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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을 체험한 자의 사명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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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도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뿐만 아니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해보니 무덤의 문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져서 바를 수가 없었습니다.  또 무덤 앞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는 예수님의 시체를 훔친 도둑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알렸을 때 이 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 막달라 마리아의 말 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마리아는 여자이기 때문에 조금 늦게 도착한 것 같습니다.
같이 왔던 여자들도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인 요한도 집으로 가버렸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다시 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울기시작 했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울음을 웃음으로 바꿉니다.

울면서 무덤의 속을 들여다보니까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한사람은 머리편에 한사람은 발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말하기를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15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었습니다.  마리아의 울음은 우리가 보통 때 우는 그러한 울음이 아니 였습니다.  여기에 운다고 하는 “클라이우사”라는 말은 대성통곡 한다는 말입니다.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면서 큰 소리로 울었을 때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려서 미쳐 돌아다니던 여자였습니다.

요즘에는 정신이상자가 있으면 가족들이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서 돌보기 때문에 시내에서 정신이상자를 볼 수가 없지만 이삼십년 전만해도 사람이 미치면 머리는 산발을 하고 옷을 풀어헤치고 다니는 이런 추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귀신만 들려도 그렇게 되는데 일곱 귀신이 들려서 미쳐서 다녔다면 그 모습이 얼마나 추했겠습니까?  그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들어갔던 귀신을 예수님께서 쫒아주시고 새사람,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그는 사람구실도 못하다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생명의 은인인 이런 예수님께서 불법재판을 받고 조건도 맞지 않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라도까지 죄가 없다고 했던 예수님을 무참하게 모함하여서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 3시경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6시가 되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 전에 장례를 마치려고했으니 3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장례를 치루었으니 장례가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는 향유를 준비했다가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자 얼마나 마음을 아파했는지 모릅니다.  안 그래도 예수님의 장례를 제대로 치루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픈데 그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갔으면 얼마나 욕되게 했겠습니까?  이런 생각 때문에 마리아의 마음이 너무 아파서 울기 시작하는데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이야기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어찌하여 우느냐 네가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몰라서 왜 우느냐고 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몰라서 왜 우느냐고 물었겠습니까?
마리아의 울음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왜 이렇게 울고 있느냐?  천사가 그렇게 물은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내가 다시 살아났는데 왜 너는 울고 있느냐?  내가 죽은 것처럼 왜 울고 있느냐?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생명은 울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울음에서 웃음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울음을 기쁨으로 바꾼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천사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기쁩니까?  천사와 이야기 한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어집니까?  그러나 그것이 마리아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 믿으면 죽음 앞에서도 웃으며 죽을 수가 있습니다.
로마의 네로황제시대에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사자의 밥이 되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엄마가 사자의 밥이 될 때 아이가 무서워서 엄마를 향해 웁니다.  그때 엄마는 조금만 있으면, 우리가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면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눈을 뜨게될  것이다.  그러면서 위로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기둥에 묶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솜으로 두르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네로의 정원에 불을 밝혔습니다.  목을 베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네로가 죽은 성도들의 얼굴을 보니까 죽으면서도 모두 웃으며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며 더 죽이도록 명령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죽으면서도 웃으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나도 부활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죽으면서도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어지고 우리의 답답한 가슴이 트여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순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헌금다운 헌금도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헌신다운 헌신도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을 때만 진정한, 역동적인 신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죽으면서도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의 자기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서 서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으면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위로받을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고, 잘 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 인류의 소망이고 모든 인생의 눈물을 씻어줄 수 있고 모든 인생을 웃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실패하여서 우는 자를 웃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질병에 고통당하는 자를 웃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가난에서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위로하며 찬송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아났는데, 내가 부활했는데 왜 너는 울고 있느냐?”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울고 있습니까?  가난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질병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배신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왜 울고 있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을 이 시간에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만나면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통곡이 우리의 눈물이 기쁨으로, 웃음으로 바뀝니다.  답답한 가슴이 희락으로 넘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신학자들이 많이 계시는데, 전에 한신대 학장이였던 고 김정준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가 젊을 때부터 폐결핵을 앓아서 나이가 들어서도 메마른 체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젊을 때 폐결핵 때문에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죽음 앞에서 너무나 초연했습니다.  늘 죽음 앞에서 기뻐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자기에게 죽음의 위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는 그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써서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죽는 날” 이라는 글입니다.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하는 찬송을 불러주오.
또 계시록 20장을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머리에는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단 한마디를 새겨주오.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습니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의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일 것입니다.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내 모든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취어도 좋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습니다. 
캄캄한 하늘이 내 마음이라면 거기에서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일 것입니다.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주님의 뜻이면 이 순간에도 닥쳐오기를 바랍니다.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같이 함께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옮겨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런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고 오히려 죽음을 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 신앙인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어떤 환경 가운데서라도 웃으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왜 이렇게 미지근합니까?  왜 역동적이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으로 내가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모하여서 부활하신 주님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때 내 믿음이 달라지고 내 믿음이 역동적이 되고 내 삶이 변화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통곡하며 눈물 흘리던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던 것처럼 그런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도 있을 줄 믿습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가 제일 먼저 만났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도요한도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먼저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제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았던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남달랐습니다. 

십자가 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제자 요한과 몇 사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도 다 도망을 가고 없는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잘못하면 거기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십자기 밑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까지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른다는 것을 제자들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 향유를 준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도적으로 몰리면 그는 죽습니다.  사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예수님을 만나기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다른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 제자들은 다 되돌아갔는데 마리아는 혼자서 울고 서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예수님의 시체를 옮겨갔거든 어디에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무게가 더 무겁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남자의 시신을 메고, 업고, 이고 어떻게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썩어서 물이 흐를 수 있습니다.  이런 냄새나는 시신을 어떻게 옮겨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내가 옮겨가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집에 두었다가 발견 되면 빌라도가 인봉한 이 무덤을 열었다고 해서 사형될 수도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그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예수님의 무덤 문을 열어서 예수님을 가져가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했구나!”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입니다.  이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먼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재림하시는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고 싶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8장 17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간절히 찾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열흘 동안 전심으로 기도했더니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김활란 박사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서 3일 동안 하나님 앞에 금식기도를 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아보시면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생명을 걸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 아름다운 향내가 날수 있도록 아름다운 향품을 준비해보십시오.  나를 통해서 아름다운 교회에 이런 아름다운향기가 나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보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게 될 줄 믿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내 혼자의 힘으로 예수님의 몸을 옮겨가리라, 그 예수님의 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몸 된 교회입니다.  내 혼자의 힘으로 영락교회의 모든 문제를 내가 짊어지고 가리라, 내가 영락교회를 끌고 나가리라, 내가 이고 나가리라는 이런 결심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만나기위해서 생명을 걸고 무덤을 찾았던 것처럼 그렇게 몸 된 교회에 올라와보세요.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눈을 열어서라도 천사의 모습을 보게하고 예수님도 보게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제자대학을 마치고 나니까 한 집사님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지난 주일에 매셨던 넥타이가 장식이 많이 된 넥타이입니까?”  저는 영문을 몰라서 가까이에서 보면 약간의 무늬가 있지만 조금만 떨어져서보면 흰색의 넥타이 이기 때문에 장식이나 무늬가 보이지 않는 넥타이입니다. 라고 말했더니 지난주에 부활주일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넥타이 바로 밑 가슴 쪽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도 반짝이는데 바라보는 쪽에서 계속해서 반짝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목사님이 부활주일이니까 넥타이에다가 예수님의 얼굴이 있는 좋은 장식품을 가슴에 달고 나온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보라고 하니까 다른 사람은 안보인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보기를 “정말로 목사님이 아무것도 안하고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눈을 열어주어서 예수님의 그 모습을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그 신앙을 잘 간직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면 주님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고, 이처럼 우리가 정말 그 마리아처럼 사모하면 어디서라도 주님을 환상가운데서라도 만나볼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3장 24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렇게 한번 찾아보세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은 생명을 걸고 찾는 것입니다.  그곳에 맹수도 있고, 포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목이 말라서 거기에 가는 것입니다.  마른땅이 단비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한번 기다려보세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그렇게 기다려 보십시오.  주님을 그렇게 사모하면 오늘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신앙생활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한번 찾아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저 왔다가 무덤만 보고가지 말고, 예배당 안에 들어왔으면 예배당 안에 부활해서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년 20년 습관대로만 다니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해보세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고, 그래야만 역동적인 신앙인이 될 수 있고, 그래야만 황홀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하고 사모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서 내안에 거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부활하는 예수님이 주시는 사명

이렇게 사모하던 예수님이 죽은 줄 알았는데, 그 예수님이 없어져서 누가 훔쳐간 줄 알았는데, 그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바로 자기 앞에 나타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여러분이 마리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리아는 너무 좋아서 예수님을 “꽉” 붙들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여기에 “만지지 말라!” 라는 이 말은 마리아가 만지려고 하니까 만지지 못하도록 예수님께서 한발자국 물러서는 이런 표현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만지지 말라!”는 말은 “붙잡다. 매달리다.” 라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너무 좋아서 끌어안아 버렸어요.  달라붙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나를 만지지 말라!”는 이 말은 “나를 계속 붙잡고 매달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붙잡고 있는 것을 중단하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형제들이 지금도 불안에 떨고 있는데, 지금도 근심하고 있는데, 빨리 내 형제들에게 가서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내 사명인데 지금 날 이렇게 붙잡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Go, Say" 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것은 여기에도 보니까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는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형제가 아니고 내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모든 믿음의 권속들을 향하여서 예수님께서 내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보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전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사명은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날 위해서 죽으시고 날 위해서 사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가장 큰 명령은 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았다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전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지키게 해서 또 다른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명령이고, 가장 크고 위대한 명령입니다.
이 세상에 부활보다 더 큰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빅뉴스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이 큰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간에는 권사회에서 미전도 종족을 전도하기위해서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오다가 한 지역을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가서 보니까 여러 선교사들이 많은 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나라에 온지가 6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 나라의 말을 그렇게 유창하게 하면 그 언어실력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아주 잘 먹고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고생을 합니다.  아이가 둘이 있는데 학교를 보내지 않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돈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어지고, 또 남편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선교를 하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엄마는 아이한테 메여서 함께 선교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선교하기위해서 홈 스쿨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얼마나 손해를 보겠습니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나가서 자기도 고생하고, 자식까지 희생시켜가면서 선교를 하고 있겠습니까?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날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내 모든 행복을 다 포기하고 내 자녀의 앞날까지 희생해가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예수님만이 대안이요, 예수님만이 인류의 소망이요, 예수님만이 행복의 근원이요, 예수님만 만나면 누구든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하여서, 그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게 선교사역에 뛰어들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나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가서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에서 전하지 못하고 내 삶의 전체를 포기하고 선교사로 나가지 못한다고 할찌라도 내 주변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킨 예수님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내 눈물을 씻겨주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가서 전하였던 막달라 마리아처럼 가서 전하는 성도들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한 생명을 구원하자!”

이번 7월에 있을 새 생명축제를 위해서 이렇게 매일 한번 기도해야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한 생명을 구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살아서 움직이고 역동적일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신앙은 바꿔집니다. 
내 눈물이 기쁨으로 바꿔집니다.  사랑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찾고 만나기 위해 애쓰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주님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마리아가 돌이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내려왔는데도 예수님인줄 몰랐습니다.  그의 눈을 열어주셔야 예수님께서 보여주셔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 시간 이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우리 앞에 지금 계십니다.  그렇게 은혜를 주셔야만 그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사모하고 은혜를 받아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속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덤만 보고 갔던 제자들처럼 무덤만 보고 가지 말고 교회당만 바라보고 가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만 보고 가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이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증인되어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부활의 증인되어 한 생명을 구원하리라 다짐할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윤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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