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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내 대신 죽으셨습니다 (막 1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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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오늘은 교회력에 의하여 관주간의 첫날을 '종려주일'로 지킵니다.??'종려주일'에는 주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주일로, 부활절 전 주일이며, 수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게서 부활하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라고 환호하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요 12:13, 계 7:9).

그리고, 종려주일(Palm Sunday)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 종려나무 잎사귀를 사용한 데서 유래되었습니다(요 12 :13). 오늘날 어떤 교회에서는 종려주일이 가까워 오면 종려나무를 승리의 상징으로, 또는 정복의 상징으로 이용합니다. 한편 종려주일의 합당한 명상을 이스라엘 민족의 '초막절 의식규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4세기 이날 경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는 특별한 의식을 해왔습니다.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악마를 대적하는 상징물'로써 축복의 나무가 되고 있으며, 중세에 와서는 이 행진이 한 교회에까지 가는 풍습이 되었는데, 종려나무를 축복하고 분배해 주면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이 행진 때는 종종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복음서나 십자가, 또는 나무로 만든 나귀 위에 그리스도가 올라앉은 모습을 만들어 행진에 앞세웠습니다. 중세 초엽에는 종려나무가 예배에까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도 중세에는 마태복음 21 : 1-9절을 읽은 후에 목사와 신도들이 십자가를 맨 앞에 세우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수난주간'으로 알려진 십자가의 주간은 종려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에 끝났는데, 이 기간이 구세주되시는 예수님게서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린 고난기간이었습니다. 따라서 너무나 슬프고, 고통과 괴로운 한 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 에워싸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으나, 예수님은 그 날의 "호산나" 소리가 머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고난 주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받는 일에 주동자로 쓰임받은 사람은 '가롯 유다' 였습니다. 가롯유다(Judas Iscariot)는 가롯 시몬의 아들이며(요6: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롯"이라는 이름에는 가롯이라는 말이 "가짜, 거짓말장이, 위선자"를 뜻하는 "세케르"라는 아람어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밀고해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가롯 유다가 실제로는 예수의 요구에 따라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배신’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유다복음>이 공개돼, 기독교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내셔널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는 6일 워싱턴 본사에서 <유다복음> 내용 일부를 공개했습니다. 서기 220~340년 사이에 만들어진 <유다복음>은 1970년대 이집트 사막에서 발굴됐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로 '파피루스에 적힌 26쪽짜리 책'을 놓고 2년 남짓 번역 작업을 벌여, 오는 9일 영어·프랑스어·독일어로 출간했습니다.

영문 번역· 주석서 제목이 ‘예수와 유다의 계시에 관한 비밀스런 대화’로 붙여진 이 문서는, 로마군에게 붙잡히기 약 일주일 전 예수가 유다에게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너는 인간의 형상을 한 나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문서는 또 예수님께서유다를 따로 불러 “왕국의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는 등, 유다를 다른 사도들보다 더 ‘선택받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복음> 주석서를 쓴 성서학자 '로돌페 카서'는 “예수는 자신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적보다는 친구를 고른 것.”이라고 설명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학술패널에 참여하고 있는 '크레이그 에번스' 교수는 “예수와 유다는 (밀고 문제를 놓고) 사적인 대화를 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예수의 공개발언을 기록한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에는 실리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 복음서들은 유다가 은전 30냥을 받는 대가로, 또는 사탄의 유혹 즉, "마귀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를 팔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즈베리신학교의 '벤 위더링턴 3세'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다복음에 나오는 것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와 유다로 볼 수 없다.”며 “그 문서는 과거 존재했던 많은 이단자 집단에 대해 말해 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유다복음>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유다복음>에 대한 언급은, 기원 후 180년께 현 프랑스 리옹지방의 주교 '이레아누스'가 “기독교 주류와 어긋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분명히 주장했습니다.

이번에 파문을 일으킨 <유다복음>이라는 <이단 문서>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연구진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보면, 이번에 공개되는 <유다복음>은 13개의 파피루스 종이로 이뤄진 이 문서로 1세기에 쓰여진 그리스어 원본의 필사본으로 추정됩니다. 이 문서에서는 유다가 기도 중인 예수를 돈을 받고 넘기는 대목까지만 나오고, 예수님게서서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부활하는 내용은 담고 있지 않고, 저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유다를 ‘복권’시킨 이 문서를 고대 기독교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파(그노시스파)'의 성서로 보고 있습니다. 내용이 영지주의파의 주장을 담은데다, 발굴 당시 함께 나온 자료들이 영지주의파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파 계통은 '가인(카인)'이나 '유다' 등 보편적으로 악인으로 인식되는 인물들을 ‘예언의 실현 도구’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복음>은 단순히 이단 '영지주의 자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문서는 역사적 고서임에는 틀림없으나 내용은 기독교 초기의 이단인 '영지주의'에서 나온 내용이므로 성경과 정면적으로 배치되는 내용이며, 결코 가롯유다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단의 내용은 교회사에서 아무리 오랜 세월이 오래된 고서의 진본의 문서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발굴된 당시에 기록된 진본이라고 할찌라도' 그 내용이 거짓되거나 진리라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목박혀 죽으신 고난 주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을 만든 장본인들은 가롯유다를 위시하여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쉽게 들어나지 않는 한사람, 우리가 지나치기(간과하기) 쉬운 한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바라바(Barabbas)'입니다. 오늘은 이 사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에 관해서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일을 낱낱이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의 책으로도 다모자르다."고 말한 요한의 증언으로 보아서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나 사건들은 엄선하고 엄선하고 또 엄선해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건이나 인물들이 계속해서 각 복음서마다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안에 중대한 교훈이 담겨져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라바(Barabbas) 라는 인물이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으로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있음을 보고 연구해 본 결과 이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은 너무나 귀중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먼저 사복음서에서 이 사람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 지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27:16절 - "그 때에 바라바라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마가복음 15:7절 -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누가복음 눅23:19절 -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자더라."
요한복음 18:40절 - "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고 말씀합니다.

이상과 같은 사복음서의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바라바(Barabbas)'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시위를 주동하고, 살인한 강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 바라바(Barabbas)는 급진 세력인 엣세네파의 행동대원이나 당 간부쯤 되는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엣세네파는 독립운동을 하는 세력으로서 그 방법이 매우 과격했습니다. 시위를 주동하고, 요인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는 반 로마 정치적 단체였습니다. 바라바는 이 당의 일원으로 정치적 죄목으로 체포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당시 유대에서는 두번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빌라도가 부임하자마자 황제에 대한 충성도를 보이기 위하여 황제 숭배 정책을 폈는데 전통적인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이러한 정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대규모 시위라는 방법으로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다른 억압에 대해서는 그들이 상황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도전받는 우상숭배를 강요받았을 때는 목숨걸고 항거하는 저들의 민족성을 모른데서 나온 정책이었습니다.

두번째 폭동은 지중해 해안도시 가이샤라에 소위 수문 건축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건축비용이 많이 들게 되고 그것을 유대인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려다 보니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고, 이것을 도화선으로 두번째 시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빌라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정적들에 의해 계속해서 로마 중앙정부에 보고됩니다. 만일 한번 더 이러한 일이 있을 경우 그는 소환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재판 때 양심의 증거와 아내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민란이 두려워 손을 씻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라바(Barabbas)는 여기서 첫번째 아니면 두번째 대규모 소요가 있었을 때 주동자로 체포된 이 사람이 바로 '바라바(Barabbas)'입니다.

이 사람의 생사를 놓고 당시 상황에서 세 개의 중요한 선택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에서 살아난 바라바(Barabbas)에게는 3가지 종류의 선택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이 있었습니다.

1. 바라바(Barabbas)에 대한 빌라도(Pilate)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특사제도 처럼 당시 유대나라에도 특사제도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 명절을 맞아 당시 총독 빌라도(Pilate)는 죄수 한사람을 석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전에 예수님이 몇몇 주동자들에 의하여 고소된 상태였습니다. 빌라도(Pilate)는 이 고소가 부당했고 음모에 의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잡혀온 예수님이 무죄자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군중들의 압력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라바와 예수와의 선택에서 바라바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의 압력은 이렇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를 놓아주면 당신의 황제 가이사보다 예수가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일 이 소식이 당신의 황제 가이사에게 들어가기라도 하면 당신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Pilate)는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군중들의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기 영합을 위해서 바라바(Barabbas)를 놓아 주고 예수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의에 따른 선택보다 군중들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선택을 했습니다. 양심의 선택보다 자기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습니다. 진리를 선택하기 보다 다수가 원함을 선택했습니다. 양심의 소리보다 유행을 따른 선택을 했습니다. 이러한 그는 당연히 비난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를 감히 비난할 수 없음은 바로 오늘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선택이 바로 빌라도와 같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신앙의 비겁자가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믿었다고 한지, 교회 출석했다고 한지 수년 혹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적인 어린 아이임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기보다 인기를 영합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앙 양심보다 밥줄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보다 자기 안에 있는사욕과 명에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 보다 편해지고, 싶어하는 안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확신과 고백을 따르기 보다는 시대의 유행과 다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 때문에 올바른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한 그릇된 선택을 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빌라도(Pilate)가 선택한 그 길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빌라도(Pilate)의 선택을 빌라도 한 사람의 선택일 뿐만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어리석은 많은 사람의 선택을 대표하는 선택이었습니다.

'다수가 반드시 진리가 아님'을 우리는 빌라도에게서 배웁시다. 유행을 따르다가는 우리 마음속의 확신이 변질된다는 사실을 배웁시다. 인기가 반드시 정의가 아님을 배웁시다.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웁시다. 전세계 수십억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빌라도(Pilate)의 이름이 얼마나 저주스럽게 등장합니까? 바라바(Barabbas)에 대한 빌라도(Pilate)의 선택은 이러한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빌라도의 선택에서 '잘못된 선택에서 과감한 돌이킴이 없다면 영원한 실패자가 되고만다.'는 역사적교훈을 기억하십시다.

2. 바라바(Barabbas)에 대한 군중들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의 예수님에 대한 종려주일과 금요일의 차이를 아십니까?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들, 그러나 불과 댓새 후에 저들은 그렇게 환영했던 예수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이 짧은 5일 동안 저토록 변한 군중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실 저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예수라는 분이 나타나서 기사이적을 행하고 지도자들의 죄를 가차없이 책망하는 것을 보니 저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간접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메시야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메시야를 보내셨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억눌려 지내왔고, 약탈당해 왔고, 억울하게 지내왔던 역사속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민 구석구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런 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으니 사람들은 모두 "틀림없구나."하면서 좋아하고 환영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이 잘나 타난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저들의 함성속에는 과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로마를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드디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구나" 하면서 좋아하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을 민족의 영웅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일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니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후 군중들은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어쩐지 로마병정앞에서 무력하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빌라도(Pilate)의 법정에까지 끌려오게 되었고 한마디도 못한채 오히려 매맞고, 침밷음을 당하고, 홍포를 입고, 조롱당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러한 맥빠진 예수는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예수였습니다.

용감한 사자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발톱이 다빠지고 이빨도 다빠진 종이 사자였더란 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를 바라보는 군중들은 너무나도 실망했고 그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살인자로 체포된 바라바(Barabbas)를 보니 패배한 메시야보다 훨신 낫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고 보니 자칭 메시야라하는 저 예수님보다 맘에 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빌라도(Pilate) 법정앞에서 무기력하게 서있는 저 예수보다는 바라바(Barabbas)가 그들의 기대와 생각에 훨신 더 걸맞는 모습으로 그들 앞에 다가옵니다. 예수님보다 바라바(Barabbas)를 놓아달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예수님보다 바라바(Barabbas)를 선택한 이유는 자기들이 원하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해 불과 닷새만에 그 마음을 바꾸게 한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천년후에 사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경고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관점에서 예수를 보지 않고 내가 설정한 동기, 내 방법, 내가 세운 목표대로 예수님를 바라본다면 우리도 닷새후에 저 군중들 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으소서"라고 소리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는 자들이 너무나 쉽게 신앙을 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신앙생활의 행위를 하지만 정작 저와 여러분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예수가 아니라 예수로 인한 영광과 축복뿐이었다면 우리와 여기 이 군중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부귀영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믿고 교회출석하는 이유가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질병에서만 고침받기 위해서라면, 사업성공만을 위해서라면, 승진하기 위해서라면, 습관이기에 안나가면 꺼림직하기 때문이라면 이런 사람은 여전히 군중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예수도 별거 아니더라.", "하나님도 어쩔 수 없더라." 하며 5일 후에는 예수를 배신하게 될테니 말입니다.

이와같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신앙은 이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이 생각하는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설정하시기 전에 마태 1:21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 이심이라."

하나님은 먼저 죄에서의 구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바라바에 대한 군중들의 선택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고 지금 어떤 예수를 믿을 것인가를 선택하십시오.

3. 바라바(Barabbas)에 대한 예수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Barabbas)가 십자가 처형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는 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라바(Barabbas)가 석방되어지기 까지 자신이 한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빌라도와 군중들의 정치게임에 의하여 석방되어진 것 뿐인것 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죽이면 죽는 것이고 살리면 사는 것뿐이지 바라바(Barabbas) 편에서는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Barabbas)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던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억울하게 잡혀오긴 하셨지만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다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12절) 만일 예수님이 고소자들의 고발을 번복할 만한 증언만 하면 예수님을 석방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Pilate)는 예수님께 그러한 변명을 요구합니다.(10절) 이때 예수님이 빌라도(Pilate)가 원하는 대답을 하셨더라면 그 즉시로 석방되었을 것이요 반대로 바라바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빌라도(Pilate)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빌라도(Pilate)의 살리고 죽이는 권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빌라도(Pilate)가 예수님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주님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Pilate)의 결정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빌라도(Pilate)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한 사건이요. 예수님 스스로의 결정이였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바라바(Barabbas)는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변론을 통해서 석방될 수 있었으며 혹 빌라도(Pilate)가 석방시키지 않아도 12영이 더되는 천사를 명하여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시고, 이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쓴잔을 기꺼이 마시기로 작정하시고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바라바(Barabbas)는 누구때문에 살아난 것입니까? 군중들의 지지때문입니까? 아니면 빌라도(Pilate)의 선택 때문입니까? 결정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난 것입니다. 군중들이나 빌라도(Pilate)가 바라바(Barabbas)를 살렸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이 길을 선택하셨기에 바라바(Barabbas)는 그렇게 되어진 것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에 흥분되지 않습니까? 가슴이 두근 거리지 않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바라바(Barabbas)는 후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멀리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그리고는 그 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나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그분을 죽인 겁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어떤 신학자는 바라바(Barabbas)를 가르켜 "그는 모든 인류를 상징하는 죄인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라바(Barabbas)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바(Barabbas)의 죽음의 자리에 대신 서신 것, 그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며 살아온 저와 여러분들의 자리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선포하신 그 생생한 음성을 말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많은 사람속에 바라바(Barabbas)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담 이후 온 인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바라바(Barabbas)를 대신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 하여,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전설에 의하여 전해 내려오는 저 바라바(Barabbas)의 울부짖음의 고백을 따라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어주신 주님! 저의 죄 때문에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는 바라바(Barabbas)처럼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해야합니다. "여보시오! 내형제야 왜 주님을 믿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때문에, 그리고 당신 죄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라바(Barabbas)가 십자가 처형에서 살아난 후 만난 사람에게 전한 복음이었고, 그리고 전도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이것이 이천년전 오늘, 십자가 사건의 이유요. 내용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저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하여... 오직 십자가의 피흘림이 있어야 죄의 값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 전서 2: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3: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5:3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하셨으며,

로마서 4: 25절에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습니다.' 바라바(Barabbas) 처럼 대신 죽어 영생을 선물을 주신 이 귀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이런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고, 내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는 자세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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