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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혼란으로부터 친교로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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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관계없이 지난 주일은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짐바브웨의 흙집들로부터 영국의 웅장한 대교회들, 인도의 야외집회들, 한국의 아름다운 교회들, 그리고 미국 전역에 걸쳐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문화적인 한계와 언어의 장벽, 신학의 차이, 정치적 오점과 상반되는 가치를 초월했습니다. 주님하신 부활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고 사명 안에서 연합되어, 우리의 구세주요 한 분이신 주님을 경배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북일리노이스주의 우리 대표단은 서울남연회 공동체로부터 따뜻하고 친절한 환영과 영접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사라지신 뒤, 그 주간에 제자들이 처한 상황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들이 깨어있는 매순간마다 의심과 두려움의 역병이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안개와 같은 혼란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제자들은 바다에 친숙한 옛날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바다의 매력, 리듬있는 바다의 파도소리, 그물을 던지고 감아올리는 육체적인 노동, 태양이 떠오를 때의 아름다움, 신선한 아침 공기의 냄새, 이러한 것들은 사도들의 근심을 누그러뜨리는 친숙한 광경이요, 소리요, 활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잃은 것에 대해 슬퍼했고,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씨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뀐 지금, 그들의 미래가 어찌될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생애 동안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밖에 바닷가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바닷가로부터 수 천 마일 떨어진 도시인 시카고에서 성장했습니다. 지방 감리사로서 제가 섬기고 있는 연회인 북 일리노이주 안에 하나의 호수와 몇 개의 강과 작은 호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처럼 거대하고 압도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양의 위풍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저는 고기잡이의 매력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저의 남편 게리(Gary)는 낚시광입니다. 그는 제자들의 그물과는 반대로 낚싯대와 릴을 사용합니다. 그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나 그의 낚시질 경험 안에서 그가 묘사하는 기쁨, 기분전환과 회복은 제자들이 그들의 생업이었고 첫사랑이었던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간 기분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은 자연과의 우연한 만남입니다. 자연의 기적들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의 천재성을 일깨워줍니다, 변화하는 계절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을 발견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바닷가에서의 이 아침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방식에 도전을 주는 또 다른 기회였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의 안개가 걷힘에 따라, 친숙한 주위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일이 잘 풀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빈그물만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던 물고기 잡는 기술조차도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룰 줄로만 알았던 옛날의 일상적인 일이 아무런 결실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의존해왔던 그 일이 더 이상 그들을 지탱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노력의 결과 혼란만이 따랐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고기잡이 여정을 포기하고 해변으로 막 이동하려고 할 때에, 바닷가에 한 그림자와 같은  분이 나타나 그들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그물을 배 반대편에 던져라.” 물론 그 제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조류로부터 떨어져 배의 한 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물고기들이 넓게 펼쳐진 그물망 안으로 헤엄쳐 들어올 것입니다. 아무도 배의 바람부는 방향으로 그물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물이 배 밑에서 꼬이게 됩니다. 거기에서 그물이 얽히게 되어, 물고기가 그 안으로 헤엄쳐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침에 제자들은 그림자와 같은 분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압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경험을 통해 알고있는 모든 원리에 반하는, 과감하고 평범치 않는 어떤 것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들의 구세주의 목소리를 경청하여, 그들의 일상적인 일에 변화를 줌으로써 혼란에서 벗어나고 그들의 어망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그들로 하여금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물고기를 거의 다룰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은 물고기를 얻었습니다.
혼란으로부터 축복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바닷가에서 친교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조반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축복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로서의 여정에서 혼란에서 친교로 나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제자도는 매일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활동입니다. 제자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과 교차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혹은 가장 도전적인 순간들에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과 충돌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뉴욕시에는 미국의 역사를 규정하는 순간들 중의 하나를 묘사하는 육중한 벽화를 소장하고 있는 유명한 미술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조오지 워싱턴을 그린 오리지널 그림입니다. 조오지 워싱턴은 1776년에 새로이 창설된 미합중국의 초대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영국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 혁명적인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워싱턴이 델라웨어라는 강을 횡단하는 순간은 혁명에 있어서 유명한 순간입니다. 그때 그는 경험이 없는 식민지의 햇병아리 병사들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뉴욕 미술관에 있는 벽화는 아주 커서 만일 여러분이 가까이 가서 선다면, 여러분은 워싱턴의 나무로 만든 이빨, 거대한 코, 보트 위에 있는 실물보다 큰 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세한 묘사(세세한 그림/그림의 세세한 부분)가 정말로 인상적인 모든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감동을 주는 것은 여러분이 방으로부터 걸어나올 때 보는 것입니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본다면, 여러분은 그 충격, 예술가에 의해 때맞춰 묘사된 순간의 아주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에 그림의 세부묘사는 전체성을 나타내며 하나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그림의 세세한 부분에 고정되었습니다. 그들은 평상시처럼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서 그 큰 그림을 잘 관찰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저의 믿음 안에서, 여러분의 교회와 제가 미국에서 섬기고 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흔히 뒤로 물러서서 더 큰 그림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아주 작은 세세한 그림을 붙잡습니다. 

정희수 감독은 이 주일에 우리 대표단을 서울남연회로 인도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보다 큰 그림을 보는 좋은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감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도록, 안락한 영역으로부터 떠나서 복음을 위하여 위험을 무릎쓰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결코 서로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관습과, 가치관, 믿음과 투쟁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합니다. 저는 미국으로 이민오는 무지하게 많은 한국인 이민자로 구성된 주민들을 섬깁니다. 저의 많은 친구들은 한국인 남자 목사님들과 여자목사님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열정과 그들의 차이점을 북일리노이스로 가져왔습니다. 제가 그러한 차이점들에 대해 제자신을 개방했을 때에, 저는 또 다른 전망으로부터 하나님의 현존을 이해하는 나의 믿음 안에서 더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의식적인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일상적인 일로부터 물러나서 위험을 무릎쓰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참람함과 몰지각에 고착된 채, ‘혼란상태’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초대를 듣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친교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 감리교회는 미국감리교회처럼 세세한 그림에 사로잡혀 쓸 데 없는 일들에 빠져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가 좁은 것은 우리의 인간본성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제자들이 바닷가에 있는 낯선 사람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어부가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이 직업에 수 년간 몸담고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일의 한가운데에 예수께서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는 제자들의 자발적 의지의 한가운데에, 심지어 실패가 보장되어있는 어떤 일들의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기적의 증인이 되는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시면서 예수께서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부활절이 모든 대륙의 크리스챤들을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함께 결합시키듯이, 그 제자들이 그들의 그물을 가득채우고, 그들의 노동을 마쳤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육체를 먹이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도 채워주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그들은 보다 큰 그림을 보았고, 제자로서의 그들의 삶이 단지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빵을 함께 쪼개고 식사를 나누는 것은 고대의 환대의 관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을 부양하는 선물로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신 당신의 몸, 우리를 위해 흘리신 당신의 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배반당하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빵을 쪼개셨습니다. 그분은 성례전의 나눔 안에서와 공동체의 교제 안에서, 친교의 가치와 힘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우리 지방 안에 있는 한국 교회에 갈 때마다, 새롭고 색다른 음식들을 시식하는 흥분된 기회와 더불어 훌륭한 식사를 경험합니다. 밥사발과 불고기, 혹은 김치를 넘어서, 우리는 신학자 부크너가 세속적인 것으로 언급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도에로의 부르심으로부터 우리를 신실한 삶으로 인도하는 깨달음, 관계, 그리고 보편적인 경험들을 세웁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서로의 차이점으로부터 오는 혼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언어의 장벽, 관습의 차이, 우리의 역사의 투쟁, 그리고 거리의 장벽조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작은 세세한 그림들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라는 큰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알린 크리스토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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