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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따르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마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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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그들의 모든 소원과 어려움을 예수님께 간구하여 해결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주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려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만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의 연구가요 선생인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께 이렇게 여쭙게 됩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어디를 가든지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반색하셔야할 예수님께서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을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오직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기적의 떡과 병 고침과 귀신을 쫓음과 자연을 정복함을 보고 예수님의 권세가운데 탄복하여 그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서기관에게 네가 이제까지 본 것처럼 모든 일이 그렇게 평탄하고 쉬운 일 만은 아니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고난과 아픔을 잠시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어떤 내용이 전개되는가 하면 예수님께 제자중의 한 사람이 부친이 세상을 떠났는데 가서 장사를 치르고 따라오게 하소서라고 말씀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장례를 필요도 없고 또한 인간적인 관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작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너는 이제까지 생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고 너는 산 자로서 나를 좇으라하는 말로 하나님 나라의 우선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내용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으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결단과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과 능력을 이루어야 함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우리의 신적인 결단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게 쉽지 않다면 쉽지 않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에 결심과 결단을 해야 되고 우리가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해서 결심을 통하여서 마음을 굳혀 그 일을 이루는 것이 보통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오늘 첫째로 결단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굳이 결단이라는 이와 같은 일들이 있어야 할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일시적인 감정 상태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제이기 때문에 분명한 결단이 서야하는 것입니다. 결단하지 않으면 따를 수 없을 만큼 주님의 사역은 우리들에게 쉽지 않고 또 주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길에 대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가는 길이 때로는 고난과 아픔과 눈물의 길이요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영광의 길임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합니까? 세상과는 방법과 목적이 다른 것이 주님의 길이기 때문에 주님의 길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은 무엇인가 마음에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결단하지 않습니다. 결단 안 해도 되지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고 내 한계 밖이나 내 경험의 영역 밖이나 아니면 내 힘의 밖이 될 때 우리는 마음에 결심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힘도 내고 집중하여 그 일을 이루는 것이 보통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내용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와 같이 결심해야만 따라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세상의 축복과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과의 생각도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베풀고 권세를 가지실 때 그 힘을 가지고 이 지상의 나라를 장악하셔서 모든 사람을 힘으로 위압하며 호령하며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당하였고 그 죽으심을 통하여서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권세로 죽음의 권세를 이겨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세계를 정복하는데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세상 사람의 방법이라면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 놓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부여해 주시는 이와 같은 방법과 목적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든 일이라는 것은 너무 무기력해 보일 때가 있고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길을 따르는데 그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인간적인 자연스러운 생각으로는 이루기 힘들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어떤 어려운 경우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은혜의 방법으로 마음으로 결심하여 주님을 따르겠다는 이런 각오가 있어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방법과 목적이 다른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주님을 따르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서기관이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 나와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요청한 서기관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가상합니다. 그런데 서기관이 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고 이와 같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될 때, 저와 같은 능력을 행하는 분이면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분이다. 내가 따라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관청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힘을 가지고 세상을 정복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있어야 될 분명한 사고는 무엇인가 하면 내 눈앞에 보이는 실제적인 역사만 가지고 주님을 따른다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더 큰 어려움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때론 내 마음이 원해도 그 마음이 원함을 주님께서는 인내케 하셔서 능력을 기르게 할 때도 있고 또 우리의 시간과 주님의 시간이 다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예루살렘에 안가십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권을 장악해서 그 나라를 이루시면 그들의 마음에 원하는 한자리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즉 제자들이 생각하는 때와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때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주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늘 낙심하고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에 결심을 하고 내 눈앞에 어떤 상황이 있어도 내 눈 앞에 어떤 실패가 있어도 내 눈 앞에 어떤 고통이 있어도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현상적인 능력으로만 바라본다면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 면전에서 고난 받는 예수님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할지언정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욕했던 이와 같은 사실을 보면 눈앞에 따르는 모든 것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만 가지고 우리 삶에 일들을 결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온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결단해야 할 이유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삶에 때로는 고통과 아픔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는데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모든 것이 어려움이 있고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사흘간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흘 만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통의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화려한 부활의 영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는데도 마음의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가는대로 하면 그것은 선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가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죄짓는데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죄 가득한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어거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내 마음의 흘러가는 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 마음을 추슬러 가겠다는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항을 긍정적으로 본다든지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보지 않는다든지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참고 인내하라는 뜻으로 내가 느끼고 그렇게 행하겠다라든지라는 이와 같은 종류의 각종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흘러서 내 마음 원하는 시원함을 얻는 것이 주님의 축복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을 다스려 하나님의 뜻을 순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패한 심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일을 이루는 것도 그러한데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결단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유익과 실제적인 더 많은 사역을 이루고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우리 삶에서 어리석은 죄악의 심성에서 우러나는 모든 일들에 우리는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기준과 원칙이 없으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우리 삶은 큰 혼란이 야기되게 됩니다. 만약에 지금부터 시작해서 신호등이 다 꺼진다고 생각하면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차들이 엉켜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결단은 때로 우리들에게 원칙을 세워주는 기준이 되고 아픔과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 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면전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고 새벽닭이 울 때 그 마음속에 너무 슬퍼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내가 내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고통당하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욕하다니 그러나 이와 같은 눈물의 쓰라린 고통이 있었기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담대히 대답 못하고 주께서 내 마음을 아실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순절 성령 충만의 베드로가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초대 교회의 복음의 포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삼천 명 회개하고 오천 명이 회개하는 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이와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도 결단하게 되면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능력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불행의 원천입니다. 마음의 결단으로 원칙과 목표를 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늘 불안하고 후회 가득한 삶이 되게 됩니다.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결국 뒤를 돌아보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추진력과 힘을 상실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마음에 결단이라는 것은 삶의 원칙을 세우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원칙을 가지고 그 원칙사이를 왕복하는 것이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칙조차 없으면 삶의 구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늘 그때마다 생각나서 임기응변적으로 우리는 처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 때 늘 말씀드리지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까하고 생각하면 이미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반열에 빠지게 됩니다. 날마다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도 그때마다 생각하고 결정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어떤 일을 맞이할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원칙을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 원칙을 적용, 결정하고 그 원칙에 따라 그 일을 치르다 보면 똑같은 상황이 우리의 삶에 많이 유발되니 똑같은 상황일 때마다 우리는 새롭게 결정하고 갈등할 필요 없이 우리는 원칙대로 진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삶에 과연 삶의 원칙이 있는가? 나는 삶에 원칙들을 반복하며 삶의 분명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결단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는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소돔성이 아까워서 돌아보다가 결국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자 우리한번 따라해 봅시다. 후회는 습관적인 것입니다. 후회는 습관적인 것입니다. 후회하는 사람은 날마다 후회하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날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옷을 사도 세 번 바꿔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데 매번 옷을 살 때마다 그렇겠지요. 사람도 마찬가지고 뭐든지 그렇습니다. 한번 정했으면 후회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모든 최선의 것이다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마음에 기뻐 감당하게 되면 우리는 오히려 더 기쁜 은혜의 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음에 결단과 원칙과 목표가 없으면 늘 후회하게 됩니다. 늘 우리는 번복하게 됩니다. 늘 우리는 후회가 습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늘 잘못해놓고 후회하고 잘못해놓고 후회하지 말고 원칙을 만들고 원칙대로 실행했으면 결과가 어떠하든지 나에게 주어질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마음 상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그것을 누리고 기뻐할 수 있는 은혜의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특별히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결단한 것 믿음으로 지켜야하며 믿음으로 결단한 것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감사와 감격으로 주의 뜻을 이룸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만약에 주일날 교회에 올 때 내가 매주일 교회에 와야 될까 말아야 될까 결정하면 그때마다 피곤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요청과 여러 가지 약속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주일날은 무엇보다 교회 가는 날이다라고 생각하면 아무 요청과 약속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미 결정해 버린 것 때문에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결정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이것이 내 삶에 원칙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결단과 결과에 대해 후회 없이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내가 어떤 일을 했던지 그 결과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마음에 믿음의 결단을 이루고 믿음의 결단의 원칙을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게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그 결과에 대해서조차 완벽하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말 어리석은 자들이 됩니다. 우리는 과정에는 완벽해도 결과에는 최선을 다했으니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수납의 태도가 있을 때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기쁨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안 되어 있는 상황을 아무리 후회하고 아무리 타박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주어진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하여 내 마음이 즐겁고 가진 것 가지고 나누고 다른 이들과 즐겁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길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결단의 과정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우리 인간들이 어떠한 결단의 과정을 거쳐가는가? 주를 위한 결단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즐거울 수 있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결단이 있을 때 주님을 따르는 길은 기쁨과 감사가 있고 오히려 행복한 사명자의 길이 됩니다. 그런데 결단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모든 삶을 이루는 요소 중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이 심령의 감동을 주고 감동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결단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서기관이 주님 앞에 나온 것은 그에게 있어서 외적인 형상만 보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외적인 형상만이 전부가 아니고 당신이 보지 못하는 어떠한 권한이 있을 수도 있다 하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서기관을 방황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방황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마감하고 결단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성경에 여러 분위기를 따져보게 되면 서기관이 예수님을 그렇게 따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밀을 압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진주장수의 비유를 압니다. 천국은 그 참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 다른 모든 가치를 하등한 것으로 여겨, 최고의 가치를 누리기 위해 그 모든 가치를 뒤로 하고 자기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천국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가 가장 고상하고 진리라고 생각하면 이전까지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를 느낄 때 우리는 결심하고 결단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야말로, 주님의 길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느끼면 그 다음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불필요한 가지를 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신의 삶을 정돈합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의 삶을 정돈하는 것, 그만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종교적인 망상 속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내 삶의 최고의 기쁨이라고 결단했기 때문에, 원칙으로 정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오늘 나와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선택하고 우선권을 정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최우선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에 나아왔고 하나님 앞에 귀한 은혜와 능력,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목표를 결단해서 정했으면 그 다음에는 그 정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가지를 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별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게 됩니다. 항상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정리와 정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잡다한 전선을 펼쳐놓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선을 많이 벌여놓지 않고, 전선을 좁혀 집중하여 그곳 가운데 활로를 열어가야 합니다. 너무나 잡다한 삶의 일을 펼쳐놓으면 어느 것 하나 잘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최우선권을 두고 우리의 삶의 전선을 집약시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변 가지를 침으로 말미암아 결국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으로 평가를 받을까요? 우리는 열가지, 스무가지, 백가지로 평가받지 않고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과연 무엇을 가지고 평가받을까를 생각하여서 우리 주변의 가지를 쳐 그곳에 집중하는 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사람에겐 힘, 시간, 여건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백가지, 열가지를 다 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변의 가지를 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우리의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정돈된 삶으로 오직 주님의 길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결심하고 이제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주변의 가지를 치고 정돈된 삶 속에서 집중하여 오직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했다면 우리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귀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삶을 낭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단하고 나면 오직 주님만 따르고, 오직 주님만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떤 일을 헌신하고 봉사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짐으로 와닿는 것이 아니라 힘이요, 능력이요, 권세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의 결단과정은 이렇습니다.
1. 가치발견
2. 가지치기
3. 집중 속에 주님을 따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주님 앞에 결단하여 이르게 되는 과정입니다.

저는 오늘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모함으로 이루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리정돈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은 너무나 복잡합니다. 제가 성도들의 초청을 받아서 가정을 방문하면 교회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은 대부분 삶의 구조가 단촐합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삶에 너무나 많은 약속들과 일들로 인해 주를 위해 봉사하고 수고할 마음의 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말씀하시기를, “제가 바쁜 것 좀 정리되면 하겠습니다.” 하시는데, 바쁜 것 정리되고 주의 길 할 기회는 없습니다. 바쁜 중에 주의 일을 위해서 다른 일들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으면 저절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결단의 유익에 대해 살펴봅시다.
왜 우리가 주님만을 따르기로 내 마음에 결심하고 결단해야 하는가? 다름 아닌, 갈등으로 인해 보내는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결단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갈등의 요인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단선으로 살면 편한한데 복선적인 요소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 일을 해도 저 일을 해도 잘 할 수 없고 늘 세상에선 교회 생각하고 교회에선 세상 생각하고, 주님과 더불어 동행할 시간에는 세상 생각하고, 세상에선 주님을 벗어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갈등으로 우리를 소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원칙을 결정하고, 원칙대로 살아가면 우리는 신앙의 원칙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어떤 원칙을 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출발선상에서 벌써 저만큼 나아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할까 방황할 때 그는 이미 길을 정하고 걸어가고 뛰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삶의 원칙을 정한 사람은 늘 마음속에 그의 정한 원칙대로 살아갈 때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빨리 시작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앞서 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원칙을 결정하고 그것을 결단한 사람들은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항상 후회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심정적 만족과 생활 속의 결과에 대해서 자신있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원칙을 정하고 결단을 했으니 집중하게 됨으로 인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결단하면 주변이 정리되고 번복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집중하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단하여 집중한 것과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셨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한 말씀이라도 붙잡고 한 주일동안 생활해야지.’라고 생각하면 무엇인가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여러 가지 것으로 방황하고 ‘내일은 어떻게 될까? 내가 내일은 무엇을 해야하지?’라고 생각하게 되면 아무 것도 우리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일을 할까라고 아침에 일어나서 걱정하며 생각하는 사람들과 내일 아침 일어나면 이런 일을 해야지라고 부지런히 정리해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일을 위해서 달려나아가는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의 열매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받는 것조차 결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믿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있고 행복할 수 있고,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후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 속에서 주님의 열매를 얻고 주님의 열매를 얻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에겐 적어도 쌓아둘 축복은 없어도 나눌 수 있는 축복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있고 행복할 수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후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방어적인 삶으로 우리를 비축해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속에 확신하며 우리의 삶 가운데 주의 선을 이룰 때 우리는 더 큰 능력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결단하면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도전을 주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합시다.
“결단함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 말해봅시다.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지내며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은 어떤 사람에게 오는가? 행복은 행복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우리 삶의 모든 요소가 불평과 불만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앞의 사람이 키가 커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불평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 말해봅시다.
“저는 행복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행복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그릇된 인자가 들어와도 내가 행복하기로 결심한 사람인데 이 작은 요소에 넘어질 수 있느냐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보면 “참 감사하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라고 하지요? 우리는 정말 우리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정말 행복하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은혜가 이루어져 본인도 행복하고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내가 결단으로 인해 단호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그것은 나 혼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본인이 입지하면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 쉬어갑니다. 큰 나무가 되면 그 그늘에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큰 거목이 되어서 여러분의 그늘에 많은 사람이 쉬어갈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고 능력을 얻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요셉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고 기드온이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고 모두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속에 주의 일의 역사 속에 들어서게 되었고, 그들이 주님의 일을 하여 큰 믿음의 거목들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내 그늘에서 몇 사람이나 은혜를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사는가?”
생각해봅시다.

집안 식구 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고 용기를 얻었을까? 생각하면 우리 삶이 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기쁨으로 나아가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기뻐할 수 있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지는 않아도 환경에 영향은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겐 환경을 극복하는 힘은 있지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이리저리 생긴 힘이 힘이고,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비뚤어지면 그에 따라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게 됩니다. 환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환경적인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적인 요소입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계속해서 몸을 흔들고 떠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 모두의 주위가 흐트러지게 됩니다.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옆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제가 좋은 환경이 되고 있습니까?”
“제가 공해입니까? 청정제입니까?”

여러분만 있으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기쁘고, 갑자기 가정에 활기가 돌고 모든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워지지요? 우리가 있으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져야 합니다. 다 즐거워져야 합니다. 요즘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 얼마나 길게 살겠다고 인상 쓰며 괴로워하며 남에게 피해 끼치며 살아갈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길 것이라 생각합니까? 길지 않은 인생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고 즐겁게 만들어주고 그렇게 살다가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이 결단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조금 마음 상해도 내가 속상해도 표현하지 않고 내 가슴 속에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이렇게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상대가 기쁠 수 있다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마음을 넓히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저 한 마디 들어왔을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내 마음 속에 담겨있는 죄악의 이야기를 그대로 퍼붓다 보니 피차간에 망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어가는데 있어서 정말 다른 사람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야 합니다. 오염체가 아니라 청량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 마음속에 결심함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주님 때문에 손해보는 것 있더라도 그래도 나는 주님이 좋아서 주님 따르겠습니다.’라고 생각할 때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큰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이겨내는 기쁨 속에서 우리는 더욱 더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이와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과연 나는 결단한 삶의 원칙이 있는가? 여러분 마음에 결심한 삶의 원칙, 믿음의 원칙들이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초보를 지나 헌신과 결단을 이루고 있는가, 아니면 초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아직도 나 하나의 문제에 집착해 있는가, 이제는 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서 담대히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시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주님 앞에 아름다운 결단을 이루고 결단을 통해 삶의 원칙을 세우고 믿음의 원칙을 세워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아름다운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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