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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 (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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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이 사방의 대적을 무찌르고 평정을 찾았을 때,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짓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를 불러 성전을 지으려는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 있는데 하나님의 괘는 천막 가운데 있으니 하루 빨리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모셔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다윗 왕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생각을 기뻐하였습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성전을 지으려 하는 다윗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은 피를 많이 흘려 성전 짓기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 솔로몬이 짓게 하셨지만 크게 기뻐하시면서 축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삼상7:9-13). 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에게 주셨던 축복의 말씀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에베소서 2장 19-22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루어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교회설립 96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경청하시고 은혜를 받아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일에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A.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2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집이 되기 위하여 계속 성장 발전해야 합니다. 외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성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일이 성령 안에서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교회는 교회답게 되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거룩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성전 안에 한정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전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놓고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까” 하나님은 크시므로 성전에 한정시킬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곳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크신 분이므로 비록 성전에 계시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항상 성전을 지켜봐 주시고 그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복 주시기를 간청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만나셨습니다. 광야에 있었던 천막 성전에서부터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도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지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성전의 전신)을 건축하는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거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계셨고 또한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실 자리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B. C 200년경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대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를 말살시키기 위한 강경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우선 성전을 모독하기 위해 거룩한 제단에 돼지를 잡아 피를 뿌리고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의 뜰에는 제우스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성전 좌우로 뻗쳐 있는 작은 방들에는 창녀들이 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성전이 모욕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설적인 인물 마카비우스 형제들이 군사를 일으켜 수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럽혀진 성진을 다시 정결케 하고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성전이 세속화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하기 어려운 세속화의 현상은 심각한 지경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이나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성, 즉 세상과의 차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가 성도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에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B. 교회의 모퉁이 돌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퉁이 돌로서 교회의 중심입니다. 2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지만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였고 사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입니다.

뉴욕의 어느 교회가 예배당 전면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써붙였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담쟁이가 자라 “십자가에 못 박힌”이란 글자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한다”만 남았습니다. 또 세월이 지나면서 담쟁이는 “그리스도”라는 글자도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한다”라는 말만 남았습니다. 어느 날 그 교회의 목사님은 “우리는 무엇을 전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담쟁이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덮어버린 것을 비유하면서 그리스도가 빠져 있는 세속화된 설교를 지적하였습니다. 오늘날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합니다.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지만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단순히 윤리적 교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설교는 교양강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그분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C.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본문은 교회가 하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소개합니다. 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인”과 “손”은 나그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많은 유대인 나그네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은 정처 없이 떠났습니다. 그들은 시민권도 없이 방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나그네 설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전 이해를 가지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요 하늘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미리 유산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재산을 나누어 주자 그것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평생 모은 돈을 먼 나라에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다 허비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지역에 흉년이 들면서 벌어먹기도 힘들고 얻어먹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것은 돼지를 키우는 일이었는데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너무 힘들고 배고픈 나머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돼지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의 집에는 품꾼들도 풍족하게 살지 않는가? 내가 여기서 굶어 죽느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머슴노릇을 하자. 아들로 받아죽지 않아도 좋다. 큰 죄를 지었으니 머슴으로 살자.’ 탕자는 결단을 내리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아들을 달려 나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영접하였습니다. 아들은 죄를 자백하며 머슴으로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탕자의 방랑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그네 설움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이제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사람들도 다 이와 같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자녀로 받아주시고 하늘나라 백성으로 삼아 주십니다.

D. 성도는 연합하여 교회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은 성도들의 연합으로 성전다운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1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여기서는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 성전을 이루는 기본으로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연결하여”는 살아있는 단체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건물”들은 지체를 뜻합니다. 각 지체들이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일 때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소한 감정을 버리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뭉쳐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뭉쳐 하나가 되어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옛날에 메도나이트라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파가 분열하여 아미쉬 교파가 생겼습니다. 분쟁의 씨앗은 단추였습니다. 단추는 끈보다 편리하니 써도 된다는 파와 단추는 장식품이니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쓰면 안 된다는 파가 서로 싸우다가 결국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성찬포도주에 파리가 빠졌는데 성찬이 더러워졌는가 아니면 파리가 성화 되었는가 로 논쟁하는 동안 나라도 망하고 교회도 망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였다면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리라고 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서로가 이해하고 뭉쳐야 합니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마른 뼈들처럼 이리 저리 굴러다니면 그것은 죽은 교회입니다. 서로가 연합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뭉칠 때에 살아있는 교회,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뭉쳐 주십시오. 전도에 뭉치십시다. 기도하는 일에 뭉치십시다. 찬양에도 뭉치고 운동회에도 뭉치고 뭉쳐서 하나님께 귀히 쓰이는 교회를 만들어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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