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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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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의 신분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의 신분을 알면 그 사람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신분이 있는데 삶은 그 신분과 하나도 일치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고, 행동 하는 것도 보면 저 사람은 어떤 신분이겠다 하였는데 알고 보니 절대 그렇게 행하면 안 되는 사람인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성도'는 많은데,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 '행복관', '인생관'을 통하여 그가 '성도'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게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나 하나님백성답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말로는 '아멘, 믿습니다'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서는 '저 사람이 과연 예수님부활을 믿기는 믿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부활의 증인'된 삶을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된 삶이란 자신의 일상에서 이 세상살이가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낼 줄 아는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 ! 예수님의 부활을 결코 피상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사도들에게 현재의 삶을 힘 있고 능동적이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부활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성도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길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창의와 믿음. 그리고 신앙마저도 다 헛것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과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자로서의 "능력" (실질적이 능력)을 누리고 살아가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 예배시간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신앙 고백하는 사람답게 이 고백과 이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몸이 다시 살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사람이 이토록 무책임하게 살 수 있는가.
'몸이 다시 살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사람이 부정과 부탕과 거짓과 위선과 부도덕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까 ?
우리는 과연 '크리스천'이라는 신분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와는 전혀 다른 남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사는 걸 봐서는 전혀 우리와 다를 바 없어서 그 신분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진 않습니까?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죽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헌데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부활의 예수님'보다는 고난과 십자가의 예수님, 죽으신 예수님만을 묵상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아주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저들은 고난당하신 예수님, 죽으신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느라고 '부활하신 예수님'깨서 자기들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부활'을 외치며 예수님 부활을 삶으로 믿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본문34에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오늘의 본문의 제목으로 하여서 우리 부활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전제"에 갇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물건을 찾을 때도 이미 없다고 확신하고 있으면 눈앞에 두고도 못 보는 수가 있습니다.
나는 못 보는데 남들은 잘 보는 것이 있습니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내 전제 편견이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 예수님은 끝났다'하는 전제를 갖고 있는 두 제자는 마음눈이 어두워져서 자기들과 함께 하는 이 분이 "다시 사신 예수님"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예수님도 저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지 않고 계십니다.
다만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기만 하셨습니다.
이때 둘 중 하나인 극로바라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보듯 예수님을 보며 말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호롤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지만, 저들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 사건'을 전혀 모른다는 이 사람을 이상한 사람 보듯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상세히 설명하기를 시작합니다.

본문 19-24절까지에 등장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은 예수님에 관한 사건인데, 그는 나사렛 출신 선지자로서 말과 일에 능한 분이었다.
그는 의롭고 훌륭한 분이었는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그분을 시기하여 그만 사형판결에 넘기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들은 그분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인줄 알고 그 분을 따랐다.
그런데 그 분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무덤에 가 보았는데,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만 들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의 말을 전해 듣고 제자 중 두 사람이 다시 그곳에 가서 확인한 결과 역시 예수가 장사된 그 무덤은 비어있었고, 예수님은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마치 무슨 '미스터리극장'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은 자기들이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님 앞에 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여기 '미련하다'는 말은 '어리석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더디 믿는다'는 것은 영적이 면에서 너무 '둔하다'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못 알아보고 예수님은 이미 장사되어 이 세상에 안 계신 분 인양 하고 낙심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아주 민감하고, 똑똑하고, 즉각 반응합니다.
이해력, 분석력, 적응력이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일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면서 영적인 일에는 둔하고 어리석습니다.
여기에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점점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둔감하여져만 갑니다.
대권주자들의 인기도가 어떤지 경기도지사, 수원시장에 누가 출마했는지 세류동 땅값이 얼마인지 백화점 세일은 언제 하는지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죄송하지만 창세기, 마태복음, 시편 외엔 잘 찾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것도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한 일들을 중심으로 알고 그 예수님의 이야기는 십자가 죽으심으로 끝난 것으로만 압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예수님에 관하여는 거의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서 문제에 지적하면 늘 한숨만 짖고 걱정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 성령으로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의식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ale는 사람에게도 예수님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모습을 주님이 보실 때 얼마나 갑갑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주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오늘의 이야기는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답답해서이고 '이 미련한 것들아'하고 가버린 예기가 아닙니다.
그토록 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분이 상상이 안가도록하고 살아가든, 자들을 두고 주님은 불쌍하게 여기시고 성경을 차근차근 풀어 성명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메시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것을 풀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설명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고난과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마당에 예수님이 다시 풀어 설명하신 것은 저들이 지금 시험과 두려움에 빠져서 예수님이 실제 살아나신 것을 연계 시킬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 들으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우리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예수님을 볼 줄 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청하고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는데 본문에 보니까 그 떡을 먹을 때에 비로소 자기들 앞에 예수님 계신 것이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 예수님을 알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축복하시고 떼어 준 떡을 저들이 받아먹을 때 그들의 영적인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떡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떡 자체에 능력이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절기가 되어 성찬 떡만 먹어도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씀이 주어지고 떡이 주어진 점입니다.
말씀 사모 없이 말씀 은혜 없이 받는 떡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32절 이하에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말씀으로 영안이 열리고 성령으로 마음에 큰 감동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이 일후에 제자들은 발걸음을 돌립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믿고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남은 열한제자를 만나 그들을 만나 그들이 말하길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는 말을 듣습니다.
여기 과연이란 진실로(참으로)의 뜻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만나 사실을 간증할 때 엠마오로 가다가 돌아온 두 제자도 길에서 경험한 바를 고백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부활의 사실은 저들의 체험을 통하여 나누어 졌습니다.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 볼 수 없던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부활의 실제성을 믿지 못하고 돌아가신 예수님,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진 않았습니까?
하지만 미련하고 더디 믿고 들은바 말씀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으로 영안 열어 밝히 알게 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감동으로 임하십니다.
부활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 주신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 은혜 입은 사람으로서 '오늘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가슴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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