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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새 생명 가운데서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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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첫 주간에 한식이 들어 있어서 성도들 가운데 성묘를 다녀온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무덤에 가면  묘비들이 있습니다.
묘비에는 먼저 거기 묻힌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분이 몇 년, 몇 월, 며칠에 출생해서, 몇 년, 몇 월, 며칠에 별세했다는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밖에 자녀들의 이름을 더 새기기도 하고 그 분이 생전에 한 일을 새기기도 합니다.

어떤 인물의 전기를 적을 때도 그의 이름 다음에는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를 넣습니다.

주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기원 1년 12월 25일 출생,  여기까지는 같습니다.
나중에 잘 조사해보니까 예수님은 기원 1년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기원전 4년에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만 예수님이 너무 중요한 분이기 때문에 연호를 제정할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원 1년으로 하려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 사망 연월일을 적거나 기념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떻게 합니까?
이와 같이 부활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이나 조상이 세상을 떠난 날 추모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추모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올해는 유명한 음악가 아무개의 100주기가 되는 해이어서 특별연주회를 합니다.’ 하는 포스터도 봅니다.
‘예수님 별세 몇 주기 특별행사’ 이런 것을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무덤도 다릅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무덤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만 이렇습니다. 다른 그 누구도 이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한 사람은 주님 말고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주님의 생애에서 ‘제2의 생일’입니다.
여러분, 기쁜 얼굴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벽 촛불예배 설교에서 요한이 부활의 새벽 아침에 무덤까지는 왔으나 무덤에는 들어가지 않은 일을 말하면서 그것은 야구선수가 삼루까지 진출하고서 머뭇거리다가 홈인하지 못하고 아웃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야구 경기의 만루 홈런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만루 홈런이 터지면 주자들이 모두 홈에 들어옵니다.
러닝이 좋지 않아서, 달리는 것이 좀 느려서 평소에 아웃을 잘 당하던 선수도 여유 있게 들어옵니다.
부활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가 패하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은 일이 많아 의문도 생기고 갈등도 있었는데 부활은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부활은 의의 큰 승리, 영원한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래도 죽음의 문제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문제도 해결합니다.

만루 홈런이 터지면 관중은 열광합니다.
지난 번 WBC 야구대회에서 최희섭 선수인가요, 만루 홈런도 아닌데 얼마나 열광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오늘,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열광이 있어야합니다.

로마서는 신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경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성경이 반지라면 로마서는 그 반지에 물린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한 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로마서 6장은 그렇게 중요한 로마서 안의 부활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전체에서 부활장은 고린도전서 15장인데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의 앞부분에서 다시 한 번 부활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례와 연결해서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로마서 6장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세례 받은 분들도 로마서 6장을 읽으시면서 자기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례문답을 할 때는 세례 받는 사람들과만 문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례 받은 성도들과도 문답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미 세례 받은 성도들과 하는 문답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례 받을 때 문답한 것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신하십니까?

세례 받는 것을 미루고 있는 분들은 세례의 의미를 알고 빨리 받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장은 부활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첫째, 부활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 금요일에 명지대 용인 캠퍼스 채플을 인도하러 갔더니 강당에 ‘예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이라는 플래카드를 걸어 놓았습니다.
사실은 거기에 하나를 더 적어 놓아야합니다.
“예수의 부활, 우리의 부활”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나의 부활”이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라면 나는 새 생명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새 생명을 얻어서(「공동번역」), 새 생명 안에서(「새번역」) 사는 것을 말합니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은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과 24절이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라

오늘 이후 부활을 믿으며 살아간다면  이것이 ‘새 생명 얻은 자로서 합당한 삶인가?’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옛 사람, 중생하지 못했을 때의 내가 하던 일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얻은 자니라(골 3: 8~10)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 자가 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부활과 연합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무엇과 연합하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좋지 못한 세력과 연합한 사람들은 좋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시편 50편 18절은 도둑과 연합한 자는 도둑끼리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절은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4장 17절에는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연합한 사람들은 이와 같이 버려두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좋은 것에 연합되어야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연합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인이던 인간이 그 분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과 영적으로 늘 교통해야 합니다.
줄기에 연결된 가지가 늘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성도는 사망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된 성도들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와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를 따라 다시는 죄가 들어와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6절과 7절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포도나무에 연결된 가지는 포도를 맺고 사과나무에 연결된 가지는 사과를 맺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된 성도들은 예수의 생명이 그의 몸에 나타나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과 11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부활과 연합된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이 말하는 둘째 사망이 없습니다.

부활과 연합한 성도들이 되어 죄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면서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며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10절은 주님이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는 것이라고 하고, 11절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긴다는 것은 늘 하나님 앞에서 있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한자로 신전의식(神前意識), 라틴말로 ‘코람데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여기 “하나님께 대하여”를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는 자로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말할 때 창조는 과거적 사건이며,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고, 또한 미래적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 과거적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를, 특히 인간을 지금 책임지고 보살피는 것, 현재적 창조입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하실 것, 미래적 창조입니다.

부활도 과거적 사건이며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고 또 미래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 오늘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과거적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현재적 부활입니다.
부활의 진리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미래적인 부활입니다.

여러분 모두 한 분도 빠짐없이 현재적 부활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발휘되어  새 생명 입은 자로서, 부활과 연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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