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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다음 세대와 다른 세대 (삿 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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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학자 잉크하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세대별 가치관의 격차가 가장 큰 나라는 한국이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세대간의 차이가 심한 나라가 없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세대간의 갈등과 차이가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정말 세대간의 차이가 큰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번 총선을 통해서 다시한번 세대간의 갈등과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였습니다.

세대에 따라서 가치관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사람들을 세대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기성세대, 신세대라는 말이 나오고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세대를 낀 세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쉰세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세대에 속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사회학자들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이 세대를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로 구분하기도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텔레비전의 채널을 바꿀 때마다 무릎 꿇고 다가가서 채널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또 아날로그 시대에는 우리가 밥을 먹듯이 시계에도 밥을 주어야만 시계가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디지털 시대에는 리모콘을 가지고 앉아서 마음대로 채널을 바꿉니다. 밥을 주지 않아도 시계는 더 정확하게 잘만 돌아갑니다.

또 X세대 N세대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이것은 젊은 세대들을 구분하는 말입니다. 
X세대란? 65년부터 76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로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푹 빠져 사는 젊은 세대를 말합니다.
N세대란? 77년부터 97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로 디지털 기술과 함께 성장해서 디지털 기기를 능수 능란하게 다를 줄 아는 디지털 문명 세대를 말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컴퓨터가 없으면 못삽니다. 하루라도 검색을 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선거철만 되면 방송에 자주 오르내리는 386세대가 있습니다. 386세대란 나이가 30대면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킵니다. 그 밖에도 모리시계 세대, 보릿고개 세대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세대라는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세대간의 갈등과 차이가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문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질보다는 양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5000원 짜리 설렁탕을 먹고 후식으로는 자판기에서 나오는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젊은 사람들은 500원짜리 컵 라면을 먹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 가서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십니다. 핸드폰을 보세요. 10대, 20대는 가방이나 청바지 뒷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그런데 40대 이상 되신 분들은 경찰관처럼 허리에 무전기처럼 차고 다닙니다. 전화를 걸 때에도 10대, 20대는 단축 다이얼링을 씁니다. 그런데 40대 50대가 되면 일단 안경 걸치고 호주머니에서 수첩 꺼내서 보고 일일이 번호를 누릅니다.
세대간의 차이는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때로는 세대간의 차이가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대간의 차이가 역사 발전의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 서로 다른 두 세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세대가 함께 공존하며 살고 있듯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두 세대가 나옵니다. 10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10절)

그 세대와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가 나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세대입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는 기성세대를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오프라인(off-line)세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났습니다. 길게는 40년이상 광야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를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호렙산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으며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평생을 전쟁에 참여하였던 전쟁을 아는 세대였습니다. 어느 정도 주요 도시를 점령하자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하면서 나라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6.25를 거치며 4.19를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다른 세대가 나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도 먹어본 적이 없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셔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적다운 기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농사를 짓고 양을 치는 평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 별 고생을 모르고 자란 세대였습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두 세대의 갈등과 대립이 50여년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이 너무나 철부지와 같습니다. 화염병을 던지기도 하고 촛불시위를 하는 그들이 정말 위험하고 불안한 존재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공산주의의 허구를 알아?”  “우리가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나라인데 노인을 폄하해” 라고 반응합니다.
반면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를 향하여 냉전적이며 수구적이라고 말합니다. 고리타분하다고 말합니다. 구닥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세대간의 갈등이 있어 왔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을 아는 세대가 세상을 떠난 이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고 기적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였던 전쟁을 아는 세대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이 문제입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의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7절)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그들이 여호와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친히 경험한 전쟁을 아는 세대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10절)
이전 세대가 다 죽고 나자 결국 하나님 없는 세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1절부터 15절까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던 세대의 비참함이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11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11절)
여호와를 알지 못한 세대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타락한 죄악의 본성을 따라 악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②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다.(12절상)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12절상)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존재의 원인이요 민족적 자부심의 근거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하여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버리는 배은망덕행 행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까? 그들을 구원하여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적과 이사를 베푸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 앞서 행하시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이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총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③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이셨다. (14절)
이렇게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14절)

④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매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다(15절)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괴로움이 심하였더라”(15절)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여호와를 버렸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인바 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심으로 괴로움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친히 경험했던 그 조상들이 오늘 자기들의 후예들이, 아니 자기의 자녀들이 이런 비참과 저주 가운데 빠지게 되리라고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게 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여호와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되고 재앙을 받게 되어 괴로움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남의 애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자녀들의 애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자녀들이 이런 비참과 저주 가운데 빠지게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여호와를 버리고 돼지 머리 앞에 절을 하고,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을 데려다가 푸닥거리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놓이게 되어 건강도 잃고 재물도 잃고 사람도 잃고 괴로움 가운데서 한숨짖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세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다음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분명이 세대간에 갈등은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세대간에 갈등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여호와를 모르는 세대 다른 세대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는 세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목전에서 악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세대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대상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남으로 고통스러운 괴로움을 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다음의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1. 마땅이 행할 길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면서도 다음 세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대부분의 날들을 전쟁하며 다 보내었습니다. 영적인 긴장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때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전쟁이 그쳐져 가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가 서서히 칼을 내려 놓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광야와 전쟁터에서 보낸 그들은 생전 처음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집을 짓게 되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또 생전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내지 아니하고 남겨둔 자들이 종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신 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합니까? 이래 저래 종들로 인하여 생활이 편해지고 집을 짓게 되고 농사를 짓는등  땅을 가꾸는 일에 빠지게 되자 그들 자신들은 신앙을 유지하며 살았지만 후손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신앙교육에 열심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좀 살만 하자, 배가 부르자, 돈이 많아지자, 종들을 부리게 되자 마음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조상들과 선배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가난만은 유산으로 물려 주지말자며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오직 일만 해왔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는 골병이 들 정도로 일만 하며 자라온 세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제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앞두고 있는 경제대국 15위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먹고 살만하게 되자 좋은 자가용 굴리게 되고 큰 집을 짓고 거하게되고 여가를 즐기게 되자 이렇게 세상재미를 맛보자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이 멀어져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자녀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본이 되지 못하고 마땅히 행할 바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게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당신은 카피되고 있습니다.’라는 책도 나왔지 않습니까?
어느 조그만 자연학습 농장에서 유치원 선생님이 꼬마들을 데리고 자연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묻습니다.
<고구마는 언제 캐지요?>
그러자 아이들이 대답을 합니다.
<가을에 서리 올 때요.>
<그러면 고추는 언제 따나요?>
아이들은 또 대답을 합니다.
<빨갛게 물들었을 때요.>
선생님이 또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땅콩은 언제 캘까요?>
그러자 꼬마들이 아무도 대답을 몰라서 조용해졌습니다.
이때 한 꼬마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주인이 없을 때요!>
그 아이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녀는 알게 모르게 부모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헤리 채핀(Harry Chapin)이 지은 한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제목은 ꡒ요람 속의 고양이ꡓ입니다.
어느 날 내게,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왔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홀로 밟아야 할 단계가 있었고, 지불해야 할 계산서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또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말도 배웠습니다. 나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기에 아이가 언제 그런 것들을 배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늘 내게 말했습니다. ꡒ아빠,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래요. 아시겠죠? 난 반드시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ꡓ 아이가 물었습니다. ꡒ아빠 언제 집에 오실 거예요?ꡓ 내가 대답했습니다. ꡒ글쎄, 바빠서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빠가 시간이 나면 그 때 놀자꾸나. 그 때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을 거야.ꡓ 어느 날, 열 살이 된 아들이 말했습니다. ꡒ아빠, 공을 사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은 저랑 함께 놀아주시겠어요? 공 던지는 법도 좀 가르쳐 주시고 말이에요.ꡓ 내가 대답했습니다. ꡒ얘야, 오늘은 안 된단다. 오늘은 할 일이 너무너무 많거든ꡓ 그러자 아들은 알았다며 혼자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ꡒ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야.ꡓ 아들이 물었습니다. ꡒ아빠 언제 집에 오실 거예요?ꡓ 내가 대답합니다. ꡒ글쎄, 오늘도 바빠서 늦을 것 같구나. 하지만 이 다음에 아빠가 시간이 나면 그 때 아빠랑 함께 지내자꾸나. 그 때 우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야.ꡓ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아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ꡒ아들아!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리 외서 내 겉에 앉아 보렴.ꡓ 아들이 머리를 저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습니다. ꡒ아빠! 제게 지금 필요한 건 아빠 자동차 열쇠랍니다. 물론 빌려주시겠죠? 그럼 나중에 뵈요.ꡓ 세월이 자꾸 흘러 나의 머리가 점점 희어져 갑니다.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ꡒ아들아! 언제 집에 올 거니?ꡓ 아들이 대답합니다. ꡒ글쎄요. 아버지 바빠서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가 한가해지면 그 때 함께 지내도록 해요. 아셨죠? 그 때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예요.ꡓ 그 후, 더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은퇴하여 집에 있은 지 오래 되었고, 아들은 먼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느 날, 나는 아들이 너무나 보고파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ꡒ아들아! 너만 괜찮다면 널 한번 보고 싶구나!ꡓ 아들이 대답합니다. ꡒ아버님! 저도 아버님을 무척 뵙고 싶습니다. 그런데 통 시간이 나질 않습니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요즈음은 세상 살기가 너무나 힘들고 바쁘답니다. 게다가 지금 제 아이들이 심한 감기에 걸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양해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이해해 주십시오.ꡓ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ꡒ아빠!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래요. 아시겠죠? 난 반드시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ꡓ 그 아이는 꼭 나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 아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식들은 부모를 배우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싸우는 것을 보게 되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게 되고 싸우는 광경을 자주 보게되면 무의식중에 폭력에 익숙해져가고 가정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며 급기야는 가출하는 원인이 되기도합니다.
또 자녀들 앞에서 욕석, 불평, 불만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직장 상사나 이웃 친구에 대한 욕설과 불평은 자녀에게까지 공동의 적개심을 갖게 합니다. 특별히 자녀들 앞에서 교회의 목사 장로등 교인들을 욕하는 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교회를 떠나게 만듭니다.
또  자녀들 앞에서 <돈, 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소리가 머리에 박힌 자녀는 밖에 나가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무서운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또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극단적인 말을해서는 안됩니다.
<나가버려> <죽어버려> <자식이 원수야 > <너 죽고 나 죽자>등의 극단적인 말은 자녀들의 심성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오늘 당신은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세대차이는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들 자녀만큼은 여호와를 섬기며 경외하는 자들이 되게 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자의 가장 기본인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대하여서만큼은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들의 건강문제, 진학문제, 취업문제, 결혼문제 등, 세상 살아가는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는 자녀들에게 돈을 주기 전에 돈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잘살기 위한 것보다 바르게 살도록 먼저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이미 다 큰 자식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냥 방치해 두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자녀의 신앙문제를 놓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며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자녀들을 가장 축복하는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을 보십시오. 그는 자녀들이 잘못되는 것을 알고 있음ㄴ서도
<만종>을 그린 <밀레>가 파리에 공부하러 갈 때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든지 믿음이 없어진다든지 하는 것보다 오히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화가가 되기 전에 먼저 올바른 크리스천이 되어라. 그릇된 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림을 그리려거든 영원을 위해서 그릴 것이며 늘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 소리가 들려 올 것을 생각하고 살아라.”
하나님의 심판 날을 기억하도록 하면서 교육을 시켰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밀레는 그렇게 영향력있는 화가가 된 것입니다. 자녀들의 영적인 모습을 더 이상 방치하면 안됩니다.

2.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 오늘 젊은이들이 술과 쾌락에 찌들어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방황하고 있습니까? 왜 너무나 쉽게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끊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호수아가 생존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보는 자들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전쟁을 알던 기성세대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의 신앙은 체험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알지 못하던 신세대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된 우리는 이 땅의 자녀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체험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로 인하여 다른세대가 아니라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할 수 있을까요?
말씀을 듣게 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게 하십시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십시오. 의의 말씀이 오늘 자신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우리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다음세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세대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가치관이 전혀 다른 세대, 감각적인 세대. 자신의 야망만을 위해 살아가는 다른 세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을 보이며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5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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