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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 11계명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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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난주간도 부활주일도 끝났습니다. 부활주일을 통해 얻은 교훈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참 원대하고 넓고 큽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거치고 부활주일을 보내는 동안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할 목적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활을 통해 얻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유언적인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주님은 이 말씀을 새계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말씀은 기독교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오랫동안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많아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때 성도들이 마지막으로 교훈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사도요한이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을 인용해서 교훈을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형제들아 나에게 무슨 새로운 교훈이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오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 있을 뿐입니다.”하고 교훈을 주었다 합니다. 영국교회의 어셔 감독은 이 계명을 “제 11계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11번째 계명에 들어갈 만큼 중요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각 종교에는 나름대로 그 종교를 대표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는 인(仁)을 말씀했습니다. ‘인’은 ‘어진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 어진 마음이 있어야 바른 관계가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은 이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가장 인간다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불교에서 석가는 자비를 말씀했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기어 다니는 생명을 가진 곤충까지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생명을 아끼는 것이 인간의 바른 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같은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사랑을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사랑할 때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누굴 진정으로 사랑할 때 모두 천사가 됩니다. 시인이 됩니다. 마냥 행복해하는 어린 아이가 됩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런데 행복을 주는 일은 더 행복한 일입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정신이 이 세상을 살리고 구원하고 평화를 이루고 중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하는 삶이 부활의 증인의 삶이고 부활을 체험한 제자의 삶이고 신앙인의 가장 건강한 삶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이후 이 정신을 구현해서 우리 주변부터 사랑의 힘으로 정복하고 관계를 이루고 섬기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이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의 은사를 받읍시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 까지도 다 풀어 보십시다. 그럼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몇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관심

사랑은 상대방에 따뜻한 관심 갖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고 염려하고 돌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의 생애 중에 나타난 그 사랑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의 반대개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미움이 아닙니다. 롤러 메이라는 사람은 <사랑과 의지>라는 책에서 사랑의 반대개념은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도 아직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관심은 미워할만한 생각조차도 없어진 상태입니다. 아예 마음속에 그 존재 자체까지도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 마음이 무서운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야단치고 매를 들고 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도 하고 큰소리도 치고 분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안 되면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 말은 사랑을 포기했다는 말 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형벌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노하시고 매를 들기도 하시고 재앙을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너희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질투하지 않으시고 무관심하시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은 관심을 갖는 삶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 갖는 것입니다.

용납

사랑은 관심일 뿐 아니라 마음을 열고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사랑에는 수고가 필요하고 고통이 수반되고 아픔이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런 수고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렇게 받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면서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가끔 주님은 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어쩌자고 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를 뽑으셨습니까. 사람을 볼 줄 몰라서 입니까,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왜 그런 사람을 제자로 선택하고 뽑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자고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선택하시고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는 유다보다 얼마나 나은 사람입니까. 나 같은 사람을 불러서 사용하시고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예수님의 용납 때문입니다. 용납도 그냥 용납이 아니고 무조건의 용납입니다. 그래서 그 용납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말하는 전승이 하나 있습니다. 맨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천사들에게 먼저 의견을 수렴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사람을 지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때 공의의 천사는 처음부터 반대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지으면 보나 안보나 법을 어기고 도의를 짓밟고 온갖 죄를 지을 것이 뻔합니다” 하고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진리의 천사도 처음부터 반대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지으면 틀림없이 거짓되고 속이고 하나님까지 배반할 것이 뻔합니다”하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결의 천사도 처음부터 반대했다고 합니다. “인간을 지어놓으면 부패해서 하나님까지도 욕을 먹고 세상을 망쳐 놓을 것이 뻔합니다”하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비의 천사만 혼자서 찬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인간을 지으십시오. 만일 인간이 죄를 짓고 공의를 버리고 진리와 성결에서 멀어지게 되면 내가 자비와 긍휼을 가지고 타일러서 하나님께로 인도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죄인까지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용납입니다. 여러분, 용납하지 못해서 지금 갈등을 겪는 가족과 형제와 이웃과 교우가 있습니까. 그 마음이 오죽 답답하고 무겁겠습니까. 그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그 삶이 지옥의 삶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속에서 얼마나 분노가 일어나고 갈등이 일어나고 밤에 잠인들 이루겠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살면 단명해집니다. 삶이 어두워집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가족과 형제와 고부간에 교우 간에 이웃 간에 불화가 깊어지고 갈등과 미움이 오래 가면 결국 누가 손해냐 하면 내가 손해입니다. 내 마음에서 평화가 사라지고 웃음과 기쁨과 행복을 빼앗겨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네가 예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는 것

사랑은 관심이고 용납일 뿐 아니고 주는 것입니다. 주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 없이 줄 때는 뭔가 그와 상응하는 것을 받았을 때 주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 갚느라고 대가 없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고 난후 고백하기를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받아본 사람이 베푸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대가 없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청구서 한 장을 내 밀었습니다. 심부름 한 값 천원, 학원 갔다 온 값 천원, 방 청소한 값 천원, 숙제한 값 천원, 합께 4천원. 요즘 아이들이 이렇게 계산적입니다. 달라고 할 때는 아주 당당합니다. 부모들이 병들었을 때 간호해준 값, 매일 옷 빨아준 값, 지금까지 키워준 값, 앞으로 키워주는 값을 모두 청구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은 많이 하는데 그 사랑에 깊이가 없습니다. 자식의 부모사랑과 부모의 자식 사랑과는 질과 깊이가 다릅니다. 사랑은 이론도 아니고 계산도 아니고 의무도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고 행동으로 마음만 아니고 주머니를 털어서 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들에게 다 줍니다. 줄 때는 계산하지 않고 그냥 다 줍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부모에게 뭘 줄 때는 계산하고 망설이며 줍니다. 그것은 사랑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말은 잘 합니다. 부모의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다고 노래는 잘하는데 막상 주머니를 열고 줄 때는 망설이고 주저하고 계산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홍수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사랑이 넘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보면 모두 말뿐인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넘치고 많은데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금혼식을 하는 노부부에게 물었습니다. “5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 보았습니까”하고 물었더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도 살아가는 동안 애로나 문제가 없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채 50년을 살아왔지만 누구보다도 더 깊은 정을 가지고 살아왔고 문제 하나 없이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부부는 아침마다 출근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데 어쩌다 그 말을 잊으면 그날은 저녁밥도 안주는 부인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정말 깊이 있는 사랑은 그렇게 헤픈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너희에게 준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서툰 삶이 관계를 깨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불화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나만 생각하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삶입니다. 더불어 살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삶입니다.

오늘 세상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관계들이 삭막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 이 세상을 부드럽게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하고자 하면 주님은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런 가슴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증인의 삶일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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