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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내가 마셔야할 잔 (요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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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땅위의 모든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예배드리는 고난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되새기며, 주님 앞에서 성도답게 살고자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제물이 되시고자 사람들의 손에 붙잡히시는 현장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곳은 평소에도 제자들과 함께 자주 모이던 장소였기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당할 일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시고“나사렛 예수를 찾노라”고 대답하자“내로라”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 말씀 한마디에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다시“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나사렛 예수”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고 있으니 제자들은 보내 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챙기시는 목자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향해 내리쳤습니다. 이로 인해 말고의 오른편 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시기를“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이 잔은“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잔”이었습니다. 이 한 잔에는 생명의 피가 담겨져 있는 비장한 각오의 잔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은 술이 아니라 바로 피의 잔이요, 생명의 잔인 것입니다.

2차 대전 말기 일본군이 마지막 발악한 가미가제 특공대를 아실 것입니다. 가미가제란“ 신풍(神風)” 즉 “신이 내려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신이 내려준 바람”즉 가미가제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나 일본을 침공하던 몽골 군선(軍船)이 하카다만(博多灣)에서 바람에 괴멸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부터 일본은 가미가제를 나라를 지켜주는 신의 바람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2차 대전 말기에 가미가제 특공대를 조직하고 전투기에 한 사람만 탑승하고 폭탄만을 탑재한 채 연합군 함대 굴뚝을 향해 돌진하여 군함을 파괴하는 임무를 띠고 출격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마지막 비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도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비행기에는 목적지까지만 갈수 있는 연료를 주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공대원이 출격하기 전에는 반드시 흰 천을 덮은 탁자에 비행사들이 받을 마지막 잔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천황이 내려준 그 잔을 받아 마시고 “천황 만세”를 외친 후 출격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실로 무서운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가미가제 특별 공격대원이 마시는 잔은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잔인한 잔”입니다. 인류 역사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잔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잔은 일본의 특공대원들이 출격하기에 앞서“나도 죽고 너도 죽이겠다.”는 잔인한 잔이 아니라“나는 죽고 인류는 살려야 하겠다.”라는 사랑의 잔, 희생의 잔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잔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이 잔은 피하고 싶으셨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감람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신 말씀을 마태복음 26:39에 기록하시기를“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셔야 할 잔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는 말씀이 누가복음 22:4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흐르는 땀이 핏방울처럼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땀에 피가 섞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애간장이 바짝바짝 타는 심정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눌리셨으면 흐르는 땀에 피가 섞여 핏방울 겉이 되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마에 흐르는 땀에 핏빛이 맺히도록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그렇게 기도하지도 못했고 또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있지만, 땀방울에 핏방울이 맺히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이 잔을 물리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이 잔 외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그런 고난의 잔일지라도 아버지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주님은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 잔을 저와 여러분을 위해 받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의 잔을 회피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조금만 싫어도 몸부림치며 아우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 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비켜 가려고만 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물리치고 싶으셨던 잔이지만“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 십자가 없는 영광을 기대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은 외면한 채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신 적은 없습니까?“No Cross, No Glory”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영광은 십자가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순종 뒤에 있고, 희생 뒤에 있고, 땀 흘림 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0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아캠피스의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하셨습니다.

2. 주님의 잔은 다 알고 받으신 잔입니다.

우리교회에 나오셨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신 대중가요 가수 이수미 집사님의 노랫말 가운데(정확하게는 기억이 되지 않지만)“내가 걸어온 길 다시가라면 난 못가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힘들고 어려웠던 지난 세월들, 미리 다 알고는 도저히 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고통이라도 얼떨결에 받는 고통이, 다 알고 받는 고통보다 고통의 정도가 훨씬 덜합니다. 그래서 매를 맞아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맞는 것을 보면서 비명소리를 듣고 차례를 기다리다 맞는다면 매를 맞기 전 미리 겪는 또 다른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주 흉악하고 파렴치한 죄를 저지르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사형만으로는 형이 모자란다 하여 10년 후에 사형을 집행하기로 하고 그동안 사형집행이 있을 때마다 형장으로 끌고 가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 장면을 똑똑히 바라보도록 하는 형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현장에 데려다가 죽어가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만한 거리에 앉혀 놓았다고 합니다. 목이 잘려나가는 사형집행 장소에 데려다 무릎을 꿇려 놓고 목이 잘려 나가는 사람이 뿜는 피를 뒤집어쓰게 합니다. 화형장에서는 맞바람 치는 곳에 앉혀 놓고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를 맡게 합니다. 이렇게 사형집행 장소에 데려다 놓고 죽음을 간접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정신쇠약으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10년을 다 못 채우고 죽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자신이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잠자리에 눕는다 한들 잠이 오겠습니까? 낮에 보았던 사람의 주검이 생각나고, 공포에 질려 떨리는 숨소리가 들려오면서 하루 종일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에“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 당할 일 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가야바와 빌라도에게로 끌려 다닐 것을 알고 계셨고,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용맹한 베드로가 아주 쉽게 무너져 자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군병들이 침 뱉고, 머리를 치며 조롱하고, 손바닥으로 때릴 것 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형이 확정될 것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기어이 지고 가야 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 없이 벌거벗겨질 수치도 알고 계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의 고통과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체중을 못 이겨 못 박힌 손과 발이 찢어질 고통까지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을 겪으셨으니 그 고통은 이중 삼중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미리 다 아시면서 십자가의 잔을 묵묵히 받으신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께서 받으신 잔의 의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알면서도 이해하고, 들었으면서도 침묵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참고, 억울하지만 그 일을 주님께 맡기는, 주님께서 받은 고난의 잔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평화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성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순교자는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할 때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구타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의 흔적을 보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의 피를 흘릴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들의 증오의 심장을 녹일 것입니다.

3. 주님이 받으신 잔은 피하지 않은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나사렛 예수가 누구냐?”하고 찾기도 전에 먼저“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나사렛 예수를 찾는다.”는 말에 또다시“누구를 찾느냐?”물으셨습니다. 피하고 싶은 잔이지만 일단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 후에는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병정들에게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하게 나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룟 유다의 배신, 대제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고발, 빌라도의 불법재판에 의해 죽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볼 때 주님의 죽으심은 스스로 택하신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의 말씀에“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6:51-54 말씀에는“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의“영”이란 단어는“Legion"으로 군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의 1개 군단은 보병 6,000명과 마병(馬兵) 7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열두 영이란, 열두 군단으로 보병 72,000명과 마병 8,400명으로 구성된 엄청난 수의 군사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을 체포하고자 찾아온 무리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을 얼마든지 제압할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붙잡혀 불법재판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복음 18:11) 하신 말씀처럼 십자가의 잔을 마시기 위함입니다. 이 길이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은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쓸 수 있는 하늘의 권세 즉 천군 천사를 동원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쓸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절제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9:4~7, 12에 기록하기를“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열두 영 더되는 하늘군대를 동원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십자가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깨달은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이 땅에 복음의 빛을 밝히고자 스스로 자유와 평안과 생명까지 포기한 순교자 선교사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뿌린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수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스스로의 자유와 평안을 포기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부흥된 한국교회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자 일제치하와 6.25때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쓸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고, 온갖 수치를 무릅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쓸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아 스스로의 자유와 평안을 포기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몸부림을 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우리교회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이러한 성도들로 인해 복음은 세계만방에 전파되어 무수한 생명을 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에게 은혜와 축복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십자가는 피하지 않고 자원하여 질 때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선 십자가라고 확신하셨으면 달게 자원하여 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 무덤이 깨어지는 승리와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요 철학가인 루터포드는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거우나 감미로운 것이다. 새에게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짐이 되나 그것 때문에 앞으로 나아간다. 성도는 십자가가 짐이 되지만 십자가가 성도로 하여금 천국을 향하여 전진케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주실 때에, 담대한 마음으로 달게 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 십자가는 고난을 딛고 위로 날아오르는 부활의 날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자원하여 지고 갈 때, 그 십자가는 태산보다 더 큰 고난의 파도라도 넉넉히 넘어갈 수 있는 돛대가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신앙생활을 잘하던 한 성도가 항상 심중에 “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해.” 하며 늘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갔는데 얼마를 힘겹게 가다보니 한 곳에 여러 개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어디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네가 진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여기 많은 십자가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저것 살펴보니 번쩍 번쩍 빛나는 조그만 십자가가 있어 그것을 골라졌습니다. 이 황금으로 된 십자가는 일어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다시 소리가 들리기를 “다시 골라 보라.” 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역시 조그만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활짝 피어있는 십자가였습니다. 아름다운 향기도 나고 해서 그것을 골라졌습니다. 이 십자가는 무겁지는 않는데 가시가 등을 어찌나 찌르는지 도저히 지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결국 저 뒤쪽에 적당한 것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때 앞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여보게.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자기가 지금껏 진 십자가였습니다. 자기의 십자가가 가장 가볍고 적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맞아 주님께서 마신 잔의 의미와“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 하시면서 내게 주신 십자가 즉 사명을 잘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적과 영광의 날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신 그리스도의 심정이 우리의 마음과 각오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들어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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