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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모든 나사로는 다 나오라 (요 11: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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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앞이 캄캄해 지고, 성경적인 표현으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이 들면 깨는 것이 무서운, 그래서 잠들 때 깨지 않고 그냥 잠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지금 큰 성공을 하여 다른 소원이 없을 것만 같은 사람도 알아보면 모두가 다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수도 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작년 말에도 저는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생각될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정말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 어려운 일을 반복해서 당하면서 나름대로 고난을 이겨내는 비법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비법은 일종의 지혜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알게 된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 중에 하나는 ‘모든 고난은 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격고 있을 때, 문득 이 고난이 내가 난생 처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용은 달랐지만, 앞이 캄캄하고, 절망적이고, 암담한 것은 왠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다르고 내용도 달랐지만 그와 같은 식의 고난이 수도 없이 내게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수도 없이 많았던 고난들이 다 지나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늘의 이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은 그 전의 모든 고난이 다 끝이 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머리 속에 번쩍하며 떠 오른 기가 막힌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 그러므로 이 고난도 끝이 나겠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고난의 끝이 보이자, 고난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지만, 고난을 끝내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하나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여튼 이 고난도 결국은 끝이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8장을 읽었습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주야로 사십일을 쏟아 붓던 비가 그치고 홍수가 끝났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그 말씀의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 제목은 ‘홍수가 그치다’였습니다. 참 제목을 잘 뽑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셨던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바로 ‘홍수가 그치다’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고난은 끝이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수요일 창세기 8장을 강해하면서 그 ‘홍수가 그치다’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단순한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청년 하나는 눈이 빨개지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손을 꽉 잡으며 ‘목사님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 창세기 9장을 설교하였습니다. 창세기 9장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홍수로 사람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무지개를 세우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홍수는 다 끝이 난다.
그 홍수의 끝은 무지개다.

모든 홍수의 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되지만 ‘그 홍수의 끝이 무지개다.’라는 말씀은 더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모든 홍수를 믿음으로 잘 이겨내면 그 끝은 정말 무지개가 될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할 때 지난번에 눈이 빨개졌던 청년의 눈이 또 빨개졌습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참 힘들고 어려운 때를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말씀이 그렇게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통하여 약한 사람이 강해지고, 죽은 것과 같았던 사람이 새 힘을 얻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 중에 하나는 ‘부활’입니다. 죽은 것이 살아난다는 것처럼 강력한 메시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죽음을 살리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실패와 좌절을 성공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힌 우리의 세상과 인생과 미래를 밝은 빛으로 밝혀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오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입니다. 구원입니다.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죽음을 끝내시기 위함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와 같은 굳은 의지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고집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고집은 그 누구도 꺽을 수 없습니다. 전능자가 우리의 구원을 고집하고 계시다는 것 이상의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모든 홍수는 그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모든 홍수의 끝은 무지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다 부활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에 고난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끝은 부활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사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학교 다닐 때 야구를 참 좋아하였습니다. 보는 것 보다 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법 잘 하였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 리그의 투수가 되었을 때 그것은 참으로 큰 뉴스였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승리투수가 되곤 할 때마다 온 나라가 흥분했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박찬호 선수가 승리한 게임을 녹화해 주었습니다. 하루 시간을 잡아 느긋하게 그 테이프를 보게 되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승리투수가 된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게임을 잘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1회 때 컨디션이 좋지 못해 볼을 19개나 던졌습니다. 컨트롤이 잘 안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중개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3횐가에는 만루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었고, 5횐 땐가는 홈런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걱정이 지나쳐 절망에 가까운 멘트를 계속 내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전혀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박찬호 선수가 결국 이겼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이프 속의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9회말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모르고 있었지만 녹화 테이프를 보고 있던 저는 9회말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미 부활로 결정이 난 게임과 같습니다. 살다보면 만루핀치에 몰리게 되는 때도 있고, 때로는 홈런을 맞아 절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기기로 예정되어 있는 게임을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제가 그 때 그 녹화 테이프를 보면서 아나운서와 해설자와 같이 흥분하고 걱정하고 절망하였다면 그 누구도 저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고집스럽게 뜻을 세우시고 어떤 대가를 치르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빤히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러므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사는 동안 좀 어려운 일이 있다고, 만루 핀치에 좀 몰렸다고, 홈런을 좀 맞았다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인생을 포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해 주시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과 소망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셨을 때 사망은 더 이상 나사로를 무덤에 묶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하시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상태가 너무 절망적이었습니다. 죽을 뻔 한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벌써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상태였습니다. 완벽한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사로를 불러내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읽게 하시는 대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상태가 혹시 오늘 나사로와 같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라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만 부르시는 분이 아니시라, 나사로와 같은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나사로를 다 부르시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현재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계시는 분들은 아니 계십니까? 고난 중에 계시는 분들은 아니 계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여러분의 부활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끝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승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우리는 부활 장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58절의 말씀은 참으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 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 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세상에 사망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돈으로 안 됩니다. 지식으로 안 됩니다. 권력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는 됩니다. 우리에게 비록 은과 금을 없을 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나사로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도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무덤 앞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모든 실패와 좌절, 모든 슬픔과 아픔, 모든 절망에 사로 잡혀 죽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모든 나사로는 다 나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고집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고집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결정 된 것입니다. 구원이 결정된 삶 속에 잠시 나타나는 고난은 이길 수 있습니다. 그 고난도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지나쳐 악한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은 잠시랍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영원이시랍니다.

모든 나사로를 다 나아오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때문에 잠시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에 기죽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주의 일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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