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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을 믿는 자의 삶 (마 28:1~15, 시 3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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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계속“할렐루야!”만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자 대제사장, 가증스러운 바리새인, 스승을 노예의 몸값으로 팔아넘긴 몹쓸 제자 가룟 유다, 포학한 로마병정, 죄 없음을 거듭 확인하고도 사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린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 등의 합작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 죽으심은 저와 여러분들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큰 돌로 입구를 막았습니다. 총독 빌라도의 직인으로 인봉을 했고, 그 앞에는 무장한 로마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 속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가로막았던 바위도, 무방한 군사도 아무 힘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수많은 날들 가운데 오늘보다 더 기쁘고 즐거우며 통쾌한 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운동경기 가운데 가장 통쾌한 때는 역전의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역전의 숭리입니다. 예수님을 죽여 무덤에 장사지내고 돌로 입구를 막고, 인봉하고, 그리고 무장한 병력을 동원하여 지키도록 했습니다. 악한 영 사탄과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은 승리를 자축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예수님은 실패자요, 그들은 승리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패로 단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탄과의 결투는 단변에 승리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승리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이분이 지금은 인류의 구세주로, 만왕의 왕으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 아침이 되면 즐거운 낯빛으로 안사를 나누었는데 안사하면서 하는 말은“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로 지키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이 곧 오늘날 우리들이 매주 마다 예배드려는 주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날을 일요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이 지금 이 지구상에 20억이 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남께로부터 복을 받은 선진국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신자나 불신자나 다 예수님께 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준으로 쉬기도 하고, 일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당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크신 분, 예수님처럼 의로우신 분, 예수님처럼 선하신 분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처럼 고마우신 분, 이처럼 큰 은혜를 주신 생명의 은인, 축복의 은인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위대한 임금 앞에서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모습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명장을 모신 충성된 부하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부모님을 받들어 섬기는 효성 지극한 자식의 모습처럼 주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경외함의 성경적 의미는 구약성경 시편 34편에 자세히 밝히셨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입술의 죄를 멀리합니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시편 34:11~13)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26에는“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김은국 씨의“순교자”라는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6.25동란 때 열두 명의 목사님이 공산당에게 끌려갔습니다. 이 중 열명은 죽임을 당하고 두 명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공산당이 물러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열명의 목사님들을 순교자라 하여 크게 기념하고 추앙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난 신 목사님과 또 한분 목사에 대해선 비난과 질시를 퍼부었습니다. 신 목사님은 그런 비난과 매도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히 교회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열 명의 목사를 죽인 공산당 간부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잡혀 진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열명의 목사를 죽인 것은, 죽음을 앞두고 목사답지 못한 비굴함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고문에 못 이겨 정신 이상이 생겨 살려주었고, 신 목사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인 것에 감동되어 살려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 목사님이야 말로 오랫동안 억울한 모욕과 비난을 받은 진정한 순교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신 목사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요? 그것은 죽은 사람들의 명예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많은 성도들을 실족케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억울한 모욕과 비난을 교회를 위해 감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 인간을 구원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우선적으로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듯, 주님의 교회를 위해 속상함도, 억울함도 참는 것입니다. 할말을 다하면 이미 그 사람의 경외함과는 멀리 떠난 지 오래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합니다.

시편 34:9,14에“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행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6:9에“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하셨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칭찬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도서 11:1에“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하셨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두 여성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제인 아담스는 시카고 빈민굴에 들어가 일할 때 "내가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사람인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빈밀굴 캘커타에 들어가 빈민들을 위해 일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보내 주셨습니다. 나는 순종한 것뿐입니다" 라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화평을 구합니다.

시편 34:9,14에“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고린도후서 5:18~19에“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9에는“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화평하는 것입니다.

장 포웰이란 프랑스의 시인이 말하기를 인생에서 날마다 생활이 향상되고 인격이 성숙해지려면 세 가지 여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조화의 능력이요, 둘째는 책임감이요, 셋째는 타인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고 믿음을 같이 할 때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 되는 길은 믿음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선을 행하되 자기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자기를 나타내려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7-18에 말씀하시기를“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하셨습니다. 화목하지 못한 것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라면 그 출처가 어디 이겠습니까?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의 목표는 매사에 파괴하는 것입니다. 화목된 하나님과의 사이, 화목 된 형제들과의 사이를 파괴하여 불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며, 시기하며, 끝내 원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란 곧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갈라디아 5:2-23에 말씀 하시기를“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랜시스>
성프란시스의 기도와 소망이 우리들의 소망과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고난을 믿음으로 이깁니다.

시편 34:19에“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권세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늘 평안하고 하는 일들마다 형통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잘 섬긴다하여 그것이 공로가 되어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 가운데에도“시험이 없게 하옵시고”가 아니라“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태복음 6:13)하셨습니다. 시험 즉 고난은 언제나,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면 안됩니다. 바다의 배는 바닷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을 떠난 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배에 구멍이 뚫려 바닷물이 배안으로 들어오면 안됩니다. 그 배는 침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세상의 고난이 이와 같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는 이치를 깨달은 영국의 어거스터스 몬테이그 톱레이디는 노래하기를“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찬송가 503장)라고 했습니다.

어느 분이 고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가난이 고생으로 여겨질 때는 소록도 형제들을 생각하고, 고독이 고생으로 여겨질 때는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한 헬렌켈러를 생각하고, 신체적 불균형이 고통으로 여겨지거든 독일의 음악가 귀먹은 베토벤, 프랑스의 사상가 폐병환자 파스칼, 영국의 시인 장님 존 밀턴, 이스라엘의 애꾸눈 장군 모세 다이안을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고생을 영광이요, 훈련이며 인생과정이요, 하나님의 계획으로 받지 아니한다면 그는 고생을 조금 더 해야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누구에게나 고난은 필요합니다.

첫째, 고난을 통해 삶의 뿌리가 튼튼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기 전 반드시 그 사람을 연단시키십니다. 훈련된 병사가 적군을 이기는 강군이 됩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신명기 32:10-12의 말씀에“여호와께서 그를......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인도하셨고”하셨습니다. 눈동자 같이 지키시되 독수리 같이 연단을 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독수리가 새의 왕자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어미 독수리로부터 극한 고난의 훈련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기둥으로 쓰이는 큰 나무가 되려면 나무의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멀리 깊게 뻗어 나간 뿌리가 그 나무를 지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높이정도 뿌리가 뻗어 나가야 그 나무가 쓰러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나무의 뿌리가 언제 뻗어나갈까요?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칠 때 나무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뿌리를 멀리 뻗는다고 합니다. 만일 나무에 사람과 같은 이성이 있다면 여름에 몰아치는 비바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그 비바람의 고통이 나무를 지탱시키는 튼튼한 뿌리가 되어 더 크게, 더 굵게 자라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당하는 괴로움과 고통의 연단이 장차 있을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튼튼한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욥이 그 큰 고통을 잘 견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둘째, 고난은 삶을 존귀하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말하기를“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고 했습니다. 금광에서 캐낸 광석은 반드시 용광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금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시 고난을 통해서만 인격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닮은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성경에 기록하기를“너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1:7)고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교만의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세상만사가 내 힘을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을 겸손하게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령을 사랑하셔서 축복하시며 귀하게 쓰시게 됩니다.

우리는 진주조개에서 이 원리를 다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다이아몬드가 있어서 그렇지만, 진주는 옛날 최고의 보배였습니다. 조개 속에 작은 모래알이 들어왔습니다. 그 부드럽고 연한 살 속에 모래가 들어왔으니 그 아픔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조개는 온힘을 다해 분비액으로 그 모래를 감싸고 또 싼다고 합니다. 이렇게 감싼 응고된 분비액의 결정체가 진주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 속에도 때로는 모래알 같이 괴롭히는 원치 않는 환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 아픈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실망하여 낙심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불평을 합니다. 자포자기를 합니다. 아무렇게나 생을 방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자세는 더 큰 불행을 자초합니다. 최선의 방법을 진주에게 배워야 하겠습니다. 내 삶에 고통이 올 때에 내 생명의 분비로 감싸야합니다. 믿음의 기도와 눈물로 감쌉니다. 감사함으로 감쌉니다. 순종으로 감쌉니다. 소망으로 감쌉니다. 그리하면 훗날 그 고통이 도리어 삶을 빛나게 하는 진주가 될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욥은 그 쓰라린 고통을 잘 이겼기에 성서중의 진주와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고난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야고보서 1:2-4의 말씀에“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하셨습니다. 시험이 사람을 온전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알 수 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여 지식의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사람의 인격도 고난을 통해 인격자로 다듬어집니다.

넷째, 고난은 사람의 정신을 일깨워 줍니다.
시편 119:67의 말씀에“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문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마귀 같은 것은 싹 없애 버리지 않고 왜 그걸 놔두어서 사람이 마귀에게 넘어갈 것을 아시면서 네가 거기 졌다, 이겼다 자꾸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시는가? 아닙니다. 이것도 필요합니다. 고난을 통해 해이해졌던 정신을 바로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고난 중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 나갑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은 성도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나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게 임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입술의 죄악을 멀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화평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믿음으로 이겨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를 사랑하셔서 크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편 34:7)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34:9~10)
“경외자가(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편 34:17) 라고 하셨습니다.

온 마음 온 정성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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