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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하신 주님을 경배한 여인들 -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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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개혁의 과제를 진행하면서 여러 반대와 핍박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그도 너무나 좌절하고 절망해서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갇혀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도무지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루터의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루터의 방에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루터가 묻습니다. “아니 여보, 누가 죽었소?”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죽었어요!” 깜짝 놀란 루터는 “아니... 하나님이 죽다니? 그런 불경스런 말이 어디 있소?”하고 되물었습니다. 그 때 부인은 진지한 눈초리로 루터를 바라보면서 “여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절망할 수 있어요?” 그 때, 마틴 루터는 무릎을 탁 치면서 이야기 합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용기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수행했고 결국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다면!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다시 사신 그 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예배드려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을 것을 수차례 걸쳐서 예언하셨습니다. 결코 예언대로 예수님은 로마 병정에게 체포되고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생명이 되셨던 것입니다.
  안식일 전 날 새벽 미명에 처음으로 무덤을 찾아서 예수님을 만나 여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소개된 대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발라드리려고 향품을 준비해서 새벽 미명에 무덤 곁에 갔는데, 그 때 큰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그 무덤을 막은 큰 돌문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6절과 7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아멘.

  두려워하는 여인들에게 주의 천사가 말합니다. “그 분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이 빈 무덤을 보세요.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세요!” 여인들은 너무 놀랐고, 또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 때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평안하뇨?” 그 말은 요즘 우리가 인사하는 히브리어의 “샬롬!”과 같은 뜻입니다. 그 때 여인들은 너무 놀라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8절,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아멘.
  여인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이 말은 예배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나신 예수님 앞에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인들의 태도 속에서 진정한 예배자의 태도에 대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면 우린 어떤 태도로 예배해야 될까요? 우리 예배는 바로 살아계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는 어떤 태도로 드려져야 할까요?

  첫째로,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 1절을 읽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아멘.

  보십시오. 오늘 여인들이 무덤을 찾은 시간은 아주 새벽 미명,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아직 캄캄한 누구나 두려워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입니다. 더구나 아직 동이 밝지 않았는데 그 어둠을 헤치고 공동묘지를 향해 간다는 건 굉장히 두려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여인들은 왜 새벽 이른 시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무나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나 예수님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분의 장사지내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그저 대충 대충 급히 장례식을 치뤘을 뿐입니다. 향유를 시신에 좀 더 발라 드려야 되는데.... 베를 좀 더 감아드려야 되는데... 아마도 이런 마음의 부담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뜬 눈으로 밤을 새다가 새벽이 되어서 길을 찾을 수 있을 때 무덤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자의 조건은 바로 사모하는 마음과 열정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 을 위한 사랑 때문에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무서워서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한 다락방에 숨어서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는 바로 그 시간,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와 이 다른 마리아라는 여인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2:37에 보니까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가 나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묻습니다. “세상에 최고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첫째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과 같은 간절함이 우리 마음속에 있느냐입니다. 거기 진정한 예배가 있습니다. 의무적인 예배, 적당한 예배, 형식적인예배, 건성의 예배, 그것은 진정한 예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여러분이 예배드리면서 “아휴, 빨리 예배 끝나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거 있는데 그것 먹어야지!” 몸은 여기 있지만 생각은 딴 데 가 있으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바꿔 말하면 부부가 식탁에서 서로 대화합니다. 그러면서 이 남편의 마음속에서 저 신길 다방 미스 김 생각이 자꾸 납니다. 이게 온전한 대화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이 예배자의 마음속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뜨거운 사랑을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애정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드리면서 낙서나 하고 딴 생각하고, 언제 끝나나... 그것은 사모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는 결코 형식이 되서는 안 됩니다.

  종종 결혼기념일이 되면 언제부터인가 제 아내에게 장미꽃을 한 송이씩 선물했습니다. 어느 분이 그게 좋다고 해서 저도 좋은 것 같이 생각이 되어 그렇게 했습니다. 결혼 일주년 기념일 때 장미꽃 한 송이, 5주년이 되면 다섯 송이, 처음에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20년 이 되니까 장미 꽃값이 올라서 슬슬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느 날, 제가 장미꽃을 가지고 아내에게 선물을 했는데 아내가 “이게 무슨 꽃이야?”라고 묻는데, 제가 “첫째, 나는 당신의 남편이니까. 둘째, 오늘은 우리의 결혼 기념일 이니까. 셋째, 남편은 기념일에 아내에게 꽃을 줘야하니까.” 라고 한다면 아내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렇게 의무적인 꽃이라면 아마 받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보. 당신 나하고 결혼해서 너무 고생 많았지. 고마워. 사랑해.”란 고백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예배 드려야 해? 가긴 가야지.” 안 가면 벌 받을 것 같으니까 마지못해 앉아 있는다면 진정으로 기쁨을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해 드리는 예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꼭 예배시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늘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의 핸드폰을 30분마다 울리도록 조정을 해 놓았답니다.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예수님을 생각한답니다.
  예배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관심을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애정을 주님께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오늘 여인들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새벽의 두려움과 위험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18에 보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까지 내어 쫓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어떻게 예배드릴까요? 우리는 기쁨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과 얼굴에서는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오늘 8절에 보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듣는 순간 너무 놀랐습니다. 여러분 만약 아들이 죽어서 장례 지내려고 영안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하룻밤이 지났는데 아들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쁘겠어요.
  우스갯소리입니다만, 어느 남자분이 부인이 죽어서 관에 넣고 3일장을 치루는데, 마지막 날에 관을 들고 운구하는데, 그만 운구하는 사람의 실수로 기둥에다가 관을 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관 뚜껑이 열리면서 부인이 살아나왔답니다. 남편이 놀란 거에요. 죽었던 부인이 살아난 것입니다. 얼마 살다가 부인이 또 죽었습니다. 관에 또 넣어가지고 운구를 하는데, 이번엔 이 남자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여보시오. 조심조심 다루시오. 조심조심.”^^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죽었던 우리 주님이 살아났을 때, 이 여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기쁨으로, 그것을 성서학자는 말하기를 “전율할만한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그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감격이 크겠습니까? 우리 예배 속에 그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배에 나올 때마다 주님을 만나는 감격과 그 기대를 갖고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런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의 삶에는 항상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죽음처럼 두려운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은 다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깨치고 승리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만약 누가 암에 대한 약을 만들어냈다면 아마 하루 종일은 화제가 될 것입니다. 암을 정복하는 약이 나왔으니 이제 암 걱정을 안해도 되겠다고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입니다. 듣는 사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한 죽음의 권세를 깨치신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한 외국 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가 예배를 마치더니 안내하는 분에게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한국교인들은 참 이상합니다. 마당에서 만나고 로비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하고 자기들끼리 즐겁게 얘기도 하고 얼굴이 밝은데, 예배실 안에만 들어가면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고 엄숙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기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빛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안내했던 분이 너무 미안한나머지 이렇게 둘러댔답니다.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고난을 늘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이 선교사가 하는 말이 “한국교회 교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모르시나보죠?”하더랍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는데 왜 거기에 기쁨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 살아나신 주님을 찬양하는데 왜 그 얼굴에 미소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심령과 우리 얼굴에 정말 기쁨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옆의 분들과 인사합니다. “이제 기쁨으로 삽시다!”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인상 쓰지 말고 주님 생각하며 좋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도 웃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옆의 분들과 인사합시다. “까꿍~!”

  그리스도인들의 얼굴 속에는 이 부활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40일 캠페인 중의 “예배주간”의 시작입니다. 이 예배주간의 모토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상 쓰고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그저 젖 먹고, 잠을 잘 뿐입니다. 그리고 까꿍!하면 한번 웃어주면 됩니다. 그것만으로 부모는 기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기쁨으로 살고 기쁨으로 예배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어떻게 예배할까요? 희망으로 예배드리셔야 합니다.

  부활은 희망의 사건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께 드리는 예배라면 우리의 마음이 희망으로 가득차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 3에 보니까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특별히 오늘 8절에 보니, 여인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무덤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의 장소, 절망의 장소, 흑암의 권세를 떠나서 희망으로 달려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교인들은 아직 부활의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빙빙 도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절망의 무덤, 죽음의 무덤을 붙들고 슬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희망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은 희망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죽음은 절망이고 좌절이지만 죽음을 뛰어넘어서 부활한다는 것은 새로운 소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무디 목사님은 임종 때,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것이다.”라고 했으며, 영국의 존 웨슬레 목사님은 88세로 임종할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존 칼빈은 ”주님 나는 더할수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한국의 이화여대의 초대총장을 지냈던 김활란 박사는 “내가 죽으면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천국의 소망을 노래하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부활은 희망의 사건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뛰어넘어서 영원한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를 좌절과 절망가운데 나온 분들 계십니까? 오늘 예배를 통해서 희망을 안고 돌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증거 하는 삶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달음질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빨리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10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얼른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예배로 끝나면 안 됩니다. 나가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할 때 그 예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볼 때 사람들은 의문을 갖습니다. 예수님에게 열 두 제자가 있고, 가롯유다를 빼더라도 열 한 제자가 있는데 하필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이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입니다. 왜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날 수 있었을까요? 거기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얘기를 들으니 남자들에 비해서 여자들이 입이 가볍답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전하면 빨리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 전하라고 예수님이 여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유머로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렸으면 그 다음에 가서 우리가 만난 예수님을 이웃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 끝나면 한주간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십시오. 입술로 증거하고 삶으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예배, 그것이 바로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한 주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완성은 순종입니다. 예배드리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은 말씀을 우리 삶에 실천해 나가는 순종이 바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1800년대를 전후해서 영국 교회와 영국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킨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6살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유명한 찬송가를 작시한 존 뉴턴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두 시간씩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예수 믿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영국에 만연한 악인 노예폐지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윌버포스는 이 노예폐지를 위해서 일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먼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설득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무려 46년 동안 그 일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썼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영국은 당시 노예무역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었으니, 그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들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결국 영국 의회에서 노예폐지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감을 때, “나 한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함께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라고 믿습니다.”라고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어찌 보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들고 삶으로 하나님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된 직후에 영국교회는 놀랍게 부흥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새신자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영국 국회의원의 1/3이 복음적인 신앙고백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예배란 이 한 시간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예배의 연장이요, 예배의 완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예배드리시겠습니까? 이제 1부 예배를 교회에서 드리셨다면 2부 예배는 집에 가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드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직장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예배를 드리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 정말 이제 사랑으로 예배하고, 기쁨으로 예배하고, 희망으로 예배하고, 삶으로 예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영광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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