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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행복한 부부의 사랑고백 (창 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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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1. 하나님은 부부가 서로의 하나 됨을 고백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 관심 대상은 우선적으로 한 가정을 이루는 부부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을 향한 중매사역이 천지창조 이후 하나님의 제일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먼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아담에게 동물의 이름 짓는 일을 시키신 후, 그 모습 가운데서 아담의 돕는 배필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담의 일 자체에서는 돕는 배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히 아담의 몸에서 여자인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처럼 최초의 모습에 있어서, 남자는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셨던 존재였고, 여자는 아담에게로 이끄심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남자는 일을 향한 자로 출발하였습니다. 여자는 이끌림 받는 존재를 향한 자로 출발하였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일을 통해 여자를 만나러 가는 자이며, 여자는 자신의 존재 확인을 통해 남자를 만나러 가는 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행하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이성교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 전의 모든 만남은 이성교제입니다.

성경에 “이성친구”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사용되는 “이성친구”라는 용어는 타락한 인간의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한 교묘한 용어의 왜곡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성을 의식해서 특별하게 이성이라는 용어를 붙인다면 이미 이성친구가 아닌 “이성교제”의 영역 속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목적을 고려할 때, 결혼 전의 남녀 관계는 모두 “이성교제”입니다. 모든 미혼 남녀사이의 만남은 하나님의 명령을 함께 수행할 자를 찾는 “이성교제”입니다.

이성친구일 때는 상대를 향한 성적인 욕구나 성적인 요구나 성적인 감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 전의 모든 남녀관계는 상대를 향한 성적인 욕구나 성적인 요구나 성적인 감정을 기본 배경으로 깔고 있기에 이성교제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녀사이의 이러한 성적인 욕구나 요구나 감정은 정상적인 것이며 바른 것입니다. 이러한 성적인 성향이 없다면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은 실패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인간의 타락한 마음의 지배를 받을 때는 성적인 범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이끌릴 때는 자신의 배필을 만나게 하는 주요 기능이 됩니다. 또한 부부 사이의 온전한 하나 됨을 이루어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을 향한 각종 성향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향을 사용하여 우리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향을 사용하여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부부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게 하십니다.

창 2:21-23의 말씀은 남자와 여자의 이러한 성적인 성향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창 2:21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라고 하시며 남자의 성적 성향을 알게 하십니다. 창 2:22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하시며 여자의 성적 성향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창 2:23은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라고 하시며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성향이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남자의 성적인 성향과 여자의 성적인 성향이 서로 만날 때, 서로를 자신과 한 몸 된 자라고 사랑을 고백하는 부부간의 고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부부가 서로의 하나 됨을 고백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부부 둘은 곧 하나입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일치하는 짝과 함께하는 부부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결혼하여 하나 된 부부의 삶”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결혼한 부부 관계로부터 출발하는 인생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남자와 여자의 성향을 알고, 그 성향을 바라보며 자신과 한 몸 된 자라고 사랑을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남자는 일 중심의 사고와 삶을 중심으로 돕는 배필을 찾아다닌다.

먼저 하나님은 남자의 성향을 알게 하십니다. 창 2:21은 남자의 모습을 “갈빗대를 하나 잃고서 잠자는 자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아닌 잠자는 숲 속의 왕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돕는 배필을 만나기까지 잠자는 자의 모습으로 머물게 하셨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성향과 모습을 무시하고 무작정 배필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활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돕는 배필을 만나기까지 잠자는 자의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아담의 독처하는 모습을 좋지 않게 보신 분은 아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에 대한 아담의 평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돕는 배필을 만나기까지 동물의 이름을 짓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역을 통하여 돕는 배필의 형상을 그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돕는 배필을 만나게 하기 위하여 그로 깊은 잠에 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살로 그곳을 채우셨습니다.

이때까지 아담이 경험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외적인 경험으로서 동물의 이름을 짓는 하나님의 사역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경험입니다. 둘째는 내적인 경험으로서 자신의 사역의 기쁨을 함께 나눌 대상을 만나지 못한 외로움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경험입니다. 셋째는 육체적인 경험으로서 갈빗대를 제공하는 육체적인 증세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행하신 경험입니다.

이 세 가지 경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담에게 특별하게 주신 은혜의 경험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주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사역 경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외로움의 경험을 통해 그 사역의 열매를 함께 나눌 자를 향하여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경험을 통해 능동적인 위치에서 성적인 관계를 이끌고 나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세 경험이 남자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하는 기본 성향입니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경향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습니다. 일 중심의 역할 수행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일 중심의 사고체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역의 열매를 함께 나눌 교제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일의 열매를 들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다닙니다. 육체적인 능동적 반응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영역과 존재를 찾아다닙니다. 일의 수행, 열매의 나눔, 육체적인 능동성이 남자들의 본성입니다.

이 세 본성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을 때, 이 본성들은 자신을 돕는 배필을 찾아 갈 수 있는 능력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때는 타락과 부패로 향하는 능력으로 사용됩니다. 결혼 전까지 모든 남자들은 이 세 가지 본성이 하나님 앞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평생 직업의 기초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사역의 열매를 함께 나눌 대상과 방법의 기초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능동성을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온전히 사용하는 기초 습관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미 결혼한 남자들은 이 세 가지 본성이 정상적으로 발현되도록 하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만일 결혼한 남자에게서 이 세 가지 특성 중 무엇 하나라도 부족하게 되면 그 남자는 이 세상에서 존재감이 사라지며, 병적인 증세를 나타냅니다. 결혼 전에는 문제될 수 없지만, 결혼 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부관계나 가정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에 직업이 확정되고, 그 직업의 열매를 나눌 대상이 확정되며, 자신의 육체적인 능동성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자들은 이러한 일 중심의 사고체계 속에서 여자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일, 직업, 직장을 인정해 주는 자매를 만나고자 합니다. 자신의 그 직업의 열매를 나누는 대상과 영역에서 함께할 자매를 만나고자 합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능동성을 함께 나눌 자매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 세 가지의 성향은 자신을 돕는 배필을 발견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자매를 따라가게 합니다. 또한 결혼한 남편들은 이 세 가지 성향의 인정과 역할 수행 속에서 부부관계를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이 세 성향이 남자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합니다. 일로 명예를 좇고, 일의 열매로 욕심을 채우고, 육체의 능동성으로 성적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배우자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난 남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 세 가지 모습은 아내를 힘들게 합니다. 만일 여자들이 남자들의 직업이나 그 수고의 열매를 나누는 삶이나 육체적인 능동성의 활동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면 남자들은 자존감을 상실하고 자멸해 갑니다.

3. 여자는 존재 중심의 사고와 삶을 중심으로 도울 배필을 찾아다닌다.

하나님은 여자의 성향도 알게 하십니다. 창 2:22에서 여자의 모습을 “이끌리며 만들어져 가는 자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아담을 만나기까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여자로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남자로부터 제공된 갈빗대 하나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하와 역시 무작정 자신이 도울 배필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욕심에 따라 활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며 만들어져 가는 존재의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하와가 경험한 것도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외적인 경험으로서 자신의 존재의 근원인 아담과의 한 몸의 경험입니다. 영적인 존재로서의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의 경험입니다. 둘째는 내적인 경험으로서 남자의 갈빗대 자체로서의 경험입니다. 육적인 존재로서의 경험입니다. 부부가 함께 교제하며 나누는 동질적인 영역의 경험입니다. 셋째는 육체적인 경험으로서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행하신 경험입니다.

이 세 경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와에게 특별하게 주신 은혜의 경험입니다. 하와는 아담과 한 몸이었던 존재의 경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남자의 갈빗대로서 남자와 교제하는 존재의 경험을 중심으로 그 경험을 나눌 자를 찾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에 따라 수동적인 위치에서 성적인 관계를 이끌고 나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세 경험이 여자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하는 기본 성향입니다.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경향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습니다. 자신의 근원적 존재 확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존재 중심의 사고체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존재 경험을 함께 나눌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살핍니다. 육체적인 수동적인 반응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수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영역과 존재를 찾아다닙니다. 존재의 확인, 존재의 나눔, 육체적인 수동성이 여자들의 본성입니다.

여자들도 이 세 본성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을 때만, 자신이 도울 배필을 찾아 갈 수 있는 능력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때는 타락과 부패로 향하는 능력으로 사용됩니다. 결혼 전까지 모든 여자들은 이 세 가지 본성이 하나님 앞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사역에 근거를 두는지 확정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적 나눔이 어떤 대상과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 확정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수동성을 온전히 사용하는 기초 습관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미 결혼한 여자들은 이 세 가지 본성이 정상적으로 발현되도록 하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결혼한 여자들도 이 세 특성 중 무엇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존재감이 사라지며, 병적인 증세를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전에는 문제될 수 없지만, 결혼 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부관계나 가정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에 사역이 확정되고, 그 사역의 열매를 나눌 대상과 방법이 확정되며, 자신의 육체적인 수동성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자들은 이러한 존재 중심의 사고체계 속에서 남자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근원적 존재감을 세워주는 형제를 만나고자 합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함께 나눌 대상과 영역을 근거로 형제를 만나고자 합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수동성을 함께 나눌 형제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 세 가지의 성향은 자신이 도울 배필을 발견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형제가 따라오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또한 결혼한 아내들은 이 세 가지 성향의 존재적 확인 속에서 부부관계를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이 세 성향이 여자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세워주는 대상을 좇아갑니다. 사역적인 존재의 나눔이 아닌 육체적인 존재의 나눔을 위한 대상과 영역을 좇아갑니다. 육체적인 수동성의 매력으로 세상을 유혹하고 흔들며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여자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배우자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난 아내들에게서 나타나는 이 세 가지 모습은 남편들을 힘들게 합니다.

만일 남자들이 여자들의 근원적 존재감을 무력하게 하거나, 여자의 존재적인 위치에 머무는 것을 거절하거나, 육체적인 수동성의 활동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면 여자들은 자존감을 상실하고 자멸합니다. 즉 한 가정의 사역에 있어서 여자의 존재가 절반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일 중심으로 나가는 남편 옆에 존재하고자 하는 아내의 역할 수행과 열심을 무시하거나 거절할 때입니다. 육체적인 수동성을 위한 아름다움의 추구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거절할 때 무너집니다.

4. 행복한 부부는 일과 존재를 통해 서로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부부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인 성향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서로를 만나게 하며, 서로를 하나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름은 상호 충돌 대상이 아닌 상호 보완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그러한 차이를 상호 충돌 요소로 받아들이며 “성격차이”등을 핑계로 서로를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그러한 차이를 상호 보완 요소로 받아들이며 감사함으로 서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의 은혜입니다.

창 2:23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 때 나타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여자를 바라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합니다. 특히 이 문장의 앞에는 우리말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하파암”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자 보아라, 이번에야말로”라고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즉 잠에서 깨어난 아담 자신이 그동안의 세 가지 경험 속에서 그리어 왔던 여자와 일치된 여자를 발견하고 외치는 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남자와 여자는 이처럼 서로를 향하여 서로가 찾던 그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며, 상대방을 마음에 품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상대방을 자신의 반쪽으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상대방을 향하여 자신의 반쪽을 내 놓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 속에서만 부부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이 고백 속에서 남자의 일과 여자의 존재적인 만남이 균형을 이룹니다. 이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완벽한 균형추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남자와 여자의 만남 속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고백은 자신의 세 가지 성향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제시하며 요구하는 고백입니다. 이들의 세 성향은 모두 상호 충돌요소로 작용합니다. 일과 존재의 충돌입니다. 일의 나눔과 존재의 나눔의 충돌입니다. 육체적인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충돌입니다. 이들에게는 그러한 충돌을 조정하며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균형추가 없습니다. 완벽한 균형추도 없이, 한 쪽의 일방적인 굴복도 없이, 남녀의 성향의 균형을 맞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유기적으로 살아 역사하시며 균형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남자의 성향과 여자의 성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기적으로 균형점을 이동해 가시며 균형을 맞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상호 보완을 하며 균형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서로가 사랑과 순종으로 양보하고 용납하며 한 사람으로서의 부부 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해 가게 하십니다. 남자의 일의 요구가 크든지, 여자의 존재적 요구가 크든지 관계없이 하나님 안에서 균형 있게 조절되어 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고백 속에는 상대의 세 성향이 나의 성향의 보완으로서 일치한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세 성향으로 상대의 세 성향의 부족을 보완해 가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상대의 성향이 수시로 변한다 할지라도 그 성향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성향을 강하게 하거나 약하게 하는 변화를 감당해 가겠다는 사랑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행복한 부부는 이처럼 일과 존재를 통해 서로에게 고백을 하는 부부입니다.

모든 부부들은 지금이라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젊은이들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야 하며, 그러한 배우자를 만나기까지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해야 합니다. 남자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 가운데서 그 손길을 찾아야 합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는 그 사명을 찾는 가운데서 그 손길을 찾아야 합니다. 남자와 사역과 여자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부부로 맺어 살아가게 하는 방편입니다.

이런 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합니다. 부부로서의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존재적인 면에서 1+1=2인 동등한 두 인격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세 가지 성향의 역할에 달려 있습니다. 여자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할 때만 남자의 존재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사역적인 면에서는 1+1=1인 한 몸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남자의 세 가지 성향에 달려 있습니다. 남자의 사역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때만 여자의 사역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주인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합친 “1+1=1+2”인 인격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존재면에서 영원히 혼합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사역면에서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향의 차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아담은 그 모습을 보며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쉬(남자)”에 여성 접미어만 붙인 “이솨(여자)”라는 고백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동등하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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