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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나를 웃게 만드신다 (창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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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병으로 고통 당하거나, 사고 당하거나, 실패하거나, 죽음의 위기를 당하게 되면, 대부분 자기한계를 느끼고 좌절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한계를 느끼고, 인생의 꿈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러한 한계상황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한다. 우리가 겪는 한계상황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는 장소다.

  어려운 어려운 한계를 똑같이 만나는데, 어떤 사람은 절망하고, 어떤 사람은 희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느냐에 달려있다. 성경은 한계상황 중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99세, 사라가 90세였을 때, 자기한계를 맞았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아들을 주겠다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24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99세가 된 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몸과 같았다. 남자로서 더 이상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사라도 생리가 끝났기에,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적을 베풀어 주셨다. 죽은 자와 방불했던 그들에게, 아들을 주셨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적인 소망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이적을 베풀어주시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 이적을 베풀어주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1. 언제 사람은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는가?

(1) 나이가 들어갈 때,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무서운 것도 없고, 부러운 것도 없다. 가난하고 연약해도, 언젠가는 모두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젊음의 패기이며, 확신이다. 능력이다.

  그런데 나아가 들어갈수록, 그런 용기가 사라진다. 자꾸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 아브라함이 나이 99세가 되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17:1). 인간은 나이가 들면, 자기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이라면 육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창17: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나이 때문에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나요? 나이 때문에 더 이상 취업도 불가능하고, 나이 때문에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가? 그러나 아직 낙심하거나, 포기할 때가 아직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2) 육체가 쇠약해져갈 때,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나이가 젊어도 육체가 약해지면, 낙망하게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육체가 쇠약해짐을 느꼈다.

  (창18:11-12)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경수가 끊어졌다는 말은, 생리가 끊어져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사라가 육체의 한계를 맞았다는 말이다.

  나이 들면 여인들만 한계를 느끼지 않는다. 남자들에게도 육체의 한계가 찾아온다. 남자들도 몸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노년이 되면 현저하게 몸이 쇠약해지기 때문에, 정력에 좋은 식품이나 약품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3) 꿈이 성취될 가능성이 희박해질 때,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인간은 꿈 때문에 살아간다. 꿈이 있으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꿈이 좌절되면, 인간은 절망하게 된다. 이젠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꿈을 회복시켜 주셨다. 아들을 주시고, 심히 번성케 되리라는 아름다운 꿈을 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창17:17-18),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 원하나이다”라고 했다. 어찌 아들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꿈을 포기하였다.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 나이가 많다고, 육체가 쇠약해졌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 인간은 한계가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되는 때도 있고, 안 되는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언제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포기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2. 한계를 느끼고 절망할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17:1).

한계를 느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은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86세에 낳았다(창16:16). 17:1에는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여기에는 13년의 공백이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자신의 방법으로,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만들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

  하나님의 침묵도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아브라함이 육신의 방법으로 아들을 낳았음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인간적인 방법을 쓰자, 기뻐하지 않으심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육신을 신뢰하면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육신의 방법을 신뢰하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때를 육신의 방법으로 단축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능력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까지, 침묵하시면서 기다리셨다.

  이제 아브라함의 몸은,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어졌다. 사라도 경수가 끊어져, 임신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일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셨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신뢰하라는 말씀을 전했다.

(1)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이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 (창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므로, 낙망되거나, 불가능의 벽에 부딪힐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

(렘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2)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라.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시기 위해, 먼저 말씀을 주신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 신앙은 약속으로 존재한다. 약속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래서 구약, 신약이라 한다. 믿음에는 2가지가 있다. 신념과 신앙이다. 신념과 신앙은 전혀 다르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신념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

  (창12: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창13:16) 땅의 티끌만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창15:5)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아멘으로 약속을 받았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자.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기한이 차야 이뤄진다. 말씀하신 기한이 미쳐,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녀를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셨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음을 알고,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고백할 수 있는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로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되어도, 결국은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백성들로 하여금, 결국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죄에 빠져, 죽은 인생이 되었다. 웃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웃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으심으로, 인간이 잃어버린 웃음을 다시 주님 안에서 회복시켜 주셨다.

(3)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아 본적이 없거나, 특별한 사람만 응답을 받는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다. 사람은 약속을 하거나, 약속을 맺고도 자기의 이익을 따라 파기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때가 되면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한다.

  라틴어에 “나는 믿는다”는 ‘credo’라는 말이 있다. 이 credo는 cor와 do의 합성어로서, cor는 심장, 마음, 심령을 뜻하고, do는 고정시킨다,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마음(심장)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신앙 훈련을 통해, 그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켰다.

  그러자 (창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다. 이적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난다. 말씀이 능력이다.

  예수님께서도 사단을 물리치실 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대로 행하셨다.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주셨다. 어떻게 이적이 나타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졌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웃게 만드신다(3, 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으면서, 100세 된 자가 어찌 자식을 낳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은 절망하여, 실의에 빠졌다. 마음이 조급하여 기다리다 못해,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 만에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 대로 언약을 성취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망 끝에 우리를 웃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라는 뜻인 이삭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웃음)을 주셨다(3).

  (창21:6-7)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사라의 웃음은 인생 역전의 웃음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고통 중에 울었다. 자신을 멸시하는 하갈 때문에 울었다. 그런데 이제 사라 자신이 아들을 낳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녀의 인생이 역전되었다. 사라는 기쁨이 충만했다.

  사라의 웃음은 절망 중에 웃은 웃음이다. 절망의 순간,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주님께서 이삭을 주셨다. 그래서 이삭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음을 선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웃게 하시는 분이다. 사라의 웃음은, 사라 한 사람만의 웃음이 아니다.

  (6)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염시켜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쁨은 사라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누구든지, 기쁨을 같이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라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웃음을 주는 성도, 웃음이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에는 웃음이 넘치는 성도들로 가득해야 한다. 웃음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를 웃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 웃음은 행복을 가져온다. 웃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행하다. 웃음이 있는 가정은 행복하나, 아무리 돈 많고 큰집에 살아도 웃음이 없다고 하면, 행복한 가정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기쁨의 근원, 기쁨의 전달자가 되기 바란다. 진정한 웃음은 또 다른 사람을 웃게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속에 들어가서, 기쁨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웃음의 전달자들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은 웃음의 조상이다. 성경에서 제일 먼저 웃었다는 기록이 (창17:17)에 나온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준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기막히고 행복해서, 엎드려 웃었다. 우리의 믿음은, 웃음이 넘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으로 웃고 사는 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유머 책에, 사람마다 다르게 웃는다. 요리사는 어떻게 웃을까? ‘cook cook cook’이라고 웃고, 축구선수는 ‘kick kick kick’하고 웃는다. 살인마의 웃음은 ‘kill kill kill’, 남자 바람둥이는 ‘her her her’, 여자 바람둥이의 웃음은 ‘he he he’라고 한다. 너무 좋아서 웃는 웃음은 ‘好 好 好’라고 한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힘들어하거나, 절망 중에 빠진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9회 말 투 아웃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끝났다고 모두 자리를 뜨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은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서, 역전승을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역전의 명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때문이다. 우상숭배자였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사기꾼이었던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노예로 끌려갔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다. 고아처럼 성장했던 에스더는 왕후가 되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하만의 장대에 오히려 하만이 메어 달려 죽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부자는 죽어 음부에 들어가고, 가난했던 나사로는 죽어 낙원에 들어갔다.

  이렇게 역전시킬 수 있는 힘은, 우리의 희망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역시, 역전승의 사건이었다. 어두움의 세력이 예수님을 쓰러뜨렸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모두 다 역전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어떤 인생도 역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망을 포기하고, 희망을 선택하라. 역전승을 확신해도, 많은 고통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가시어, 최후에 웃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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