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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을 따르자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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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나는 사람이 있다면 하인스 워드일 겁니다. 그는 한국계 미국 프로 풋볼 선수입니다. 2006년 NFL 슈퍼볼 최우수선수상(MVP)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왔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환영하는 사람들로 굉장합니다. 오죽하면 너무 피곤하다며 남은 일정을 줄이려고 했겠습니까?

그것을 이용해서, 정치권은 혼혈차별금지법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동안 혼혈아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히려 인종차별까지 하다가 이제 관심을 가지겠다는 겁니다. 방송사에서도 서로 모셔서 뭐 어찌해보려고 난리입니다. 본인도 모르게 자서전까지 만들었다는 출판사도 있다고 합니다.
그가 머무는 호텔은 하룻밤에 6백 몇 십만 원 한답니다. 특별 조리 팀이 있어서 음식도 입맛에 맞도록 만든답니다. 하인스 워드만의 양복을 만든다고 미리 미국까지 갔다 왔다고 하기도 하고, 국내 항공사는 왕복 1등석 항공권을 주었답니다. 국내 어느 자동차 회사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쓰라고 최고급 승용차를 내어주었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당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의 모습들을 성경의 네 복음서는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러서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새끼를 끌어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나귀새끼를 끌고 왔고, 제자들은 자기 겉옷을 그 위에 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위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길에다 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요 12:13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앞에 가고, 뒤에 따라가기도 하면서 소리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상상해 보세요. 나귀 타신 예수님이 들어가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겉옷을 벗어 거리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깔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면서, ‘호산나!’ 하고 소리 지르며 환호하는 모습을. ‘호산나’ 그 말은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오셨다면 그런 환영을 받으셨을까?
물론 받으셨을 겁니다. 하인스 워드 같은 사람도 그렇게 환영받는데 하물며 예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다면 굉장할 겁니다. 아마, 이번 부활절에 예수님께서 진주에 오신다면 안 나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불치병을 고친 분이십니다. 나병환자도 고치신 분이십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신 분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이 날 구원하셨다고 믿으니…….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외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걸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사 11:1) 분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미 5:2)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베들레헴에서 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마 1:1)이라고 하신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라는 고백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소리 친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성문에 나가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예루살렘 성문에 몰려와 ‘호산나’ 하고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중한 겉옷까지 길에다 펴놓고 나귀가 그 위를 지나도록 하는 군중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저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 중에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세주로 믿고 나오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기적도 보았을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하고 달랐다고 하는 겁니다.
궁중들의 외침 “우리를 구원하소서.”는 인생의 궁극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사실 인생의 궁극적인 구원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인간의 고통과 죽음은 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은 그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인간은 고통을 당해야 하고 죽어야 하나?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 바로 그 죄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이후, 인간은 이 죄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시려고 속죄제를 일러주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어린 양을 대신해서 드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피를 받고 용서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양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부터 뭔가 받아내려고 그러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하든 인간의 죄를 해결해 주시려는 뜻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제물에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양 한 마리 드리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츰 그 속죄제는 소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제물을 역겨워하셨습니다. 속죄제는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어린 양 대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도 바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죄 사함.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사해져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신 겁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의 대부분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은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구원은 로마라고 하는 나라에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들이 외치는 ‘다윗의 자손이여’에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항상 주변나라의 침략으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을 부강 시켜 주변나라까지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는 로마라고 하는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사람들에 의해 빼앗기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윗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보니까 예수님은 뭔가 다른 겁니다.

소년 다윗은 물매 돌 하나로 골리앗을 쳐 죽이고,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이스라엘을 구해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입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보니까, 다윗 이상입니다. 돌 하나로 골리앗 죽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병자가 고침 받았습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졌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돌 하나로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여호와의 이름, 다시 말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정말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겁니다. 예수님은 뭔가 달라도 다릅니다.
그런 예수님은 그동안 자기를 죽이려는 당시 종교지도자나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에 못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들어오신 겁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로부터 유대를 해방이라고 백성들은 생각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다.” 그리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그들은 그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때 그 사람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렵다면서 다 물러갔습니다.(요 6:60 이하)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우리를 구원하소서.’ 부르짖었던 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호산나’ 하고 소리쳤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구원이었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자유롭게 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유대가 로마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환호 소리를 듣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오히려 더 괴롭고, 더 외로우셨을 겁니다.

뒤따라가는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군중들이야 그렇다 치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닌 제자들은 어떠하였을까요?
“우리가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던 제자들은 이제 마음이 들떠 있을 겁니다. 방금 전에도 나귀를 끌고 올 때, 나귀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나귀 주인이 그냥 보내 주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주인께서 쓰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귀새끼의 주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미리 사두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나귀새끼 주인이 그냥 가져가라고 한 겁니다.
작은 사건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의기양양해서 예수님을 나귀에 태우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하는 겁니다. 아마 예수님보다 제자들이 더 놀랬을 겁니다. 더 신났을 겁니다.
그러니, 그 신나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역시 슬프고 더욱 외로우셨을 겁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기 전에, 제자들은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이냐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섬기는 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물이 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그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은 곧 왕이 되실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3년 동안 모든 것 다 버려두고 따라다니며 고생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팔았고,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은 살겠다고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과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정작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생각하고는 영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호위와 군중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은 쓸쓸하고 외로우셨던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성에서 환호하던 이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로부터의 해방은 그 어느 것보다도 절실했을 테니까요.
또 도망 간 제자들도 탓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손해 보는 짓을 안 하는 게 인간의 기본적인 습성이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요?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요?
군중들은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칩니다. 우리는 “나는 구원 받았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군중들, 제자들과 더욱 달라야 할 것입니다.
이젠, “나를 구원하소서.”가 아니라, “주님, 당신 위해 살게 하소서.” 그리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을 살려주소서.”가 아니라, 나는 영생을 얻었으니, 아직도 죽어 있는 자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실 겁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의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은, 사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내가 매를 맞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맞기 위함이요, 결국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날 살리기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로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 받았다고 확신합니까? 그러면서도 여전히 “구원해 주세요.” 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생명 걸고 전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십니다.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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