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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은총의 공동체 (행 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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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수염 흰 고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몸 길이가 30 미터나 되고 무게는 무려 170 톤에 달하는 초대형 동물입니다. 8 톤 트럭으로 운반하려고 할 것 같으면 20 대가 넘게 동원해야 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동물입니다. 만약 그 긴 수염 흰 고래를 우리처럼 땅 위에서 살게 할 것 같으면 그 엄청난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금방 뼈가 다 부러지고 몸집은 터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래를 바다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엄청난 몸을 물이 잘 받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바다에서 고래는 결코 뼈가 부러지지 않습니다. 바다에서 고래는 결코 몸집이 터지지도 않습니다. 고래는 넓은 바다에서 아주 여유롭게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긴 수염 흰 고래에게 있어서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닷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무게로 환산할 것 같으면 얼마나 될까요? 아마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체로 엄청나게 무거울 것입니다. 그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한 번 넘어지면 도저히 다시금 일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댓가는 사망이라고... 그 죄의 댓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사 그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의 산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이 아주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의 의를 덧입게 되었을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영생의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를 믿게 된 유대인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 가운데 아주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적어도 삼천 명 이상이었을 것입니다.(행 2:41 참조) 그 큰 무리가 어떻게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마 스스로도 놀랐을 것입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도 신기한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행전 기자는 비슷한 기사를 이미 앞에서(행 2:43~47)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유무 상통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밭이나 집을 팔아 그 판 값을 모두 사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돈이 얼마가 되었든지 상관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도들에게 맡겼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라고 기록한 것이 바로 그런 겸손한 자세를 잘 나타내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들은 그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눠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함께 납득하고 기뻐할 만한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아주 요긴하게 썼을 것입니다. 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좀 더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 자신들의 재물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올바른 믿음이 아름다운 사귐과 나눔을 이루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사귐과 나눔 속에서 믿음이 더욱 성장하는 은혜로운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올바른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주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만약 믿음이 흔들릴 것 같으면 얼마든지 거짓이나 탐심이 침투할 수 있고 그 결과 교회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들을 속이려고 하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유무 상통하는 은혜로운 공동체, 교회는 오직 올바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기자도 바로 그런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행 4:33) 그렇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자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교회 공동체 안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유무 상통하는 은혜로운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큰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소망을 간직하게 된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다른 모임이나 집단, 또는 공동체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특징이 발견되지 않는 교회는 적어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는 모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과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또 아무리 멋진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을지라도 그런 특징이 발견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과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니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먼저, 교회의 지체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주님과 늘 기도로 사귀는 것입니다. 과연 한 마음 한 뜻으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그 현장에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오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교회의 지체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못했을 것 같으면 위대한 복음 전파의 역사는 계속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세상의 다른 모임들과 구별되는 것은 같은 은혜를 받은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은혜로운 공동체인 교회 안에는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주류와 비주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 안에 매파가 따로 있고 비둘기파가 따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한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한 성령님 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그 부활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말씀의 선포를 담당한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은혜로운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설교의 핵심은 단연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능력있는 설교를 했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성육신 사건으로 설교의 서론을 장식하고 본론으로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역점을 두고 설교한 후 주님의 영광과 존귀로 설교의 결론을 맺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2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2장 32절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장 바람직한 설교라는 말입니다.

  끝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그들로 하여금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게 하셨습니다. 재물을 서로 통용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앞의 기록에 이어 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재물이 각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 안에 핍절한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꿈 같은 이야기지만 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믿은 초대교회에서 실제로 이루어 낸 엄연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때 공산주의 사회가 이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가난한 사람만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었는데 왜 공산주의는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않고 법이나 제도로 강요할 것 같으면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한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또한 재물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그 결과 삶을 짓누르던 죄의 짐이 가벼워졌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습니다. 은총의 공동체, 교회는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루어 내야 할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사귐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그 주님의 부활을 널리 전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마침내 어두운 이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선물로 안겨 주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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