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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무덤의 돌은 제거 되었습니다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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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주일입니다.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의 말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거짓말쟁이가 분명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입니다. 특히, 요한 계시록에는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이 모두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를 내놓을 것이며,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 놓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계20:13).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29절을 통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 있고, 없는 것을 믿는 것은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시고,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몸도 육신의 몸을 벗고 부활 된 영광의 몸으로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무디 선생이 젊었을 때에 장례식 설교를 부탁받았습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장례식 설교를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분은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에 관한 장례 설교를 찾아보았습니다. 과연 무디가 성경에서 장례식 설교를 찾았을까요? 그는 결코 성경에서 죽은 자를 위한 장례 설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12살 어린 나이로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시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슬픔으로 오열하며 관에 매달려 나인성을 나오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고 있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는 부활의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위해 슬피 울며 통고하던 마르다를 향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생명이시며, 부활이심을 믿습니까?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교도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이제 막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솟아 나온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가 넘어지면서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어이쿠,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러 가면서도 죽음이 얼마나 싫으면 자기도 모르게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라고 했겠습니까?

  죽음은 죽으러 가는 사형수에게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잠시 천국에 머물다가 주님의 날에 영화로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의 첫 열매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죄와 사망을 주님은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죄와 사망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염려로 가득 찬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는 세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근심에 찬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근심은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그렇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누가 시체를 묻어둔 돌을 굴려 줄 것인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안치했던 그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세 여인의 눈은 두려움과 떨림과 근심과 걱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염려했던 그 무덤의 그 큰 돌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의 입구가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 돌이 문제가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의 인생을 막고 있는 큰 돌들이 주님의 부활의 통해 제거 되었던 것처럼 완전히 제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 여인은 무덤에 점점 가까이 가다 올수록 더욱 쓸데없는 염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 무덤의 그 큰 돌은 제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염려가 더 커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문제는 그 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근심에 빠지고, 쓸데없는 걱정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마음에 염려하지도 말라”고 얼마나 자주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낙심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넘어지는 모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무덤에 가두어 둘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어떤 큰 인생의 문제라도 굴려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망과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있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근심의 돌이 물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좌절과 낙심의 돌이 물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낙심과 슬픔과 인생을 막고 있는 모든 질병의 큰 돌들이 굴러가고 제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5:7절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염려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께 여러분들의 문제를 맡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도 어둠의 권세와 절망의 권세와 모두 좌절의 권세에서 부활해야 합니다. 좌절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질병의 동굴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망과 죽음의 동굴에서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하시고,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 앞에 어떤 문제도 해결하시는 분이시며, 장벽을 제거하시는 분이시며, 어떤 놋 성벽도 무너뜨리는 분입니다.  이 세 여인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주님의 무덤에 가까이 왔으나 오히려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놀라운 역사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근심의 돌이 제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불신앙의 큰 걸림돌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녀들은 무덤 입구의 돌이 제거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예수님이 살아 계신 것에 대해 믿음으로 환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그녀들은 몹시 놀랐고, 몹시 떨었으며, 무덤에서 나와서는 모두 무서워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 같은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20:9절에는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무덤 안에서 천사도 보았고, 천사의 증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덤에서 나타난 천사의 증언조차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신앙은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서는 어둠의 영의 역사로 인해 크고 작은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못함으로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암 병과 같은 불치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는가?하는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어둠의 영이 주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믿음에서 벗어날 때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두려움에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간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이 이글거릴지라도 그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자신보다 월등한 무기와 완벽한 무장을 가추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역사하시는 그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물맷돌 다섯 개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는 막대기에 불과한 지팡이에 의지하여 시대의 절대 군주였던 바로 앞에 섰고,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 앞에 있는 인생의 문제와 장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영원한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앞에 있는 불신앙이라는 큰 돌덩이가 제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더 이상 저 썩고 냄새나고 어둡고 더러운 무덤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와 오늘 이 시간에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 전체의 주인으로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세 여인처럼 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신한다면 더욱 담대히 부활을 증거하고, 저 마귀의 세력에 붙들린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세 여인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입은 있으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하는 벙어리 신앙이 되었습니다. 무덤은 열려 있었으나 이들의 입은 닫힌 입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무덤의 큰 돌은 제거되었고,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입이 열려야 합니다. 불신앙의 큰 돌을 제거해야 합니다.

벤 부렌이란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은 바로 예수의 부활을 믿을 때부터입니다. 예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부활은 영원한 소망이며, 확실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독일 고전 문학의 대표자인 괴테는 질풍노도와 같은 청년의 시절을 지내고, 중년에는 유럽의 여러 자유사상들의 영향으로 자유분방한 정신의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정신보다는 그리스 신화나 자연의 조화에 나타나는 범신론에 몰입하였던 사람으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정신의 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인생의 모든 경험을 통해 성숙한 정신을 지닌 노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부활을 사실로 믿기 전에는 나의 모든 것은 오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이 모두 오류인 삶임을 부활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정신의 방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괴테처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오류를 수정하고, 생명의 길로 참된 길로 돌아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인생의 계획 없는 사람들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떠났던 제자들도 변화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던 예수님의 육적인 동생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헤롯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라고 했던 도마라는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창에 찔려 그 몸을 관통하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던 핍박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로마에서 목이 잘려 순교할 때까지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충성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떠났던 사람들이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 있는 동안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리고 주님의 제자를 핍박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새롭게 변화되고 자신의 생명을 다해 순교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고,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있는 의심의 돌들이 성령의 권능과 능력으로 제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을 막고 있는 의심의 돌들이 제거되고,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진실로 저 하늘의 해와 같이 달과 같이 혹은 별과 같이 아름다운 부활의 영광의 모습으로 주님의 날에 모두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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