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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님 공경에 푹 빠져 봅시다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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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연경씨가 쓴 <효도별곡> 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두 분의 노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오후 3시가 되면 두 분이 함께 만두집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바라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드실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방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라, 아마 옛날에 서로 사랑하던 사이로서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ꡒ첫 사랑ꡓ의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1주일에 한번씩 만나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 날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할머니는 자주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 날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안고 가는 할아버지. 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보였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ꡒ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ꡓ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ꡒ첫 사랑ꡓ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끼리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오후3시만 되면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습니다. ꡒ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 거야.ꡓ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의 가슴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ꡒ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 거야.ꡓ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물론 연로한 부모님을 생이별시켰던 자녀들의 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자녀들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살겠다고 결혼식에서 서약하신 노부모를 생이별시켜, 가슴에 한을 품게 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에 이런 아픔과 이런 외로움 속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보면 자기 자식에게는 아낌없이 투자하면서도 자기의 부모님에게는 인색한 자식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요즘 들어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를 버리고 이민을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아픔과 현실속에 우리는 오늘 어버이 날을 맞이했고 또 어버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그리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할까요?

첫째로,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1절)
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얼마나 강력한 표현입니까?  여기서 옳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맞다는 뜻입니다.’ ‘원리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기본원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갑니다. 저는 소방관이 불을 끄기 위해서 건물 위로 물을 뿜어대는 것을 본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물이 밑에서부터 위로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철학과 윤리에서 효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너무나 마땅한 일이고 옳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도 그렇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어긴다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2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십계명중에 5계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제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인간에게 말씀하신 계명 중에 첫 번째의 계명일 뿐만 아니라 오직 이 계명만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보되어 있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도덕이고 윤리이고 예의범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이 최고의 도덕이고 윤리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 엄하게 다루시고 심판하십니다.
출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출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신21:18절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18절)
신21:21절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21절)
우리 하나님은 부모의 말씀을 듣고 순종치 않는 자들을 완악하고 패역한 자들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를 다른 어떤 죄보다 더 중하게 다루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첫째로, 주 안에서 순종함으로 효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1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합니까? 주 안에서 순종함으로 효도해야 합니다. 효도는 곧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존경하고 잘 아는 조지 워싱턴대통령을 아시지요. 그의 어릴 때 꿈은 뱃 사람이 되고 마침내 선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장이 될려면 먼저 뱃사공이 되어야 하겠기에 그는 결단을 하고 짐을 꾸려 가지고 배를 타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 뵈었는데 뱃사공이 되겠다는 아들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 아들의 손을  잡고 계속 울기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워싱턴은 그 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내 꿈을 좇을 수는 없다.' 나의 꿈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래서 그는 자기의 꿈을 포기하고 다시 짐을 내려 놓고 어머니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기에 마침내 그는 미국에 유명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자녀된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통하여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부모님을 통하여 양육받게 하셨고 부모님을 통하여 한 없는 사랑을 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 순종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나와 동일한 신앙을 갖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부모님이 가진 것이 없고 나 보다 더 배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단의 도구가 되어 자식된 우리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다든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부정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까지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시어머니들 가운데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네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우리 집의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머니의 말씀대로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를 해야 하겠습니까? 전략적 후퇴를 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 순종해도 우상숭배에 대하여서 만큼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만큼은 절대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효도는 순종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조건 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2절)
부모를 순종하는 일에는 ‘주 안에서’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효도가 무엇입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1.부모님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할 때 공경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티마’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말의 뜻은 ‘높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낮춰 사랑하지 말고 수평적으로 사랑하지 말고 ‘높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낮춰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부모님을 불쌍히 생각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병에 걸렸어도 치매에 걸렸어도 부모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수평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높이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높이 사랑한다는 것이 뭘까요?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이 곧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궁핍했습니다. 그 바람에 에이브라함 링컨은 어릴 때부터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일평생 동안 받았던 학교교육은 다 합쳐도 일년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20세가 되기까지 도끼자루를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힘든 노동을 해야 되었습니다.

그런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링컨이 상원의원들 앞에서 취임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원의원들은 대부분 학벌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가문이 좋은 귀족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런 상원의원들이 배우지도 못했고 또 비천한 신분출신의 링컨을 대통령으로 섬겨야 하니까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링컨이 막 입을 열어서 취임연설을 하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조금은 거만한 듯이 보이는 상원의원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링컨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더니 자기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링컨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빈정대었습니다.
"이 구두를 누가 만든지 아시오? 바로 당신 아버지가 만든 것이오. 당신이 어쩌다 운 좋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당신 아버지가 신발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소."
그 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서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에이브라함 링컨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눈물은 아버지에 대한 수치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의원님, 내가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기 직전에 나에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 덕분에 제가 잠시 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졌습니다. 정말 우리 아버님은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아마도 이 가운데는 우리 아버님이 만드신 신발을 신고 계신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혹시 신고 계신 신발이 불편하시거든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물론 돌아가신 아버님의 기술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그래도 아버님의 어깨너머로 저도 기본적인 기술은 다 배웠습니다. 아버님이 만드신 신발에 대해서는 아들인 제가 책임지고 최선을 다해서 고쳐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졌습니다. 더 이상 링컨 대통령을 깔보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진정으로 공경하는 그 마음에 모든 사람들이 깊은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아버지가 아버지다와야 공경을 하고 어머니가 어머니다와야 공경을 하고 시어머니가 시어머니다와야 공경을 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면 아내가 아내다와야 사랑을 할 것이 아니냐는 반문과도 같고 아내더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면 남편이 남편 다와야 복종할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과도 같은 원리입니다. 다 이렇게 주장을 하고 생활하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가정은 무너지고 맙니다.
물론 부모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그부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무책임하다고 하는 것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모는 부모대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무리 무책임해도 그 무책임이 자녀의 무책임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와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 TV 홈쇼핑에 이색 상품이 나타났습니다. 이름하여 황금수의입니다. 안동포는 그 자체만도 수의가 수십만 원을 호가 하는데 거기에 99% 황금을 입힌 수의를 판다는 것입니다. 수천만 원짜리는 보통이고 안동의 한 삼베 회사는 1억 원짜리 수의를 상품으로 내 놓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다음 그 시신에 황금으로 된 수의를 입히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란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답지 않을지라도 존경하는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의 인격, 성품, 직위, 학식, 재산, 행위들을 따지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 있다면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합니다.

2. 부모님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이 나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아버지 야곱을 비릇해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초대를 받아 애굽으로 내려와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애굽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기 때문에 목축을 하는 사람들을 천민으로 생각했습니다. 창46:3절에 보면 “애굽 사람들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요셉의 아버지의 직업은 양과 소를 키우는 목축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을 자랑스럽게 애굽의 왕에게 소개합니다. 아버지와 형들의 직업도 당당하게 소개합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창47:3절)
생각해 보십시오. 총리 요셉의 아버지가 천민들의 직업인 양과 소를 키우는 목축이라면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어쩌면 총리로서의 권위에도 금이 가는 치명적인 사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자기의 출신과 부모와 형들의 직업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자랑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요, 복 받은 비결입니다.

여러분, 누가 효자입니까? 자기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부모가 잘났던 못났던, 배웠던 못 배웠던, 세련되던 촌스럽던, 부모는 나를 키우신 부모이기에 자랑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가장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분이 부모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못 배웠다고, 못 났다고, 촌스럽다고, 지저분하다고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잔소리한다고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또 부모가 짐이 되어 자신들이 행복할 수 없다고 부모를 귀찮게 여기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 체면 때문에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 절대 축복 받지 못합니다.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식을 하나님께서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요셉이 이렇게 큰 영예와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애굽이 싫어하는 직업을 가진 아비 야곱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 부모공경의 축복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3절)
여기서 잘 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타브`인데 그 뜻은 형통한다, 막힘이 없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잘됨과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잘되고 장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록펠러입니다. 물론 그의 인생에 오점도 있었지만 그는 세계 제일의 갑부로 98세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늘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첫째, “너는 수입의 십일조를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라."
둘째, “너는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언제나 제일 앞자리에 앉도록 해라."
셋째, “너는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을 때 목사님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제나 들어라."
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했던 록펠러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98세까지 장수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또 성경을 보면 부모를 공경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발가벗고 누워 주무실 때에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줌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냈던 함의 후손은 저주를 받았지 않습니까?

또 이방여인으로서 젊은 날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던 어머니를 공경하여 보아스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게 되는 축복을 받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잘됨과 장수의 축복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푹 빠져 봅시다. 다른 일에 푹 빠지 말고 부모님을 존경하고 자랑하는 일에 푹 빠져 봅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처럼 가장 확실한 투자가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효도하십시오. 기회를 잃기 전에 효도해야 합니다.
옛 글에 “나무가 아무리 가만히 서 있고 싶어도 바람이 가만히 나두지 않고 흔들어 주며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오래 봉양하고 싶어도 부모가 기다려 주지를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효도 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님도 지난 4월 24일 주일 저녁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온 자녀들과 함께 하는 중국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신발도 준비해 놓으시고 모자도 사 놓으시고 그렇게 마음 설레며 여행을 준비하셨는데 그 여행 일주일 전에 쓰러지셨습니다. 서울에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 서울 병원으로 올라오시면서까지 운동화를 챙기셔서 올라 오셨는데 신어 보지도 못하고 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아버님이 운명하시기 하루 전 중 환자실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귓전에 목매어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가 있었기에 내가 오늘 내가 여기 있게 되었고 아버지의 기도대로 이렇게 오륜교회가 지어졌노라”고 “평생을 위하여 기도해 주신 아버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며 목매어 외쳤습니다.
이제 저는 부모님이 모두 떠나셨기에 이제는 부를 수도 없고 여행을 시켜 드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효도는 살아계실 때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 전화 한번 더 하시고 용돈도 좀 드리시고 부모님에게 순종하시고 부모님을 인정해 드리시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편안하게 해 드리십시오. 그리고 오늘 어머니를 부를 수 있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이날이 되면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신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기도해 주신 그 부모님의 은공을 생각하며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습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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