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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골고다에서 갈릴리로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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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땅은 크게 3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남쪽지방을 ‘예루살렘’으로, 중부지방을 ‘사마리아’로, 그리고 북부지방을 ‘갈릴리’로 불렀습니다. 다 중요하지만 특히 갈릴리는 성경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곳으로 소개합니다. 우선, 이곳은 교통의 요지이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기름진 옥토, 그리고 넓은 바다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도 이곳은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고, 갈릴리 호수의 물은 전 이스라엘 땅의 식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는 생명선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곳으로서 이곳에서 수산업이 크게 번창하여 각처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입니다.

  또한 갈릴리는 예수 님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로서도 유명한 곳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자라신 곳은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북부 갈릴리의 중심도시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30년을 사셨고, 복음을 위해 사람을 부르고, 기적을 행하고, 말씀을 가르치신 곳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들판도 갈릴리 호수의 북쪽 연안이었고, 산상설교도 이곳 언덕에서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풍랑 속에 빠진 것도 여기에서의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갈릴리는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처음 만나신 곳입니다.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를 부르신 곳입니다. 평생 고기잡이를 하며 갈릴리를 떠나지 않던 그들에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여기에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사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곳입니다.

  예수 님은 이곳으로 다시 가셨습니다. ‘골고다에서 갈릴리’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신 것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해골의 골고다에서 죽으신 이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두에게 진정한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고, 그들을 다시 만나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주님이 제자와 우리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축복이 무엇일까요?

  우선, 평강입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처음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 믿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평안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특히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가장 큰 은혜로 주십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평안이 늘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이 평강을 빼앗아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여기 제자들의 경우를 보면, 두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평안을 막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불안해서 평안하지 못합니다. 여기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19절에 이들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인 곳에 문을 닫고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평안을 이루지 못하는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왜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들도 잡히면 죽는다는 것이 이들을 두렵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이 공포요,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죽음의 공포, 두려움의 실체를 없애기 위해 오늘 부활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임한 승리를 통해 모든 죽음의 공포, 두려움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평안을 빼앗는 것이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걱정과 근심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근심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짐을 덜기 위해 주님이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두려움에서, 근심에서의 해방을 위해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것이 근심, 걱정, 염려입니다. 근심은 옛날 사람만이 아니라 현대인도,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있는 사람도, 어른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합니다. 이처럼 누구나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이런 것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정신과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통계가 나왔습니다. 인간이 하는 근심의 40%는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이고, 30%는 지난 일을 걱정하는 것이고, 12%는 내가 걱정 안 해도 될 일을 걱정하는 것이며, 10%는 불확실한 일을 걱정하는 것이고, 8%만이 어쩔 수 없는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염려와 근심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8% 마저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고 500회 이상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주님을 믿는다면, 더욱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올 때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찬송하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걱정에서 벗어나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것이 부활의 주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충만히 임했습니다. 비둘기같이, 바람같이, 물같이, 불같이, 그렇게 임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다시 크게 두 가지의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선, 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능력을 상징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이란 말에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능력임을 알려줍니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오늘 말씀에도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선포하신 뒤, 성령이 임할 때 받는 능력을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두 다 성령이 임하는 곳의 능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신앙과 삶에 다이너마이트보다, 핵 폭탄보다 더 능력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는 보이는 우리 삶에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카리스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터프한 사람이나, 유능한 연예인, 혹은 탁월한 지도자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표현을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일반 사회에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이 말은 기독교용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 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사회학자였던 ‘베버’라는 사람이 이 말의 원 뜻을 확대하여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립시켰던 것입니다. 즉,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초자연적, 초인적인 자질이나 재능의 힘을 이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모두 카리스마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이미 우리는 카리스마가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탁월한 삶을 살수 있는 잠재력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에겐 세상 사람과 다른, 탁월함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면 따라오는 또 하나의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과 함께 ‘깨달음’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6장 4절 이하에서 성령의 역할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성령은 깨달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는 곳에 결과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깊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혜는 보이는 내 삶의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삶에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깨닫고, 더 많이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변화와 성숙은 깨달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 앞에 나올 때, 주님 앞에 엎드릴 때, 부활의 주님으로 주시는 놀라운 깨달음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명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먼저는 평강이요, 또한 성령이면서, 그리고 사명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유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2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며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뭔가 주님이 못다한 일을 마치기 위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들이 주님께 받은 사명은 다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은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들의 발이 닿는 곳곳마다 부활의 주님을 증거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을 핍박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까지도 불쌍히 여기며 복음을 전했던 것을 봅니다. 이들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과 헌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게 되었고, 주님을 믿고 되었고,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빌립보로, 신실한 전도자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그 지역에 가서 똑같이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전파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제자들을 세웠고, 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주일에 우리끼리 즐거워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한국교회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교회가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열정이 점점 식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전도하는 것을 가장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선교하는 일에 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전도하는 것이 이상해 보이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애초부터 그랬다면 기대하지 않을텐데,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복음전파에 열정이 있는 민족인지 모릅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생활화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 열기가 식어갑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때에 부활의 주님이 다시 우리를 일으켜 사명을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전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삶에 복음의 불을 다시 붙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임한 두 번째 사명은 복음전파와 함께 달라진 삶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제자로서, 믿는 자로서 이제 뭔가 달라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살라고 제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명도 잘 감당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들이 모습을 통해 이것을 배웁니다. 제자들은 한마디로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무식한 어부가 아닙니다. 더 이상 거칠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의 생각이, 마음이, 인격이 잘 다듬어졌습니다. 그래서 말로서만이 아니라, 삶과 인격으로 주님의 제자임을 증거 하는 것에 큰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뭔가 달라진 사람들로 세상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달라진 인격과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사회가 달라지고, 나라가 달라지고, 가정과 그리고 공동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아직까지 많이 부족하지만 이 일에 깊은 통찰을 가지고 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의 할 일입니다. 나의 부족을 돌아보고 허리끈을 조여 매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주님이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서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 일에 헌신을 다짐하면서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골고다에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평안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령으로 힘을 주시고, 그리고 사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 이 뜻깊은 부활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날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승리하며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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