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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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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작가 패트릭 화이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열심히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그는 호주에 돌아와 벌목하는 나무꾼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지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울창한 삼림 속에서 일 하다 자연의 신비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 발표한 작품이 "행복한 계곡" 과 "인간의 나무" 입니다. 계곡에서 나무를 자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계곡" 이란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 고 말합니다. "인간의 나무" 에서는 "인간은 겸손하게 될 때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달을 때 가장 하나님과 가깝게 된다" 고 말합니다. 즉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낮아지지 못했던 자신이 문제였음을 작품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도 실패한 삶의 자리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여러분의 눈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약한 계집종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며 실패했던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십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동일한 내용을 세 번 묻는다면 세 번째 대답이 가장 진실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진실을 원하셨기에 세 번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 번째 대답은 두 대답과 다릅니다. 세 번에 걸쳐 사용된 '아시나이다' 라는 의미를 살펴보면, 세 번째 '아시나이다' 는 처음과 두 번 째의 '아시나이다' 와 단어가 다릅니다. 첫 번째, 두 번 째 '아시나이다' 는 '오이다'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네가 나를 희생하며 사랑했느냐" 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으실 때, "3년이나 함께 했던 친구의 사랑으로 행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라는 부끄러운 의미로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아직도 친구의 사랑으로 하겠느냐" 고 물으실 때는 '아시나이다' 의 단어를 '기노스코' 로 바꾸어 대답합니다. 이것은 "이제는 친구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죽는 희생적 사랑으로 할 것입니다" 라는 강한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사랑이 필리아에서 아가페로 변화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이 시간 "너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느냐?" 고 주님이 물으실 때 바르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같이 "갈리리 바닷가에서" 를 찬양합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예수님 당신만을 사랑해요 주님만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내손 잡아 주세요 내게 힘을 주세요 오 주님 당신만을 따를래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베드로가 대답한 '주께서 아시나이다' 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의 회개를 아십니다

프랑스 작가 빅톨위고는 그의 작품으로 유명해지자 방종하며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외동딸이 가출하여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딸의 시신이 세느강 위에 떠올랐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통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장례식 후 딸의 방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돌아오세요. 하나님과 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생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제가 떠납니다." 딸은 아버지의 회개를 바라면서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빅톨위고는 딸의 죽음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돌려세우기 위해 딸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내게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아픔의 충격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충격을 통해 자신을 돌려세울 수 있는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 기회를 붙들 때 삶의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빅톨위고는 타락한 생활을 정리하고 사회복지국 공무원으로 취직합니다. 어려운 자를 찾아가 상담하고 도와주는 일을 함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다시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육부장관까지 역임하게 됩니다. 그 후 빅톨위고는 '레미제라블' 이란 작품을 통해 회개가 얼마나 위대한 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로서 실패했지만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회개함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재판 받고 나오시는 예수님과 마주 칩니다. 그 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이 과연 수제자인가 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뛰어 나가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 때마다 회개하였다는 기록이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 통곡 교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 통곡 교회 위에는 십자가 대신 닭의 모형이 세워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자신의 회개한 심령을 이미 아시리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 잘못에 대한 회개와 함께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아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를 기뻐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용서해 주십니다. 여러분들도 회개하며 돌아오는 모습을 주님께 보여드리며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사랑을 아십니다

야드 바셈(Yad Vashem)은 독일의 히틀러에게 학살된 유대인 600만명을 기념하는 학살 기념박물관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곳에 학살당한 150만명의 어린이를 추모하며 기념하는 방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150만명의 어린이들을 추모하는 작은 불빛들이 비췹니다. 바깥으로 나가면 '코르자크 정원' 이란 뜰이 있는데, 한 편에 겁에 질린 아이들을 팔로 감싸 끌어안고 있는 어른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조각상의 유래는 이와 같습니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학교에 독일군들이 들이닥칩니다. 유대인 학생들을 잡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 선생님께 매달립니다. 야누스 코르자크 선생님은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 아이들의 손을 잡고 트럭에 같이 올라탔습니다. 그 차가 어디로 가는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얘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더 좋은 세상에 가게 될 것이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라며 아이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결국 코르자크 선생님은 트레블렌카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선생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각상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예수의 사랑을 몸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입으로만 외치는 위선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닙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에 사랑하면 할수록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의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서슴없이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의 마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주님 앞에서 베드로는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희생적인 사랑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고 순수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몸된 교회를 사랑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사랑으로 주님을 고백하며 희생적인 사랑을 몸으로 주님께 보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의 죽음을 아십니다

찬송 중에 영광송이 있습니다. 2장과 4장입니다. 'Gloria Parti' 로 불리우는 이 곡들은 후대에 붙여졌지만, 가사는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부르던 찬송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찬송과 영광 돌려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 순교의 형장에 끌려가면서 "영광 영광 영광 성삼위께 영광을 돌리세" 라고 부르는 이들은 더 이상 패배자의 모습이 아닌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승리하는 이들의 찬송입니다.

프로 바둑기사들이 바둑 한판 두는데는 보통 400여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프로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다시 바둑판 위에 돌을 놓습니다. 이것을 복기라고 합니다. 한 돌도 틀림없이 복기하는 기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둑 기사들은 의미 없는 돌은 놓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돌만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정확한 복기가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30년을 살았습니까? 50년, 혹은 60년을 살았습니까? 과연 몇 수까지 복기할 수 있습니까? 만약 어떻게 살았는지 복기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았다면 무의미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의미 있는 삶을 살다 죽어야 합니다. 의미 있는 죽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본문 1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앞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는 베드로의 당할 순교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 가면 한 쪽 스탠드에 큰 십자가 하나가 세워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던 십자가입니다. 베드로의 죽음은 로마와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기초를 놓았던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주께서 나의 죽음을 아시나이다" 라고 기꺼이 대답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동기가 더 순수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봉사하고, 무엇 때문에 직분을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찬송을 얼마나 잘 부르느냐고 묻지 아니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찬송 속에 얼마나 깊이 배여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교회생활의 연조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질문 앞에 말이 아닌 주께서 아시는 삶으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살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을 향한 사랑으로 살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을 위해 살다가 주님만을 위하여 죽겠나이다 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말로만의 예수 사랑이 아닌 삶으로 예수 사랑을 보이며 살겠노라고 대답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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