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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중립국 (마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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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12장의 세 가지 논쟁 중에서 ‘안식일 논쟁’과 관련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표적 논쟁’은 다음 주에 살피기로 하고 오늘은 ‘치유논쟁’에 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고자합니다.

안식일 논쟁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죽여 버려야 할 인물’로 생각할 만큼 심각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주의 인물인 예수님의 감시하며 호시탐탐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귀신에 들려서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22). 아마도 그는 선천적으로는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지만, 귀신에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눈을 감고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귀신이 그를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켰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질병보다 더 고치기 힘든 것이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정확한 원인을 진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치료방법을 선택하기도 어렵습니다. 본문의 벙어리는 현대 의학으로 정밀 진단해도 ‘왜 못보고 왜 말하지 않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무조건 귀신들렸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오늘날에도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인 질병들이 많고, 그 중에는 귀신들림이 원인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데려온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22). 예수님 앞에서 그 문제는 너무 간단하고 쉽게 풀렸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다 놀랐습니다. ‘놀랐다’(엑시스탄토)는 단어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정신이 나갈 정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은 무리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했습니다(23). 소경이 보며 벙어리가 말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사역으로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사 35:5-6).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릴 분위기가 뜨겁게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바리새인들이 싸늘한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24) 바알세불의 어원은 불분명합니다만, 당시 유대인들은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힘을 덧입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먼저 두 가지 반론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25-26) 모든 귀신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쫓겨난 천사들이고 그 대장이 사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일치단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신하고 대적하도록 하려고 갖은 방법을 통해 서로 전폭 지원합니다. 결코 서로 분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단을 힙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거짓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말이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27) 1세기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귀신 축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 19:13-14). 일관성 있게 말하려면 그들도 귀신을 힘입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아들들처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귀신을 축출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대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는 용어로 표현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36번 사용된 반면, ‘하나님 나라’는 겨우 4번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번이 이 구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은 사단의 나라와 분명하게 대조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축출하셨음을 밝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힘의 근원을 한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9) “하나님의 성령”은 바알세불이라고도 하는 사단보다 훨씬 강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 역사하시면 사단이나 귀신의 활동은 손쉽게 제압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축출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을 결박한 후에 사단에게 점령당했던 존재들을 구출해신 것이고,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임하게 하셨습니다.

비유에서 사단이나 귀신은 ‘강한 자’로 그려진 반면, 사람들은 사단의 왕국에 속해 있는 ‘세간’으로 비유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으신 예수님은 사단의 왕국을 침투하여 사단을 결박하고 ‘세간’들을 다시 되찾아 오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간’으로 묘사된 사람들은 사단의 왕국에 속해 있든지, 하나님 나라에 속해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곳에도 속해있지 않는 중립국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적 중립국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단에게도 속한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지 않아도 선하게만 살면, 천국은 가지 못하더라도 지옥은 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런 중립의 상태는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중립상태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대적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정신세계까지 완전히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성경에도 없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강한 자인 사단에게 잡혀 있든지, 더 강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출 당했든지, 두 종류의 사람만 있을 뿐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단의 가장 간교한 거짓 술책은 영적 중립국이 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일하시는 예수님께 속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에 결코 속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문맥에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사단의 왕국을 침투하여 세간을 늑탈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때, 성령님께서 먼저 그 사람의 심령을 감동시켜 회개케 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단의 포로가 되어 있는 비참한 자신의 삶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강한 자의 손아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하고 구원자를 갈망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셨다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신뢰하게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사단의 왕국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도록 하십니다.

가끔 뉴스를 보면 끔찍한 연쇄 살인범이 나옵니다. 사람들로부터 죽어 마땅하다는 지탄을 받습니다. 저도 심정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회개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유부녀 밧세바와 통간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교묘하게 죽였지만, 그가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부인한 사람도 다시 회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저주하기까지 했지만, 그가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힘입어 역사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케 하시는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구원 받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회개케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배척합니다. 아무리 표적과 능력을 행하셔도 결코 회개하지 않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끝내 회개치 않았던 바로와 같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베드로는 저주까지 했으니까 더 심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이 찔릴 때 회개한 반면, 유다는 마음이 찔릴 때 회개하지 않고 자살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죄 사함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일하시는 것을 보고도 사단을 힙을 빌렸다고 모순된 말을 하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독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사처럼 그 입에서 독한 말이 나왔습니다(34).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5-37)

양심적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는 불신자조차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인정합니다. 이단종파의 사악한 교주처럼 보지 않습니다. 중간지대는 없으므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힘입고 일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주님께서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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