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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누가 돌을 굴려 주리요 (막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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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종교가 있는 것을 봅니다. 원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현대인이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종교들을 살펴보면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종교의 가르침은 인간은 선한 행위를 좇아 용서와 의를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선행과 의를 행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결코 인간의 선행이나 도덕으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을 아느니 율법을 시행하라!" 그러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율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그런 것이라면 제가 다 지켰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 청년을 가만히 보시더니 "그래도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집에 가서 너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너는 빈손으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면 하늘에서 네 상이 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너무 실망한 눈치입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은 굉장히 부자거든요. 도저히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고 빈손 들고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심히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마19:22).

이 청년은 주님께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겠나이까?" 그러면서 '행위'를 물었기에 주님은 끝까지 행위를 요구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주님이 이 청년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착한 행위로 용서와 의와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끝이 없습니다.

또한 고행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에 가면 힌두교에서 많은 성자들이 어마어마한 고행을 행하고 있습니다. 산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는가 하면 수없이 많은 절을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가면서 절을 하는데... 엄청난 고행입니다.
그리스의 신화에 보면 시지프스 신화가 있죠.... 한 사람이 제우스 신의 진노를 받아서 형벌을 받았는데 그가 어떤 방법으로 죄를 갚느냐 하면... 큰 바위를 높은 산 위에 굴려 올라가서 그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간신히 바위를 올려놓으면 그 바위가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또 열심히 땀을 흘려서 그 바위를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바위는 또 굴러 떨어집니다.
계속해서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굴러 내려오고... 또 굴려 올리고 또 굴러 내려옵니다. 끝없는 고행의 연속입니다.
여러분 고행으로써 죄사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 시지프스의 신화와 같습니다. 끝없는 고통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8∼9절 말씀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랬습니다.
구원은 인간 편에서 도덕적인 완전에 이르거나 선행을 하므로써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수단 방법으로는 안됩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구원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의 값을 대신 갚아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롬3:23, 6:23).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우리 인간의 죄를 다 갚아 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 주님이 살아 생전에 말씀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이 과연 우리를 구원해 주실 대속의 주님인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시므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불분명한 것이 확실해 지고 의심은 사라졌으며 불안하고 염려했던 마음들이 강하고 담대해 졌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사실을 보고 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 다가와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장사지낸 바 된지 사흘이 되던 새벽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의 몸에 향품이라도 발라드릴 마음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한가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3절 말씀에 보니까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그랬습니다.
이러한 걱정을 하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큰 돌 무덤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이 여인들이 무덤 안을 들어가 보니 예수님은 없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이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전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얼른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사도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주께서 확실히 인간의 죄를 영원히 갚으셨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고전15:16∼19). 우리 모두 본문에 나타난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그랬는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4절에 보면 이 돌은 심히 큰돌이라고 했습니다. 심히 큰돌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날 인생은 저마다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돌을 굴려 주리요! 그러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 돌은 '벽'이요, 하이데거는 '절망'이라고 했고, 키에르케고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돌을 굴려주리요!" "누가 내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을 굴려 줄 것인가?"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고민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는 고난의 돌입니다.
모든 인간은 고난의 돌에 가로막혀 절망과 한숨의 생을 살고 있습니다.
왜 고난을 당했습니까?... 왜 절망과 한숨의 생을 살아야만 합니까?... 물론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죄의 값으로 인하여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주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하게 하시려고... 주님을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잘 몰랐었는데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욥기서 42:5절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랬습니다(욥23:10).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든든히 세워주시고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려고 고난의 돌을 주실 때... 우리는 더욱 은혜를 사모하고 주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야고보서 5:13절 말씀에서 그랬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의 고난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은 너무 잘 아십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우리 주님은 다 경험해 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도 다 아십니다.
히브리서 2:18절 말씀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돌이 우리 앞에 놓여서 여러 가지 고통 중에 낙심에 처했습니까?... 우리의 고난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고난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편 119:71절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가 이 고난의 돌을 굴러주리요!" 그러면서 저마다 아우성이요 절규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할렐루야!

고난 당한 성도가 있습니까? 실패를 만난 성도가 있습니까?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마침내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죄악의 돌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죄가 없고 악이 없으며 완전한 세상이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인간에게는 고통이 시작되고 죄가 관영하게 되었습니다.
저마다 생각하는 것이 죄요, 불의요 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다고 그랬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그랬습니다(롬3:23, 3:10).
또한 그 죄값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히9:27, 계21:8).
누가 이 죄악의 돌을 굴려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본문 4절 말씀에 "그 돌이 심히 크더라" 그랬는데... 참으로 죄악의 돌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엄청나게 큰돌입니다.
사람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 빛깔은 주홍같이 붉고, 먹장같이 검습니다. 이 죄악의 돌은 율법으로도 어쩔 수 없고, 입산 수도하여 닦은 수양으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죄인인데도 누구하나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러면서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행2:37).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이 죄악의 돌을 굴려 주리요!" 그러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웬 말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오늘 본문 4절 말씀에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랬습니다. 돌이 굴려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굴려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는 큰 죄악의 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1:28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가야만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절 말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입니다. 주님만이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랬습니다.

셋째는 사망의 돌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하여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셨습니다(창3:19).
죄로 인하여 한 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한 바가 되었습니다(히9:27). 그래서 역사상 위대한 영웅들이 죽었고, 호걸이 죽었습니다. 왕들이 죽었으며 의인들도 죽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한번 태어나면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젊은 사람도 죽을 것이요, 나이 많은 분들도 죽을 것이요, 저도 여러분도 다 죽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죄 문제를 깊이 묵상하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랬습니다(롬7:24).
그러나 바울은 25절에서 인간의 죄 문제,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와 찬송을 돌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5: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랬습니다. 사망은 죄로 인하여 왔고 율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실로 인하여... 인간의 죄값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7∼58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그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가 돌을 굴려주리요!" 하고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랬습니다.
이사야 53:5∼6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모든 죄를 멀리 옮기셨습니다(시103:12). 우리의 죄과를 등뒤로 던져 버리셨으며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사38:17, 히8:1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다가, 이제 그분과 함께 부활의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갈2:20).
그러므로 부활의 산소망을 갖고 부활의 능력으로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빅성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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