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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루살렘에서 골고다로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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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어떻게 될까?>
미국의 인디애나 주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는 이런 비문이 있다고 합니다.
"나그네여, 제 무덤을 지나갈 때 멈춰 서십시오.
저 역시 무덤가를 지나갈 때 당신처럼 멈춰 섰답니다.
제가 이 무덤 안에 있듯이 당신 역시 묻히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하시고 제 뒤를 따라오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비문을 읽은 뒤 그 밑에다가 이런 낙서를 해놓았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어떤 길로 갔는지 알기 전까지
나는 당신을 따라 가기 어렵군요."

그렇습니다.
그 죽은 사람이 죽은 뒤에 도대체 어느 곳으로 갔는지 궁금합니다.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천국이나 지옥 같은 내세도 없이
그냥 한 줌 흙으로 돌아갔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내세나 영생이 있을까요?
천국이나 지옥이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는데 언제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까요?
죽음이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수시로 당면하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이기에 이런 질문들은 참 중요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건강하다고 확신했는데 진찰을 해보니
말기암이라는 판명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 6개월 혹은 1년 밖에는 살지 못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경우, 먼저 심리적인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낙심과 절망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무서운 코브라 독사가 어린 병아리를 노려보듯이
죽음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가족들과 친구들, 물론 다 소중하지만 궁극적인 위로와 소망은 되지 못합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앞에 우리는 결국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 주관하시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부활은 어떤 모양으로 일어날까?>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모태 신앙으로 자라난 분들은 지금까지 부활에 대한 설교를 수없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고전 15: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다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분들은 드뭅니다.

저는 2006년도 부활절을 맞아 아주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부활한다면 언제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현재 우리의 모습과 부활한 후의 우리의 모습에는 연속성이 있는가? 없는가?"
"부활한 후에도 우리의 인간관계는 지속될 것인가?"
"예컨대, 부활해서 천국에 들어간 후에도 결혼관계며 가족관계가 되풀이 될 것인가?"
"성경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참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면서도 상세한 설명을 해주는 말씀이 고전 15장입니다.
그래서 고전 15장을 흔히 '부활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저는 6주 동안에 걸쳐서 고전 15장의 말씀을 샅샅이 분석해서
여러분들이 부활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돕고자합니다.

죽음이 시시각각 소리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죽음을 맞을 기독교적 태도를 정립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전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특히 몸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흔히 기독교 윤리의 보고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여기에 대한 윤리 신학적인 해답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송사 문제, 결혼과 성의 문제,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문제, 성령의 은사와
방언과 예언에 대한 문제 등등에 대해서 기독교 윤리적 기준을 정해주려 했던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이런 문제들을 다 언급한 다음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부활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고전 15장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① 몸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
바울이 고전 15장을 통하여 부활의 문제를 거론하게 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세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 일반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이들은 아주 신령하면서도 지성적인 엘리트 교인들로서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가지가지 성령의 은사를 받은 바, 초(超)영적인(hyperspiritual)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몸의 부활'을 불경하고 황당한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ANASTASIS NEKRON'이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 '시체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일종의 영지주의자들로서 영혼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이원론자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리였습니다.
추하고 악한 물질 세계인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들은 특히 그 당시 유행하던 철학과 신학을 두루 섭렵해서 상당히 지성적인 교인들이었는데
미래에 있게 될 몸의 부활이라는 것을 하나의 미신이나 신화 정도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기독교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긍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에 몸의 부활이 분명히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간주해서 도피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우리의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변형하는 데 소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 몸의 부활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
자, 이와 같은 고전 15장의 대전제가 되는 말씀이 본문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장차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우리 몸의 부활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열거함으로서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사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자처하는 분들은 부활이
그저 지어낸 이야기나 신화 정도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다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부활 자체를 부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온갖 의혹과 불신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는 기절설에서부터,
제자들이 시신을 몰래 훔쳐가 부활 소문을 유포했다는
도굴설에 이르기까지 별의 별 가설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성경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며
수많은 증인들의 목격으로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3-4절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따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성경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숫자가 한 두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5-7절 말씀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크게 다섯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첫째로, 게바, 즉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둘째로, 열두 제자들, 즉 사도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셋째로, 한꺼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 앞에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주님의 젖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섯째로,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쭉 열거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부활은 아주 가까운 근접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서
여기에 대해서 증거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아주 중대한 발언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에 도저히 자격 없는 자기에게까지도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8-9절 말씀을 보세요.
부활하신 주님이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는데 맨 마지막으로
달이 차지 못하여 난 팔삭둥이 같은 자기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동안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사도요 도저히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자기 같은 괴인 중에 괴수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명단을 작성할 때
자기와 같이 자격 없는 죄인에게도 주님이 나타나셨으니 이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실성은물론이고 그 숫자도 상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장차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을만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 중 상당수가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쓸 때까지도 아직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어떤 유언비어로 구성된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부활에 대한 역사성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다 겁쟁이요 배신자들이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제 목숨 하나 구하고자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겁쟁이요 배신자가 아니라 순교를 각오한 전도자들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유언비어나 허구에 자기 목숨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체험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쳐 부활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교회의 공공의 적 제 1호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받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는 부활에 대한 역사적 체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이야기>
오늘 부활절을 맞아 예수님의 부활이 장차 우리 몸의 부활을 위한
첫 열매요 역사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아주 낙심한 분들이 계십니까?
죽음도 극복하신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용기와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부활과 영생의 기초를 마련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김이성이라는 분은 한 때 알코올 중독자로서 아무도 못 말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아내가 남편과 어린 아들 둘을 남겨두고 가출했습니다.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여섯 살, 여덟 살 난 두 아들을 데리고
쓰레기 리어카를 끌며 일터에 나가 청소를 해야만 했습니다.

김이성 씨는 점점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하루도 술 없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육신은 점점 망가져 하혈에, 피부병에 간염에
알코올 중독증에 아예 술로 살아가다시피 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만큼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형님이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병실에서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한 한 집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남편이 쓰러져 누웠는데도 항상 웃는 얼굴로 입가에 찬송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김이성 씨를 대신해서 형님의 대소변까지 다 받아주고 보살펴주는 것입니다.

김씨는 그 집사님의 정성과 사랑에 감동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집사님의 사랑이 고마워서 체면치레하기 위하여 한번 나가주자 하는 마음으로 나갔는데
첫 주부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다 자기 들으라는 말씀으로 들렸고,
찬송까지 자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술을 끊게 된 것입니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안 올 정도였는데 술만 먹으려고 하면
"철썩! 철썩!" 하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는 소리가 귀에 쟁쟁해서 술잔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로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던 술을 끊게 되었던 것이지요.

김이성 씨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나서 『칭찬합시다』라는
TV 프로에도 나가게 되었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오찬을 나누는 자리에도 나갔습니다.
김 대통령이 1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 "김이성 씨는 어떤 일로 칭찬을 받게 되었나요?"하는 질문을 던지자 얼떨결에 신앙간증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 알코올 중독자로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구제불능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 앞에서 복음을 외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를 수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변화 중에 가장 놀라운 변화, 기적 중에 가장 위대한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외적 모습만 변하는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그 근본 성품과 속성이 변하는 화학적 변화,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은 원천적인 변화를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슬픔으로 가득찬 분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가득찬 분들은 평강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찬 분들은 용기와 희망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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