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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막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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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는데도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꾸짖었다는 말씀입니다. 열 한 제자가 한 자리에 모여 음식 먹을 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유?

  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3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수차 말했습니다.
  마 17:23에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이런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말씀을 부정적으로 받았습니다.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라고 하신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고 계신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죽는다는 말만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심히 근심했습니다. 
  부활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선입 관념으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오히려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말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예수를 못박아 죽인 반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사흘 후에 살아나리라 한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 27:62-63 절에 보면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핍박자들 보다도 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은 다 배반하고 도망하였습니다.
 
  ② 상식 때문입니다.
  어떤 상식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없다는 상식입니다.
  상식이란 영어로 common sense 즉 일반 적으로 둘 이상이 공유하는 지식 또는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이해력 판단력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상식을 뛰어넘고 초월합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다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믿을 것이 얼마 못됩니다.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의 작용들, 미묘하게 작용하는 심리적 현상등을 상식으로 설명할수 없습니다.

  장례식의 맨 마직막 절차는 고인의 시신을 땅에 묻는 하관식입니다.
  이 때 설교는 대개 부활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언젠가 어느 성도의 하관식에서 부활에 관한 설교를 하고 했는데 몇몇 불신자들이 자기들끼리 수근 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습니다.
  “뭐! 죽은 시체가 살어 ... ?”
  뒤에 있는 소리는 제가 생략했습니다. 그들의 귀에 부활의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값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예화집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이란성 쌍둥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또 삶이 있다고 믿어."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여동생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캄캄한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거야. 어딘가 다른 곳 말이야. 마음껏 움직일 수 있고 환한 빛이 비치는 곳이 반드시 있을 거야."
  그렇지만 여동생은 쌍둥이 오빠를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동생이 재빠르게 말했습니다.
  "말해줄 게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나서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엄마라구? 무슨 뚱 딴지 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어떤 놈이 그런 생각을 자꾸 불어 넣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과연, 오빠와 동생 중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인간의 극히 작은 머리로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할 수 없다고 믿지 못하면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과 마지막 때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은 지적으로 아는 것과 이성(理性)에 의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단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을 요구할 뿐입니다. 

  ③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정확히 고백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을 통해서 드려진 고백입니다. (마16:17) 인간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고백했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죽어도 살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 몰랐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가 누구십니까?
  예수를 잘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면 그들은 의심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예수를 몰랐기에 정작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믿건 안 믿건 간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④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후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고 예수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러 무덤에 갔던 여인들조차도 무덤 문이 열려있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닌가 하고 근심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드렸 뿐 그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말씀하실 때 주의 깊게 귀담아 들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주님께서 고난과 부활 얘기를 하실 때 농담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이야기를 해도 농담으로 받아드리는 이들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구원, 인류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었듯이 주님의 재림이나 심판도 조만간 임할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부활의 능력과 의미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부활론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죽은 자의 절망을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내세를 믿으면서도 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을 가장 절망시키는 죽음에 대하여 확실한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보장이 되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초로 하여 세워졌습니다. 만일 예수의 부활과 함께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줄 뿐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믿음을 보장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심이기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과 구원의 확실한 보장인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역설적인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고전 15:16-19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즉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가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긴자가 아니요 모든 인간들과 같이 죄와 사망에 정복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죄를 이겼습니다. 사망 권세를 물리쳤습니다.
 
  둘째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믿는 우리 모두는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씀을 담담하게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을 보고 하는 말 같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쳤습니다.
  결혼도 하지않고 평생 핍박과 욕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보내다가 감옥에서 끌려나와 참수형을 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활 때문에 기뻐합니다.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님이 것이요 자신의 몸에서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는 고백을 수없이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비참한 삶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전 15:55-58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과 내세의 소망에 더욱 견고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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