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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본에 충실합시다 ② 영혼의 호흡 (삼상 12: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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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합시다 ② 영혼의 호흡 (삼상12:19-25)

한 사람이 예수를 참으로 믿고 거듭나게 되면 그의 인생의 여러 영역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영적인 생활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던 사람이 믿음 안에서 성령의 감화와 인도로 하늘의 것을 주목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현저한 변화의 하나는 새로운 갈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의 갈망은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기도하고 싶어지고 기도를 배우고 싶어집니다. 기도의 갈망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께서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기도의 갈증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예수의 모습에서 기도의 영광을 보았고, 기도의 목마름을 느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때 제자중 하나가 예수께 나아와 이렇게 예수께 호소합니다. "선생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누가 복음에 의하면 이런 제자들의 청에 답하여 기쁨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주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갈망이 있다고 해서 다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를 하긴 해야 할 터인데 이렇게 소원은 하면서 실상은 기도 없는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기도하는 한국 교회'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한국 교회 성도들의 하루 평균 기도하는 시간이 일반 평신도들은 5분-10분, 제직들은 10분-15분, 성직자들은 20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기도를 갈망하면서도 실제로는 기도하지 못할까요? 기도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기도 갈망의 가장 보편적인 장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쁨과 피곤함입니다. 우리는 바빠서 그리고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오뉴월 신록처럼 활력이 넘치던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릴까요? 왜 갑자기 기쁨을 잃어버리고, 열심히 하던 일들이 식어지고, 시험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사와 생각들이 세상사람들처럼 속된 것들에 기울어질까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기도를 못하고 있던지, 기도를 하기는 하되 올바른 기도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얘기합니다. 통풍이 잘 안 되는 방안에서 화초가 시들해 지듯이 기도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그 영혼에 호흡장애가 일어나서 결국은 그 영이 시들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한 본문 23절에 사무엘은 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본문 23절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 보면 도처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건강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거부하고 특권을 방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명령을 보십시오!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무엘 처럼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면서 항상 호흡하듯 기도에 힘쓰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무엘이 고백한 23절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여기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라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임재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대인들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중요한 것은 합니다. 밥 먹는 것이 중요하니까 서서라도 먹습니다. 차안에서라도 먹습니다. 아파서 병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하니까 직장 빠지고서라도 병원에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바빠서가 아닙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이 살아 약동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현장에 임재하십니다. 막1:35에 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35절에 보시면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오히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그 전날 하루를 예수께서 어떻게 지나셨는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마가복음 1장을 21절부터 보면 그 전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 아침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마도 예배 중 귀신들린 자가 있어 소리지르며 예배를 방해하자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좇아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배 후 그는 회당에서 나오시사 시몬 베드로의 집에 쉼을 위해 가셨는데 거기서 다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기도로 고치셨습니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데 예수의 치유의 소문이 퍼지자 온 동네 병자들이 그 집 앞에 몰려들었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일일이 저녁 늦게까지 고치시면서 밤이 저물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 하루였는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이튿날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신 것입니다. 전날 너무나 바쁘셨기 때문에 그 이튿날은 늦게까지 안식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전날의 바쁨과 피곤을 오히려 기도로 극복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사역에 바쁨이 있었지만, 하나님과 동행이 없는 사역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아셨기 때문에 이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규칙적인 기도의 습관을 가리킵니다. 하루 24시간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의 삶 속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기도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단6:10 보면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갈 위기가 있었지만 평소 습관대로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해 기도합니다. 그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이 대신 사자 밥이 되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행3:1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의 기도 습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력으로 말하자면, 한번 설교로 3000명을 회개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인수로 말하자면 성공한 교회였고, 교회의 재산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교회의 수중에 있었고, 성도들의 헌신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일상 생활을 떠나서 함께 모여 기도하며, 공동 생활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규칙적으로 시간이 되매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그 상태를 죄라고 하시면서 그는 기도의 줄을 붙잡고 살겠다고 했는데 참 놀라운 것이 있어요. 바로 여기 "너희"라는 단어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 선지자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 여기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한 때는 70년대 통기타 가수로 지금 4-50대를 열광시켰던, 지금은 온누리 교회에 장로님으로 계신 윤형주 장로가 부른 '누군가 널 위하여 기도하네'란 찬양을 가끔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신이 지쳐서 기도 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널 위하여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자라면, 뭐 그렇지 않고 이제 막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라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는 사람만큼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하늘나라 상급의 대부분은 바로 중보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 된 자들임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보 기도야말로 가장 희생적인 행위요 가장 고상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이기심과 자신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봉사도 하고 설교도 하고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 기도입니다. 중보 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헌신되어 있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상급의 메달은 대부분 중보 기도자들의 차지일 것이라고 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보기도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개인의 중보 기도도 능력이 있지만 교회가 연합하여 하는 중보기도 사역은 더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동성 교회 성도들이 이 중보기도에 힘을 모은다면 이 나라와 공동체의 운명이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롬8:34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인생을 살아가다가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때에 친구들 마져 배신의 칼을 던지고 떠나갔을 때에 믿었던 사람들이 결정적인 손해를 내게 입히고 내 곁을 사라져 갔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때에 온 우주에 혼자 서 있는 커다란 고독에 신음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그것도 전능한 하나님이 나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신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놀라운 담력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이 행복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를 선택하신 이유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선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능력을 나눠주신 다음에야 전도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주님도 거기에 계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들은 기도라는 비밀의 통로를 통해 하늘의 온갖 신령한 공급을 받았으며 그 능력으로 개인의 숙명적인 문제와 가정의 환란과 국가의 엄청난 재앙들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기도로 유유히 흐르던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하늘의 태양을 잡아 두기도 하고, 기도로 185,000명의 군대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천사를 움직여 하룻밤 사이에 송장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기도로 하늘의 불을 끌어내려 제물을 불사르기도 했고, 3년6개월 동안 한발로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기도 했으며, 병든 사람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이가 기도로 땅을 진동시키고 , 착고를 풀고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몇몇 신학생들이 건초더미에 둘러앉아 극동의 지도를 펼쳐놓고 거기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큰불을 선교의 사명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한 학생이 한국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입니다.

한 시대, 한 교회, 한 지역의 충격적인 부흥 뒤에는 언제나 기도의 큰 불길이 있었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는 명백히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부흥을 체험하기를 원할 때마다 새로운 축복의 전기를 마련하기를 원할 때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도고, 중보 기도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한계를 벗어나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온 백성들에게 번져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는 그가 쓴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라는 책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유형을 가르쳐 그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driven life)이라고 했고, 또 다른 유형을 그는 '소명에 이끌리는 삶'(called life)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하루 하루를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리고 감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인생을 상처뿐인 전쟁터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여론을 경청하지만 여론에 의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확인한 후 자기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사모되지 않으십니까? 이런 삶이 갈망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기도하시면 그렇게 사실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갈망을 현실화한 당당한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결코 낭비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자 말틴 루터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요즈음 더 바빠진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할 필요를 느낀다"고. 그는 실제로 하루 24시간 중 기도를 위해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 하루 2시간 이상을 기도로 보내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빠지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을 낼 수가 없다고 핑계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이런 기도의 격언을 만들어 피차에 기도의 삶을 격려해 왔습니다. "당신이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시다면 당신은 정말 너무 바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기도의 필요가 있었다면, 연약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자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도의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이제 바쁘다는 핑계를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계획하십시오. 내일 새벽 미명-당신의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여십시오. 그러면 내일부터 당장 이 땅에서는 새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역을 하면서 날로 절감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기도의 터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열매도 생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전할 때나 찬양을 할 때에도, 사람을 만나거나 문제에 직면할 때에도, 기도의 뒷받침이 없이는 결국 남는 것이라곤 허전함뿐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인생이 허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황은 어렵더라도, 손에 쥔 것은 없더라도 기쁨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감사의 흥얼거림으로 바꿉니다. 이것은 저의 20여년이 넘는 사역에서 경험된 사실입니다.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쳐도 바다 속은 조용하기 그지없습니다. 기도하는 인생은 겉으로 보기에는 눈물나도록 힘든 삶이라도 한두 겹만 들어가 보면 영혼의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인생의 켜켜이 부귀영화로 수(繡) 놓는다 해도 그 기초가 부실하면 그 인생은 부실공사의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필요한 기초석이 바로 기도임을 기억하십시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중력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시도 발붙이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좋은 지도력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태평성세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은 여기까지입니다. 중력도 대기권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이며, 세상을 바꾸는 지도력도 가는 세월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힘도 시공을 넘어설 수는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인생사는 물론, 우주의 역사까지 바꾸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힘을 가장 잘 아셨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거대한 죄의 중력으로 지옥문을 향해 급락하던 이 세상을 일순간 역전시킨 십자가의 사건 이면에는 예수님의 피땀 어린 기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치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은 기도뿐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우리를 연결하는 것은 기도뿐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숨결로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부처는 하나님 앞입니다. 사실 우리는 인생의 진검 승부가 세상에서의 출세나 성공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끌어당김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영적 희열을 경험하는 영혼의 호흡인 기도로 기적을 써내려 갑시다. 우리의 호흡을 예수님의 숨결로 대신하는 기도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것만큼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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