷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 때서야 ‘아, 저 분이 그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 아무개 선생이 아니냐? 우리가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니 참 행운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같은 낡은 바이올린이라도 명연주가의 손에 들리니까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좋은 일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 낡은 바이올린 같은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이번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하인스 워드 선수는 혼혈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혼혈인들은 천대를 많이 겪었습니다.
특히 흑인 혼혈인들은 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인스 워드 선수가 혼혈인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혼혈인들에게 용기를 주데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나가서는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이라는 것에 너무 매달려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청와대에서도 다인종종합대책을 2, 3주내에 발표한다고 합니다.
선교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한민족은 선교에 여러 가지 강점을 가지고 있으나 단일민족인 이라는 것을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다른 민족과 함께 사는 훈련이 부족한 것은 선교에서 약점이 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인스 워드 선수는 지난 금요일에 자기가 태어난 이화여대 부속병원을 찾아갔는데 이화여자대학 부속병원의 처음 이름은 보구여관(保救女館)이었습니다.
보구여관은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스크랜톤(Ssranton) 라는 감리교 여자 선교사가 1887년에 정동에 세운 여성전용 병원입니다..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은 민비가 지어줬는데 ‘여자들을 보호하고 구하는 집’ 이라는 뜻입니다.
이 보구여관을 위해 최초로 한국에 온  최초의 여의사 이름이 하워드(Meta Howard)입니다.
하인스 워드를 합하고 줄인 것과 음이 같습니다. 
보구여관은 1899년에 정동에서 동대문 지금의 자리로 옮겨 일제 때는 ‘동대문부인병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아까, 우리나라에 들어온 복음은 어려운 사람들부터 찾아갔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고대 이집트나 유럽에는 연금술사(鍊金術師)라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금술은 값어치 없는 금속을 귀금속으로 바꾸는 기술인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연금술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연금술사들은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 분들은 화학이 발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실패한 연금술사가 아닙니다.
주님은 낮고 천한 나를 귀한 존재로 바꾸는 성공한 연금술사입니다.

우리는 나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거칠고,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불러 주셨습니다. 귀한 존재로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감사하면서 주님이 시키시는 일, 주님을 위한 일을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셋째, 첫 번째 봉사와 관심과 사랑을 주님께 드리고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야 합니다.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이 어린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는 나귀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태운 것이 이 나귀가 태어나서 첫 번째 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내실 때도 아직 사람을 장사지낸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첫 번째 봉사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사랑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 1번에 예수님을 두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어디에 예수님을 모시고 계십니까?
가장 중요한 곳에, 가장 중앙에 예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일을 다 하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데 물질을 쓰고, 남은 것 가운데서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께 바치고 남은 것을 다른 일에 써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 주일의 첫날인 주일 아침에 주님의 전인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잘 하는 일입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을 태운 어린 나귀와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새로운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잘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태운 어린 나귀와 같은 삶입니다.

처음 관심을 예수님께 가졌으면,  첫 번째 일이 예수님과 관계된 것이었으면 그것이 변하지 말아야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제자들과 무리들은 나중에 변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에베소교회의 여러 가지를 칭찬하셨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셨습니다(계2: 4).

이 나귀가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나귀가 사람이었다면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처음에 주님을 태웠다. 나는 품위 있게 살아야 한다.’ 했을 것입니다.
나귀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겠지만, 이 어린 나귀의 주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어린 나귀의 주인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경건한 사람이었고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 주님을 태운 어린 나귀에 대해 ‘이 나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님을 태운 나귀였다.’ 하면서 늘 아끼고 위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가 생겼을 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행2: 44~45).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행4: 32).
이 때 이 나귀 주인이 제일 먼저 이 나귀를 끌고 와서 ‘이 나귀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타셨던 바로 그 나귀입니다. 이 나귀를 교회에 바칩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곳에 쓰십시오.’ 봉헌했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예배로 시작한 이 주간을 경건하게 보내셔야합니다.
오늘만 경건하고 내일부터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 같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내일부터 더 경건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거룩한 주간이기 때문에 이번 주간을 ‘성 주간’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번 주간의 월요일은 ‘성월요일,’ 화요일은 ‘성화요일,’ 이번 주간은 계속해서 이렇게 부릅니다.
성주간, 거룩한 주간이라는 이름에 맞게 구별된 주간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로 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보니 말씀하신대로 어린 나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주간의 목요일에 성만찬을 행하셨는데 먼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가서 “선생님이 네게 하시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내로 들어갔더니 말씀하신대로이었습니다(눅22: 7~13).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아니 오늘 우리의 마음에 다시 오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의 어린 나귀와 같은 존재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공의로운 분입니다, 그 분은 겸손한 분입니다. 그 분은 왕입니다,’ 알리는 존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무익한 존재인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감사하며 주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첫 관심, 첫 사랑을 주님께 드리고 그것을 변하지 말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의 어린 나귀와 같은 존재들이 되어 변함없는 교훈을 사람들에게 주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2,000년 전 지금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지금 역시 나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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