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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사귐에 거하라 (요일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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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으로 손꼽힙니다. 루터의 개혁은 기독교 역사만 바꾼 것이 아니라 일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루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루터의 핵심사상이 행함이 없는 신앙인들을 만들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루터의 잘못이겠습니까? 루터 신학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루터신학의 뿌리에는 바울의 신학이 있습니다. 바울은 유난히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행함도 이야기했지만 믿음을 아주 강조한 나머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확고히 세웠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을 행하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더 예수님의 사상에 가까운 믿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봉독한 서신의 주인공인 사도요한의 가르침은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신학은 바울의 교리를 뛰어넘고 루터의 신학을 뛰어넘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요한1서 1장 5-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에 거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경청하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삼아 하나님과의 사귐에 거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A. 하나님과의 사귐

에덴동산에는 원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친밀한 사귐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동산을 거니시다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장면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평소에 하나님과 아담 그리고 하와 사이에는 친밀한 사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귐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히 법적인 자녀 됨을 상징하는 칭의의 단계를 넘어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실제적인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도 이를 잘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단계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귐의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사야 62장 4절에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 하며 네 땅을 쁄라(결혼한 여자)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니라”

누가복음 15장에는 집을 떠났던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오며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단순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자격과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B.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

그런데 하나님과의 사귐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뜻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하나님과의 사귐은 빛 안에서 가능합니다. 진정한 사귐은 모든 면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샘 레이번(Sam Rayburn)이라는 미국의회의 최장수 하원의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 하나가 10대인 딸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딸을 잃은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무엇인가 도움이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달려갔습니다. 친구는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레이번씨는 그들이 아침식사를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날은 레이번씨가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날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조찬모임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딸을 잃은 친구가 있어서 조찬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하고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귐의 모습입니다. 큰 영광을 버리면서까지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러해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을 포기하더라도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에 동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는 빛을 공유해야 합니다. 또 로마서 13장 12절에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였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성도는 빛을 나누어야 합니다.

C. 죄로부터 분리하라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죄의 용서의 차원을 넘어 죄를 떠나야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성도는 어두움을 떠나야 합니다.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죄에서 깨끗하게 하심”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분리를 말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단어 “카타르제인”은 속죄와 죄로부터의 분리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는 것이 신앙이 전부가 아닙니다.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됨으로 만족하지 말고 빛을 나누고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 온 여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나이든 장로부터 어린 사람들까지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고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용서로 끝내지 않고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청하셨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는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두움을 떠나며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D.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하라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하기를 요구하십니다. 8-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속죄와 죄로부터의 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자백”은 “호모로고멘”은 원래 “같은 말을 한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면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또 죄를 지으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할 때 우리가 한 없이 더러운 존재임을 깨닫고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화인 맞아서 자기 기준에서 판단합니다. 자기에게 좋으면 선이고 자기에게 안 좋으면 악으로 보류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대인관계 안에서 판단을 내립니다. 여기서도 진정한 죄의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해야 다른 사람이 모르는 죄까지 고백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할 때 삶의 모든 가치관의 수준이 높아집니다. 이기적인 생각을 떠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게 되고 이웃의 형편을 돌아보게 됩니다. 육신을 위한 정욕적인 가치관에서 참 진리를 세우는 고상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수준에서 생각하면 윤리교육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생각하면 고귀한 삶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성자 프란새스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아주 불쌍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프란새스는 제자들에게 “우리 옷을 저 주인에게 돌려주자. 우리가 입은 옷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까지 잠시 빌려 입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옷을 입지 않고 다니면 일하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란새스는 옷을 벗으면서 “얘들아, 나는 도둑놈이 되기보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 라고 했습니다. 정말 성자다운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한 고귀한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귐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포도나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받을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습니다. (황광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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