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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은 행복의 생산지 (창 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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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 2: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부부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접한 아름다운 모습들을 오래오래 간직하며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 장소가 산이나 들이든지, 여행지나 각종 행사장이든지 관계없이 자신에게 아름답게 다가온 모든 모습들을 사진 속에 담아둡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는 어디를 가든지 카메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언제나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납니다.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아름다운 모습들을 촬영합니다.

그런데 만일 인간의 삶을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촬영하신다면 어떤 모습을 촬영하실까요? 더 나아가 하늘나라 사진전을 개최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선발한다면 어떤 모습의 사진이 최고의 상을 수상할까요? 그 모습은 필시 부부의 사진일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하는 모습, 부부가 함께 사역하는 모습, 부부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모습, 부부가 함께 수고하는 모습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후 제일 먼저 기대했던 인간의 아름다움은 부부가 함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과 안식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통하여 피조물의 울타리를 치신 후 그 안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가정을 이루며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담과 하와 부부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모습을 바라보기 원하셨습니다.

창 2:18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이라는 남자의 창조가 미완성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서로 사귐이 있어야만 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 사귀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부로 구성된 가정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갈 때 아름답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가정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부부 중심의 가정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부부가 이루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곳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의 독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남자와 여자들을 향하여 부부로서의 가정의 아름다움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곳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쉼터이며, 안식처이고, 작은 천국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온 세상이 무너집니다. 가정이 바르게 세워지면 온 세상이 바로 섭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가정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지금 우리의 가정은 죄로 인해 성경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식처인 가정이 오히려 제일 큰 상처를 주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향한 소망이 사라져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가정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 6일째의 마지막 순간에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간의 마지막 날인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창설하신 가정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7일째 날에 안식에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창 1:27-28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 사람은 곧 부부로서 가정 중심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실 때, 이 사람은 “단수”로서 한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은 “남자와 여자”라는 둘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때, “그들”은 바로 한 사람을 구성하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이들이 받은 복은 단수로서 하나의 “복”을 나타냅니다. 결국 부부로 구성된 “한 가정이 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가정의 창조 목적입니다.

2.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부부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줄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된 부부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가는 최소 단위입니다. 부부는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한 사역을 위한 한 개체입니다. 둘이서 한 사역을 행하도록 창조하여 세상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의 가정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을 때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십니다. 결혼한 남자나 여자가 부부로서의 역할을 떠나서 행하는 사역은 그 열매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안목에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부부가 함께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부부로서의 사랑”을 버리고 남자나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말씀을 따라 세상 이웃을 아무리 많이 사랑한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온전한 사랑으로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말씀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세상 이웃을 향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세상 일터에서 수고하며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나 총각들은 결혼을 최고의 소명과 꿈으로 삼고, 결혼을 향하여 움직여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첫 번째 요구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일일까요? 아니면 결혼일까요? 창 2:18의 말씀은 하나님의 첫 번째 요구가 아담의 결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창 2:19에서 요구하신 일도 결혼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꿈은 모든 남자와 여자가 지녀야 할 최우선의 꿈이어야 합니다. 결혼을 배제한 다른 꿈들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사람은 결혼한 부부의 관계를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 어느 것으로도 부부의 행복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부부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것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결혼을 첫 번째 사역으로 결정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결혼을 통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연애당이 되어야 하고, 결혼 중매 장소가 되어 마땅합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가 연애당이라는 비난 받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남녀의 문제가 나타날 때는 비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연애당의 모습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방향에 있어서의 연애당은 교회만이 지닐 수 있는 특권이며 의무입니다. 오히려 장려하며 감독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인생 최고의 행복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부부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이 아름다움과 행복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나 상태는 지상에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연애당으로써 한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여 영적 생명을 살리는 구원사역 다음으로 중요한 사역입니다.

창 2:18-20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 남자와 여자의 결혼 사역에 헌신하고 계신지 보여주십니다. 창 2:18에서 하나님은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하시며 아담을 결혼시켜 하나의 가정을 구성하게 하시겠다는 강한 의욕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창 2:19-20에서 그 중매쟁이 작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창 2:19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물의 이름을 짓는 일을 시키고 지켜보시며 아담에게 맞는 배필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이 가장 행복하게,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배필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창 2:20에서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그 결과를 표현합니다. 직역을 하면,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다. 돕는 짝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입니다.

하나님도 세상 어느 곳에서도, 세상 어떤 존재 속에서도 아담에게 기대되는 행복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부부가 이루는 가정의 행복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일을 시키셨던 것은 그러한 존재를 찾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창 2:21-25에서 친히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부부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결혼과 가정의 행복을 최고의 사역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한 남자가 마치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는 것처럼 평생토록 일을 하며 최고의 열매를 거둔다 할지라도 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평강과 안식이 사라진 인생일 것입니다. 또한 만일 한 여자가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최고로 나타내며 세상에 이름을 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최고의 수준에 오르게 한다 할지라도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도 평강과 안식이 사라진 인생일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부부의 행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부부의 행복의 중요성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 할지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건 결혼식만큼 중요한 의식이 없습니다. 결혼을 최고의 의식으로 여기지 않는 공동체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비록 자신은 이혼 등 각종 어려움으로 깨어진 부부 상태로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자녀들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봅니다. 그만큼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부의 행복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결혼과 가정의 행복을 최고의 사역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결혼을 향한 사역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창 2:19-20의 말씀은 결혼을 바라보는 아담이 결혼의 소망 가운데 홀로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결혼 전의 아담의 모든 사역은 결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결혼 전의 모든 움직임을 결혼과 관련시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인도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결혼한 가정들도 결혼 관계를 전제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며 동물의 이름 짓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모습은 창조가 완성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부부의 사귐이 없이 행해지는 일은 기계적인 하나의 작업일 뿐입니다. 독처하며 동물의 이름을 짓는 모습은 기계적으로 명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부부의 사귐을 통해 서로 나눠지지 못합니다. 그 일을 함께 즐거워할 사귐의 상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눈에는 보기에 좋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아직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결혼 후 깨어진 가정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임을 인정하고 회복의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위해 독신으로 사는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의 내면 깊이 숨겨진 모든 일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기에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없는 모습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습니다. 아담은 홀로 동물의 이름을 지으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보며 돕는 배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자신의 독처하는 삶이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일을 통하여 돕는 배필의 진정한 존재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돕는 배필과 함께 가정의 기능을 다할 때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사춘기로부터 결혼 전까지의 기간이 아담의 독처 기간의 답습입니다. 이 기간동안 돕는 배필의 존재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돕는 배필과 함께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아름다운 처소를 꿈꾸는 시기입니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독처하는 기간 동안에 자신이 하는 일을 감당하며 자신의 돕는 배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이성에의 관심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나타나는 이성에의 관심과 표현도 하나님 안에서, 성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오히려 더 신앙적인 것입니다. 결혼과 가정의 행복을 최고의 사역으로 삼는 성도라면 자신이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곳에서 이성에의 관심이 정상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독처하는 기간 동안에 보여준 모습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처녀와 총각들을 향하여 결혼을 향해 나아갈 사명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는 불신앙의 행위라고 지적합니다. 자신의 직업, 자신의 학업, 자신의 사명에 아담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이 결혼을 꿈꾸는 자의 삶입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지 않는 처녀 총각들은 결혼의 꿈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삶을 지켜보시며 배우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미 부부 관계가 깨어져 고통 받고 있는 부부와 가정이라면 지금 이 순간부터 부부의 회복과 가정의 회복을 향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움직임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부부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부부의 고통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며,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그 회복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깨어진 부부들을 반가이 맞이하시며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이렇게 깨어진 부부와 가정의 회복을 위해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세워졌습니다.

4. 돕는 배필과 함께하는 가정이 인생 행복의 유일한 생산지이다.

깨어진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은 오히려 깨어진 부부 당사자의 슬픔보다 더욱 큰 슬픔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상실된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깨어진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회복을 향하여 나갈 때 그분의 모든 사랑으로 함께하심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부부의 축복을 누리는 가정은 깨어진 가정의 아픔을 함께 감당하며 그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에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과거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돕는 배필과 함께하는 부부가 이루는 가정이 행복의 생산지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모든 가정이 오늘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의 유일한 생산지인 가정 회복, 부부 회복을 향해 나가도록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돕는 배필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때를 가장 아름답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 배우자와의 관계회복은 인생의 최대 과제이며, 하나님의 최우선의 명령입니다.

우리들이 부부의 회복, 가정의 회복을 원한다면 돕는 배필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젊은이들이 결혼을 꿈꿀 때도 역시 돕는 배필의 의미를 알고 결혼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배필(네게드)”이란 단어는 “정면, 즉 반대쪽, 상대자, 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배필이라는 단어는 “네게드(짝)”에 전치사와 어미가 붙어 “케네겟도(그 남자를 위한 짝)”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어미가 3인칭 남성으로서 그 남자, 아담과 일치하는 짝이라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배필” 앞에는 “그를 위하여 돕는”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돕는 배필은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입니다. 아담에게 일치하며 조금의 어긋남도 없고, 맞지 않는 부분이 없는 조력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전체중의 한 부분으로 표현되는 존재였습니다. 아담이 완전해지려면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하와였습니다. 남자와의 사귐의 대상으로서 여자는 가장 잘 맞는 짝인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필”이 “짝지어진 존재의 다른 한 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등한 인격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짝이 합쳐져 하나가 되어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여자의 역할은 그 사역 명령을 수행하는 “그를 위하여 돕는” 짝입니다. 그 남자를 섬기는 종이 아닙니다. 남자를 위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은 남자의 종과 같은 위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돕는 배필은 돕는 짝으로서 남자를 완전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를 완전하게 만드는 배필입니다. “돕는(에젤)”이라는 단어는 “둘러싸다, 방어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원조, 도움”을 뜻합니다. 남자가 하나의 목표를 수행하려면 모든 면에서 배우자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적합한 협력자, 잘 맞는 조력자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반반씩 기여하는 관계입니다.

부부는 상하의 종속관계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입니다. 머리와 심장의 역할 차이와 같습니다. 도움 받는 짝인 남자는 하나님 앞에 책임의 주체는 되지만 도움을 주는 짝보다 위치가 높지 않습니다. 남자는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만물에게 명령을 수행합니다. 여자는 이 남자의 반쪽으로서 그 남자와 일치되게 행동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채움 없이 만물을 향해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돕는 배필과 함께하는 가정의 행복을 책임지십니다. 돕는 배필과 함께하는 가정이 행복의 생산지입니다.

동기나 끼리끼리의 모임이 부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부중심의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즐거움을 누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을 창설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우리가 사모해야 할 가장 귀한 처소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가정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에게 복과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가정을 사모하며 기다리며 순종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추진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가정을 통하여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볼 때 가정을 통하여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임을 알게 하십니다. 한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복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만이 안식을 누립니다. 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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