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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만난 예수 (요 7: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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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이번 홍수에 강둑이 무너져 농사를 망쳤기 때문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다시 둑을 쌓기로 하자는 데는 모든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돈과 인력을 어떤 식으로 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제의합니다.
“흙과 돌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하니 수레가 둘인 사람은 하나를 마을의 공동 재산으로 내놓읍시다.”
다른 사람이 맞장구 쳤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수레를 끌 소나 말도 필요하니 두 마리씩 있는 사람은 한 마리씩 내놓는 게 좋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하면서 박수까지 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하니 닭이 두 마리 이상인 가정에서는 한 마리씩만 내놓기로 합니다. 그러면 저도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내놓겠습니다.”
갑자기 회의장이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도 찬성하는 사람이 없답니다. 왜 일까요?
그 곳에 모인 사람 중에는 말 두 마리나 소 두 마리 또는 수레를 둘 이상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닭은 누구나 두 마리 이상씩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없는 내 놓자는 의견에는 박수치며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어서 그것 내놓아야 한다는 것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을 공동의 일은 동시에 그것은 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강둑을 다시 쌓지 않으면 너 뿐만 아니라 나도 농사지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과연 “이웃은 나에게서 누구며, 나는 이웃에게 누구인가?”

그것은 신앙에서도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날 위해 죽으셨다.”에서는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다가도,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는 이 말씀에는 침묵합니다. 그리고 계산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며, 나는 예수님에게 누구인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무리 중에 서서 외치시는 예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뒤에 숨어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 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아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책잡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서서 외치셨습니다. 숨어서 중얼거리지 않으셨습니다. 한 밤 중 아무도 모르게 돌아다니며 대자보 붙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노동 운동가처럼 잡혀 가는 게 두려워 숨어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 중에 서서 외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확신에 찬 외침이었습니다.
“내다. 나를 믿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28절,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나니…….” 29절,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참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당신 스스로 만들어 진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요,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심 분이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예수님은 온 인류가, 바로 여러분과 저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두려워 숨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어찌 구석에 앉아 가만히 계실 수 있겠어요? 당신 자신이 생명인데, 당신 자신이 구원인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암이든지 고칠 수 있는 약을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면, 그가 발견한 그 약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약을 대량으로 만들고, 선전하고, 그래서 암에 걸린 사람들이 그 병에서 고침 받아 건강해지고……. 뭐,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보세요. 목마른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한 가지 37절, “내게로 와서 마셔라” 누구에게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왜?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생명이요,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누구든지” 누구든지 입니다. 어디 있든지, 무엇을 했든지, 그런 건 상관없어요. “너희가 전에는 죄의 종이더니” “너희가 전에는 마귀의 자식이더니”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씀? 죄의 종, 마귀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오너라!” 그겁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으셨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냄 받은 사람임을 믿습니다.
왜 보내셨을까요?
요한복음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 즉 보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또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외치셨듯이,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하고 외쳐야 합니다.

요한복음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시는지를 세상들이 알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요, 구원이시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서서 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고 있어요. 외치기는커녕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있어요. 오히려 외치기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아직도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께서 서서 그렇게 외치셨는데…….

어떤 사람,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40절)
“그 선지자”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와 같은 선지자” 그것은 모세와 대등한 예언자의 직책을 말하는데 이스라엘은 이 직책을 통해 완전히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신명기는 이 예언자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입이라고만 말함으로써 예언자의 기능에 대해 약술합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표상에 따라 모세 스스로가 자기의 직책을 어떻게 수행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모세는 중보기도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자 상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신명기에서 모세가 말하는 그 선지자는 일반적인 선지자가 아니라, 고난 받은 종 곧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 선지자를 말라기 4:4-6에 근거해서, 그 선지자는 메시아가 아니고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오실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하자면 그 선지자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께로 인도하는 길잡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어 외치라 하신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본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 본 것은 바로 그런 문맥입니다. 즉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 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훈이나 행하시는 것을 보면 보통 사람 이상입니다. 가르침이나 하신 기적들을 보면 메시야 급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인간의 생각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선지자로 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그런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인 것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41절,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그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임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인정은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절대적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 어느 정도 예수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냥 두고 보자”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삭개오.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남에게 빼앗은 것 있으면 몇 배로 갚고,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바디매오.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 겉옷도 벗어버리고 예수님 따라 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잘 따라가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고백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알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도 명확하게 압니다. 그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가르치기도 합니다. 다른 복음을 듣게 되면 분명히 일어나서 이단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객관적으로만 알고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객관적 신앙은 아는 것만 많습니다. 그러나 헌신이 없습니다. 뒷짐 지고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알기는 아는데 내 삶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하고 말하면서도 저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게 하시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는커녕 언제나 염려 가운데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한 숨만 쉬고…….
세상의 지식은 많이 아는데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많이 실천하는데 그 중요성과 핵심이 있습니다. 신앙은, ‘나’라는 존재와 ‘나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부딪쳐 오고, 거기서 어떤 관계가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1절 하,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구약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가 눈에 보이는 두 가지 조건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과 베들레헴 탄생입니다. 42절,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은 사무엘하 7:12 이하와 미가 5:2에 근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릿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2:1, “헤롯 왕 때 예루살렘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고 불렀던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름이 많은 경우 그가 주로 살았던 지명을 붙여서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경배했고,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 애굽으로 피하셨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예수님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시기는 했지만,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 예수”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는 대로라면 예수님은 구약이 말씀에 합당한 분이 아닙니다. 메시야는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무지요, 무관심이요, 편견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 할 것은, 예수님을 반론하는 자들은 성경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랜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율법의 근거하여 예수님을 반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신 분 완성 하신 분이신 줄 몰랐던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 역시 성경을 인용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에베소서 6: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경의 검입니다. 검, 그것은 대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검은 잘못 다루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기적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

44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니” 아마 45절을 보면 그들은 하속들 즉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사람은 하속들이 아니라, 그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였던 것입니다.
이 하속들은 예수를 잡아오라고 보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잡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예수님 가까이 있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평소 같으면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 할 수도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예수님 가까이 가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혹 구경으로 가면 모를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잡아오게 하는 지 그 까닭을 알고자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예수님의 행동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대제사장, 바리새인, 그들을 보낸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고 말합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어느 누구든, 예수님을 눈여겨보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다 보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디서 난다? “들음에서”
하속들의 이야기를 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너희도 미혹 되었느냐?” “너희도 미혹되었구나” 그것은 감탄의 아니라 경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니 너희도 미혹 되었구나”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진실을 발견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하속들(아랫사람), 가나의 혼인잔치에 보면 종들, 그리고 수많은 병든 자들과 소외된 자들…….
그렇다고 예수님이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진 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아랫사람과 종들, 이들은 그들 인생에서 목마른 사람들이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편견 없이 예수님을 보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치유해 주실 예수님으로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거지 바디매오가 목마름으로 예수님께 나왔을 때 생수 마셨습니다. 부자 삭개오도 목마름으로 예수님께 나왔을 때 생수 마셨습니다. 그러나 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나오긴 했지만 목마름이 없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때까지 예수님처럼 말씀하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겉모양뿐입니다. 입으로만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영적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가설이 아닙니다. 예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가 아닙니다. “그럴 것이다.”가 아닙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되는 진리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태초에 “빛이 있어라” 하심에 빛이 생겨났고,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시니까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사랑에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말에는 벌, 곧 대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어기면 벌금을 내야하고, 때로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다행히 죽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죽음이라 할 수 있는 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고 또한 사랑하게 합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사랑으로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돌로 쳐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여 의인이 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맹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보게 했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이 그의 아버지를 불러 사실을 확인합니다. 아버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들도 장성했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시인하면 출교 당할 것이기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 당국자들은 그 장본인들 불렀습니다. 그리곤 말했습니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그 말을 들은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이 말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교회에 대해 수군수군, 그런 것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기독교의 승리, 믿음의 승리는 “내가 과거에는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이 떠져 보고 있습니다.” 이 말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저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하고, 그분의 권위 있는 생명의 말씀, 사랑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나가서 외치십시다.
“여기에 생명이 있다. 여기에 구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소망이며, 기쁨이며, 구원이며 생명 되신다.” 아멘.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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