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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이 아니라 구원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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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7번째입니다.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독교 최대의 캐치프레이즈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 정면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 말을 적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별것이 아닌 말처럼 보이지만 이 사랑을 한 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늘 겁나고 무섭기만 하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새롭게 아는 사람은 어떻게 내가 하늘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하며 감격해 합니다. 어떻게 신, 절대자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기왕에 예수를 믿고 늘 이 말씀을 듣고 잘 아는 여러분도 이 말씀을 처음 받는 것 같은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이 말씀은 오늘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좋아하는 성경귀절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모든 기독교인들의 성경귀절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기둥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족 중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죽게 내어준다는 것이 가능할 일이겠습니까?

목사님들은 예배 마지막에 늘 축도를 합니다. 그것은 고린도후서 마지막 말씀인 13장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왜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예수님의 사랑인데 왜 예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라고 하는지 오랫동안 궁금해 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고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이유가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십니다. 왜 이 땅과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목적이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때론 우리 하나님은 무섭기도 하고 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무서움과 엄하심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더 사랑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은 무서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종아리를 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끔씩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부탁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지치기도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한계를 잘 아십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지도록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 여러분이 좀 버겁다 싶은 일까지도 시키십니다.

내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 못할 용서를 ‘예’ 하고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병을 치료해 주시고 몸을 건강하게 해 주시고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리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넘어지고 자빠지게 하기 위해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때로는 힘들고 아주 어려운 일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 복 받는, 은혜받는 인생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 그런 일을 부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특정한 민족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자꾸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지 못할 사람들도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사람에게도 비와 해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랑받지 못할 사람, 못되고 속이 좁은 사람들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대강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람의 깊이요 넓이요 폭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의 가치는 자기가 만든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랑받는 가치는 자기가 만들고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을 가치는 자기가 만듭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치는 만들지 못하고 자기를 덜 사랑한다고 속상해 하는데 빨리 자기 자신을 봐야 합니다. 자꾸 상대방만 원망의 눈초리로만 보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하지 못한 채 그 반대의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때문에 더 사랑받지 못하고 더 섭섭한 일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의 가치는 자기가 만듭니다. 복도 복받을 만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잘 아셔서 아무에게나 복을 주지 않습니다. 복받지 못할 사람에게 복을 주면 그릇이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아무나 사랑받고 아무나 존경받고 아무나 대접받는 것이 아닙니다. 받을 만한 사람만 받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인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은 너무 쉽게 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은 쉽게 열어 놓았습니다. 아무리 악하고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도 다 들어 갈 수 있도록 크게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경 모든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서 입사자격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면 우리가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 이것 하나면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사람이 살다보면 무엇을 하면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조건을 붙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은 반대되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입사자격이라면 합격되는 사람에게는 입사자격이 되겠지만 불합격되는 사람에게는 이 자격은 불합격의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조건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멸망의 조건이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간혹 사람들이 만드는 조건이 상대방을 괴롭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우고 그 조건을 채우면 살려준다는 조건을 걸었다면 그 조건은 살려주는 조건이 아니라 죽이겠다는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조건도 아니고 어렵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아무 필요 없고 그냥 ‘아멘’하면 됩니다. 한평생 세상을 거꾸로 살고 세상에서 악한 일만 하다가도 마지막에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이 말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18절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조건이 어려워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무 쉬운 조건이라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렇게 쉬운 조건을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쉬운 것도 끝까지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것은 심판을 받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조건인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멸망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21절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정신질환자들에게 자주 처방하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일광욕입니다. 햇빛을 많이 쬐게 합니다. 일광이 여러분들에게 결정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빛이 있을 때 몸을 많이 드러내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당히 좋습니다. 정신질환자들에게는 일광욕을 처방하고 될 수 있으면 남쪽 해가 많은 지방으로 휴양가는 것을 의사들은 권합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사람들이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햇빛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과에서는 임상으로 광선으로 우울증을 치료하기도 합니다. 우울이 심한 사람에게 해를 자꾸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최소의 햇빛을 받지 못하면 살지 못합니다. 죄수들에게 최고의 형벌은 밥 굶기는 것인데 또 하나의 큰 형벌은 해가 들지 않는 독방에 가두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에 빛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정신질환자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자꾸 골방에 들어가려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공황장애 환자는 골방 속에 들어가서 커텐을 꼭꼭 치고 일주일 동안 바깥에 나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햇빛을 봐야 살 수 있는데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빛이신 예수를 거부합니다. 예수님께 오지 않고 자꾸 어두운 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예배당도 훤히 밝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자꾸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그 까닭은 어둠은 죄를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죄를 감싸줌은 물론 점점 키워서 죽이려고 합니다. 영적인 질환이 있는 사람, 죄와 악이 가득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데 그것은 무의식중에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빛이기 때문에 예수에게 가게 되면 자기의 죄와 악이 다 드러나는 것이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기억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 아무리 많은 죄,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다 씻어 주십니다. 당신의 보혈로 다 씻어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이제 부터는 더 이상 죄에 다니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고 환한 진리 속에 살도록 우리 예수님께서는 도와 주십니다. 예수님께는 구원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평안이 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 가시고 틈만 나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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