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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서 다시 세상으로 (마 24: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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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역사는 벌써 2000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 역사를 되돌아보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고, 기독교가 없어질 위기를 직면한 적도 있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너무 비대해진 교회가 삐뚤어지다가 종교개혁이라는 전환점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우여와 곡절 끝에 오늘까지 기독교는 세계에 우뚝 서게 되었고, 지금도 신실한 성도들의 믿음과 기도와 삶을 통해 이 시대에 모든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어떤 시대에 살던 사람들일까요? 기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두말할 나위도 그것을 1세기에 살던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경 사도행전과 그 이후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주역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독교역사이래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견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가장 뛰어난 크리스천이라고 모두가 인정합니다. 그 이후 이들 만한 독실한 크리스천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뛰어난 신앙인으로 인정받게 된 믿음의 원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과연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마라나타의 신앙’이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마라나타의 신앙은 곧 재림신앙이요, 종말신앙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3년 동안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가셨는데, 그 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 믿음이 그들을 견고하게 세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행적을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골고다로, 골고다에서 갈릴리로, 갈릴리에서 하늘로, 그리고 이제 하늘에서 다시 세상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것을 믿는 마라나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 믿음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것이 결국 삶에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그렇다면 마라나타의 신앙, 재림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우리에게 재림에 관하여 주시는 성경의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선, 재림의 날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마지막 때의 일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말씀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재림의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본문 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36절에서 더욱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아들도 모른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의 고유권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재림은 비밀에 붙여진 것입니다.

  1980년 말과 90년대 초에 한국교회는 천국, 종말, 재림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펄시 콜레’라는 사람이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유명해서 한국으로 초대되어 교회마다 돌면서 붐이 일어났습니다. 또 그때에는 저마다 천국을 보고 온 사람들이 많아서 유독 천국에 대한 간증이 많던 시절입니다. 바로 그 시기에 ‘다미선교회’가 시작되었고, 교회에 들어와 여러 사람을 어렵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시한부 종말론으로서 정확하게 1992년 10월 28일 12시에 주님이 재림하여, 자기들이 휴거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 사건으로 한국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고, 한국교회에는 신앙의 경종을 울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여기 주님은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재림은 분명 있지만,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림의 날을 모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요 또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재림의 날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종말의 날을 안다면 세상과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주님은 다 우리를 생각하시고 그렇게 말씀하셨고,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속성을 잘 아시기에 모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적절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다 알지 못합니다. 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보이는 것만 알려고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하지 않는 것까지 알라고 하니 얼마나 복잡합니까? 많은 경우에 모르는 게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좋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재림이 그런 것입니다. 그 날고 그 시를 모르는 게 우리에게 약이요, 유익입니다. 그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것은 나의 죽는 날짜를 모르는 것과 같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다 죽지만, 그러나 언제 죽을 지 모르고 삽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만약 우리가 언제, 어느 날 죽는다고 정해놓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재림은 있지만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은혜요, 유익이요, 약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날짜는 모르지만 징조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24장 초반부터 그날을 모르는 것과 함께 주님이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전쟁과 기근, 천재지변, 자연의 변화, 기독교의 박해, 거짓선지자의 왕성한 활동, 불법의 성행, 그리고 복음전파의 확산 등을 말합니다. 사도바울도 마지막 때의 징조를 좀더 구체적으로 디모데후서 3장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 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 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것이 바로 징조입니다. 가만히 보면, 1세기에도 있었던 모습이고, 특히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말세를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징조를 보면서 큰 깨달음을 갖고 돌아서면 우리가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고, 승리할 수 있겠지만, 이런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때가 지난 뒤에 후회가 가장 큰 슬픔입니다. 본문 마지막에도 그런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무엇을 말합니까? 반드시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인이 나타날 때 다시 옷깃을 여미고,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서 바른 길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를 이렇게 다루십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다가 싸인을 보내어 뭔가 알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신호를 잘 받는 것이 삶에 지혜입니다. 만약 싸인이 오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잘 할 때 하나님은 큰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못할 때 반드시 싸인을 보냈습니다. 시대마다, 고비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을 다루셨습니다. 특히 왕정시대 영적, 도덕적인 타락이 극에 달할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 싸인을 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산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라 잃은 설움에 바벨론 강가에 앉아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싸인을 무시하다가 슬피 울며 통곡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삶의 모든 일은 징조와 싸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깨닫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내 삶에 뭔가 이상이 생길 때, 일이 꼬이고 잘 안될 때, 잘 되던 일에 문제가 생길 때,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싸인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고 혹이라도 잘 못하고 있다면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나중에 후회하며 통곡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요, 신앙의 원리입니다. 날마다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싸인을 깨달아 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십시오.

  셋째,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재림은 반드시 있으나 그 날과 그 시는 모르고, 오직 징조만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는 것을 봅니다. 이 말이 계속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25장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면서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45절부터 마지막까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라는 것이요, 주인이신 주님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을 기다리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 주님이 오시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시 성도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오시는데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일도 필요 없고, 직장도, 심지어는 가정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재림이 임박할수록 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면 주님에게 관심이 있고,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릴수록 더 주님을 따라가고, 닮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나엘 호돈’ 이란 사람이 지은 책 가운데 ‘큰 바위의 얼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 보스턴에 살 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그리 머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높은 봉우리 끝에 인자한 사람의 얼굴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 차를 세우고 큰 바위의 얼굴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을 봅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 어니스트가 살고 있는 마을 산꼭대기에는 전설 속의 ‘큰 바위 얼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바위의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나 마을을 구원하고 큰 일을 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도 어려서부터 그곳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큰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이 나타날 것을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첫 번째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는 그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어마어마한 재력가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큰 바위 얼굴을 꼭 닮은 모습이라며 감탄하지만, 그가 세상을 뜨자 결국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 후 어떤 위대한 장군과 훌륭한 사상가가 차례로 마을에 나타났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때마다 기대하고 또 실망합니다. 그러자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주인공 어니스트도 늙어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사람들은 큰 바위 얼굴이 바로 어니스트인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뭔가 심어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청교도 신자인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신앙인이 평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사모하고, 기다리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림을 기다리며 살면 우리도 주님을 닮게 됩니다. 주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바라보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성품을 배우고, 인격을, 행동을 따라가며 우리도 주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다림의 의미입니다. 기다릴수록 우리는 더욱 주님을 닮아 가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으로 날마다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다시 오십시오. 올라갈 때의 모습 그대로 오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마라나타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재림이 날을 모르는 것이 축복인 줄로 알아야 합니다. 징조와 싸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앞에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면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귀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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