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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의 부활을 본받으라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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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부활을 맞이한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능력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가슴 속에 새기면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연약함을 버리고 이제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어떤 세상적 도전에도 당당하게 대처해 가는 십자가의 용사들로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흔히 우리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더 하더라며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며 반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은혜입니다. 감사라는 단어 못지않게 애용되는 이 단어는 그러나 많은 경우에 왜곡되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운 적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학대학에서 기말시험을 보는데 시험준비가 잘 안된 학생들이 페이퍼를 가지고 하다가 들키는 경우 대부분 이렇게 요구하지요. "저~ 왠만하면 은혜롭게 하시지요..." 시험을 볼 때는 대부분 교수님이 오지 않고 조교가 시험감독을 하게 되는데 조교가 나이가 많지 않아 어렵지 않게 생각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까다롭게 굴지말고 은혜롭게 하자며 떼를 쓸때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은혜롭게 하자는 말이 정직하고 바른 것보다는 대강 넘어가자는 말과 동의어 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교사대학세미나에 세 번이상 결석하면 자격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광고가 되었는데도 네 번 결석을 하여 자격증을 받지못할 때,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느냐며 은혜롭게 하자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교통법규를 위반하고도 단속하는 경찰관에게 대강 무마해달라며 떼를 쓰는 일이 은혜로운 일입니까?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바뀌어야 할 신앙생활의 부분들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은혜롭다고 하는 것은 원칙적인 것이 바로 적용되어질 바로 그때가 은혜로운 때인 줄 믿습니다.

언젠가 우리 성도님 중에 한분이 동생이 땅을 팔았는데 금액이 크다며 절반씩 나누어 섬기는 교회에 드리자고 하여 5백만원을 가져왔어요. 지금 5백만원도 큰 돈인데 조립식으로 교회를 지어놓고 애를쓰던 개척 초기에는 너무나 큰 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의 출처를 듣고 나서 저는 그분에게 권면했습니다. 동생분에게 다시 갖다드리라고요. 그분이 섬기는 제단에 다 드려야 맞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물질적인 부분일수록 우리는 아주 분명하고 단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정직에서 의로움에서 바름에서 나오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잘못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와 자비만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좋아하지요. 그러나 그 비유는 사실상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가 맞습니다. 무한정 잘못하는 탕자가 꼭 우리같아서 우리 성도들은 그 비유에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 비유를 선호하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여러 성도들께 더욱 귀한 은혜를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은혜도 귀하지만 부어주시는 은혜는 더욱 더 귀한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입고 실천하며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태어나면서 부터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4분의 어머니에게서 난 12명의 형제들을 함께 사는 가정이었으니 얼마나 알력이 심했겠습니까? 그런 복잡한 가정에 요셉은 11번째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런던 그가 17세 청소년이 되어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남쪽 헤브론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10명의 형제들이 양떼를 몰고 북쪽지역으로 떠난 것입니다. 세겜까지 가겠노라고 부모에게 전했기에 아버지는 요셉에게 형제들이 먹을 빵과 버터를 자루에 담아 세겜까지 가도록 했습니다.

아직도 어린 청소년이 열 명이 먹을 빵과 버터를 지고서 며칠길을 찾아 찾아 간 세셈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를 때리고 미워했던 그 형들을 위해서 세겜까지 찾아갔는데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라고 했으니까 이젠 그냥 돌아와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만 요셉은 달랐습니다. 주위에 수소문 하여 형제들이 도단까지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그곳까지 찾아간 것이지요. 30키로가 넘는 길을 찾아간 요셉을 기다리는 형제들은 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느도다..." 며 요셉을 핍박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빵과 버터를 빼앗은 형제들은 깊고 좁은 우물속에 쳐박아 버렸습니다. 굶어 죽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중한 형제가 죽일 것까지 뭐 있느냐며 지나가던 베드윈 족속들에게 은 20을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사랑받던 요셉이 졸지에 애굽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간 곳은 애굽의 파라오의 오른팔이었던 국방장관 보디발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이 얼마나 규모가 크냐 하면 왕궁에 일하던 관료들이 잘 못하면 가두는 감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간 그곳에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산줄로 믿습니다. 요셉의 성실함은 보디발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를 총지배인으로 삼게했습니다. 요셉의 용모가 준수하고 성실함이 주인을 감동시킨 것이지요. 이제는 모든 열쇠꾸러미를 가지고 모든 곡식창고를 열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아내를 제외한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시기 위해 그가 있던 보디발의 집도 형통케 하셨습니다. 요셉이 축복의 통로가 된것입니다. 할렐루야!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진 죄로 억울하게 고소를 당해 감옥에 들어간 후에도 그의 삶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소설을 보니까 요셉의 준수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보다발의 아내가 귀부인들을 초청하여 요셉을 선보이는 장면입니다. 귀부인들이 먹음직한 큰 사과를 깍으려고 칼을 들고 사과를 깎고 있는데 요셉이 소개되어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딱 들어오는 순간 그 귀부인들이 전부 놀라서 칼에 손을 베었다는 거 아니예요..포도주 잔을 들고 있던 귀부인들은 너무 놀라 그 비싼 드레스에 포도주를 쏟는 줄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줄로 믿습니다. 그의 삶이 다르지 않았기 때뭉입니다. 매를 맞고 죽음에 직면할 때나, 보디발의 집에 있었을 때나, 또 억울하게 감옥에 있었을 때나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계속 한 단어가 함께 나오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셨더라"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은혜를 입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어떤 불리하고 불편한 상황들 속에서도 변합없는 요셉을 향해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 줄로 믿습니다. 저는 평안의 성도들이 맨날 실수 했다가 또 되돌아서 용서받고 또 용서받는 은혜에 살기보다, 이제는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 속에 승리의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면, 분명히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507장에 보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신앙고백적인 가사가 나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자. 우리 옛사람이 세례를 받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세례받은 우리는 이제 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은혜와 부어주시는 은혜에 힘이 된 우리는 새로워 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다시 죄가 우리 가운데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심령 속에 새로움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무장된 우리는 이제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입술의 고백 뿐만 아니라 삶에서 고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며칠 전에 최지우라고 하는 배우가 많은 기자들 앞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배우자는 기준이 어떤 것입니까? 배우자 선정기준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두가지를 이야기 했어요. 첫째는 기독교인이어야 하구요. 두 번째는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대개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바라는 이상형 남자의 모습은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곧 아버지 같은 유형의 남자를 원하지요. 그런데 최지우는 첫 번째 기준이 크리스찬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으면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질 줄로 믿습니다. 용서하실 뿐 아니라 부어주시는 은혜를 입은 우리 모든 평안의 성도들이 이제는 옛사람은 못 박아 버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힘으로 정상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늘 우리의 연약함 속에 머물렀던 우리, 그저 용서만 받아도 만족했던 우리들이 한 걸음 나아가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붙잡혀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기엔 그렇게 쉽지않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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