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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일의 주인 (마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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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신 종려 주일의 주인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농부에게는 두 명의 쾌활한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소년들은 아버지의 밀밭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소리쳤습니다. "저걸 좀 좌, 여기에 있는 이것은 보기 싫게 구부리고 있는데 저기에 있는 것은 보기도 좋게 똑바로 서 있잖아!" 그러자 또 다른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내가 만일 우리 아버지였다면 여기에 이렇게 고개 숙이고 있는 것들을 모두 뽑아서 던져 버릴 거야."  그러자 소년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엿듣고 있던 아버지가 나타나 소년들에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애들아, 그렇지 않단다. 여기 너희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이 이삭들이 사실은 가장 좋은 것들이란다. 이 이삭들이 보기 싫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유는 밀알이 무겁기 때문이야. 하지만 저기에 똑바로 서 있는 이삭들은 텅 빈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 요컨대 너희들이 꼭 알아야 할 점은 바로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 밀밭의 경우가 적용된다는 것이야. 인간들 중에서도 텅 빈 머리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언제나 더 설쳐대는 법이란다."  작은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큰 모임에 참가하고 난 후 돌아오는 길에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까 그 모임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많은 말을 하며 연설하던 그 멋진 신사 분은 누구예요?" "머리가 텅 비고 허영심만 강한 떠벌리란다." "오, 슬픈 일이군요. 그러면 아버지, 내 왼쪽 편에 앉아 있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머리를 숙이고 거의 말도 하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떠벌리라고 비난한 그 사람에게조차 몇 번이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던 그 사람 말이에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들은 후 따뜻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아비는 하늘이 너에게 그 사람의 겸손과 더불어 그 사람의 지식까지도 선사하시기를 바란단다!" (고개 숙인 이삭)

본문의 말씀은 사62:11절과 슥9:9 을 인용하되 예언서들에 대한 정확하고 자구적인 인용이 아니라 다분히 신학적 관심과 의도가 첨가된 것으로, 예수님의 나귀 입성을 사 62:11와 슥 9:9에 담긴 상징적인 두 의미로써 동시에 나타내고자 함을 봅니다.

이사야 62:11절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합니다. 이는 구원 선포에 의하면 구원자는 마치 개선장군이나 정복군주 또는 강력한 통치자의 모습으로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 입성함을 나타냅니다.

슥 9:9 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합니다. 이는 메시야는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겸손히 입성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들과 평화를 전하는 전령들이 사용하던 짐승인 나귀(삿 5:10;10:4)를 타고 오신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들의 고대하던 진정한 구주이며 평화를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려 주일 주님은 나귀를 탓시고 예루살렘 성에 둘어 오십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주인의 주인은 평강의 왕을 나타냅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라 하여 왕이신 메시야를 말씀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합니다.
  말은 전쟁과 용맹을 상징하나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의 권세와 특권을 부여받으신 임금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권자요 절대군주입니다. 그리스도는 시온의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시 2:6) 합니다. 시온에서 왕으로서의 영광이 빛납니다. 시온으로부터 "율법이 나왔으며,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나왔습니다."
복음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은 통치됩니다. 교회의 율례가 제정되고 공직자들이 위임되고 보호 아래 놓입니다.
한 나라의 통치 분위기는 통치자의 성품과 통치 방법에 따라 달라집니다. 메시아가 도래하여 이루실 새 왕국은 결코 무력과 억압으로 세워지는 공포의 왕국이 아닙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것처럼  메시아가 통치하시기에 '평화의 왕국'을 이루시려 '평강의 왕'으로 오시었습니다.
탄생에 관한 가르침에서도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2-14)합니다.
종려 주일 입성하실 때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눅 19:37,38)입니다.
종려 주일 나귀를 타신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십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인은  겸손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는 겸손하여라고 합니다. 자신도 겸손 하시다고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하십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시고 겸손히 오시었습니다.
(빌 2:7,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비천한 곳에 겸손하게 탄생하시었습니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가보면 콘스탄틴 대제 때 마리아를 기념하여 말구유 자리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습니다. 요사이도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으레 그 예배당에 한 번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념예배당은 꽤 큰데 출입구는 하나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좁고 낮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눅 9:46-48)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영광 하늘나라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 은혜 중에 제일 큰 은혜는  곧 겸손입니다.
그래서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고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세계는 1일, 2일, 3일... 하는 순서에 따라 만들어져, 6일째에 완성되었습니다. 사람은 그 마지막 6일째 만들어졌습니다. 왜 인간은 마지막에 만들어졌을까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탈무드에 의하면, 파리 한 마리도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다지 교만해지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겸허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0-28)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가장 귀한 자리 영광된 자리는 겸손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지상의 교회에서도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된 은총과 복이 임 할 줄로 믿습니다.

포테스 수녀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습니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니 교황님께서 서 계신 것이 아닌가! 교황 요한 23세께서 성신병원에 입원 중인 사제 문병을 오신 것이었습니다. 포테스 수녀는 문을 열어 드린 후 원장 수녀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급히 달려갔고, 원장 수녀는 흥분된 얼굴로 달려 나왔습니다. 이제껏 성신병원에 이렇게 귀한 분이 문병 온 적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당장 자신을 소개해 올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성신수녀원의 원장 수녀입니다." 교황은 다정한 미소로 응답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높은 사람은 못됩니다. 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일뿐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5-12)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 14:7-14)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광에 이르는 길은 이 겸손의 길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낯추는 길이 자신을 높이는 길입니다.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눅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배당에 나와 예배 할 지라도 먼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길고도 참된 겸손이 충만 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먼지만 일으키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4-1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사랑 하시는 사람들을 위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 만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성이론 발견으로 크게 성공한 다음에도 대자연 앞에서 자신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과 전문적인 지식은 어디에서 나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험기구에 있던 물에 손가락을 적신 뒤 한 방울의 물을 툭 떨어뜨리며 말했습니다. "나의 학문은 바다에 비유한다면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겸손히 부모님께 순종하며 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
겸손하게 조그마한 마을 나사렛에서 사시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

필립 네리는 16세기의 아주 훌륭하고도 지혜로웠던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천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명성을 얻고 있는 자신이 그런 일을 요구받다니, 그녀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났습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자기 영광의 도성에 입성함에 있어서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솔로몬은 부와 지혜가 절대적이었습니다. 비잔틴의 왕좌는 보석으로, 모굴의 왕좌는 공작의 깃털로 꾸몄으나 만왕의 왕 예수는 새끼 나귀를 타고 그의 수도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일의 주인은 십자가 지심을 나타냅니다.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막 11:2에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으로 되어 그 순결성과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마태는 그 나귀가 아직 멍에를 메고 있지는 않으나 곧 무거운 짐을 메야 할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귀는 평화와 고난을 동시에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시,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멍에를 메야 할 나귀와 참으로 유사한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일의 주인을 예루살렘 주민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메시야는 교회에서 전투를 행하시며, 왕으로서 승리를 확보하십니다. 이 임금은 오랫동안 오는 중이었으나 이제 오셨습니다. 문 앞에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말씀이 곧 육신이 되어 지경 안에 거하십니다. 자기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크게 기뻐하며 즐거이 불러야 합니다. 기쁜 소식으로 여기며, 참된 것임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오심을 생각하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오시었습니다. 이에 기쁨이 너무 커서 감출 수 없으며, 너무 당연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처럼, 기쁨의 환호로 맞아야 합니다.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교회의 환호가 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배반하지 말고 십자가 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겸손 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평강의 왕을 나타냅니다. 겸손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를 지심을 나타냅니다. 우리 위해 나귀 타시고 입성하시고 삽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과 함께하며 고난 주간을 경건하게 보내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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