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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룻 1:15-18,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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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우리 교회의 부모님들, 연로하신 어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총선 때 모 정당의 대표가 노인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큰 어려움에 직면했던 일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대적으로 경로사상이 흐려져 가는 판인데, 아무리 선거용 발언이라고는 하나 어른들을 “무대에서 살아져 가는” 세대라고 말한 것은 충분히 문제삼을 만한 망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작년 말, 안동교회 행사에 참석하여 축사하신 광주의 한 완석 목사님은 “노인들이 나이를 공짜로 먹은 줄 아느냐, 나이 먹는데도 돈이 들었다. 그러므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은퇴하고 나서 당하게 된 여러 가지 섭섭한 일들을 그렇게 표출한 줄 압니다. 젊은 세대, 그리고 자녀들이 항상 귀담아 듣고 또 삼가며 잘 감당해야할 일인 줄 압니다.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의 사랑하는 여인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은 산 사람의 생간을 먹어야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미쳐버린 이 청년은 달리 방법이 없어서 불효 막심하게도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간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생간을 가지고 이제 한시 바삐 자기 애인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신 없이 애인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중에 자꾸 무슨 소리가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멈추어서 귀를 기울였더니 놀랍게도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넘어질라, 천천히 가거라”.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노래를 들어 보셨지요. “이 세상의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딸이 잘되라고 행복 하라고, 마음으로 빌어주는 박 영감인데...” 그렇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다 같습니다. 박 영감의 마음이나 김 영감의 마음이나, 동양의 부모나 서양의 부모나, 옛날 부모나 오늘 날 부모나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마음뿐이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낳으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예수께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님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흥하는 길이라면 자신들은 쇠하고 또 쇠하여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모님들을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 열 가지가 있는데 그 가장 중심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 제 5계명은 하나님께 관한 계명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하나님말고는 부모보다 앞설 사람은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에 관한 계명 맨 앞에 있습니다. 우리 옛 말에 “효가 백행의 근본이라”고 한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은 다 거짓이요 위선이란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상의 변화가 어떻든지 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님에게 효를 하고 어른들을 공경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오늘 구약 본문에서 우리는 이방 여인으로 유대인의 가정으로 시집 온 룻과 그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아름다운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룻은 결혼하자 말자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룻의 남편 뿐 아니라 시아버지 시아주버니까지 이 가문의 모든 남자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멸문의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기 이름을 기쁨이라고 하는 뜻을 가진 나오미가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하는 뜻으로 “마라”라고 했습니다. 룻은 이런 불행의 극한 상황에서 동서 오르바 마저 떠난 가정에 시어머니와 단 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 가정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그 시어머니를 남겨둔 채 차마 떠날 수 없었습니다.

(1) 룻의 결심은 혼자 남게 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겠다고 하는 갸륵한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룻기 본문 16절에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자기 의지를 말했습니다.
며느리들에게 가장 싫은 말이 “시”자가 들어가는 단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 등등...그래서 시금치까지 싫다고 합니다. 옛날에 소위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이미 무색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나오미와 룻의 관계는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살펴 봐야할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들이 행복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했습니다. 자기 한 몸 다소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며느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들들이 죽고 난 다음 며느리들에게 말하자면 “팔자를 고치라”고 강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시어머니의 며느리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어른들이 사랑을 먼저 베푸는 것이 원칙입니다. 소위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른들이 입만 열면 “우리가 젊었을 때...”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생각입니다. 역사의 시침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이 지금 젊은이들의 입장을 먼저 충분히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 특히 우리 집에 들어와 살게 된 며느리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소원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메아리와 같습니다. 어떤 아이가 산에 가서 큰 소리로 “야 임마!” 했더니 그 소리가 메아리고 되어 “야, 임마!”하고 자기에게 되돌아 왔습니다. 속이 상한 아이는 더 심한 욕설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메아리도 역시 더 심한 욕설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씩씩거리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엄마는 “이번에는 가서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 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메아리도 역시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른들이 나오미처럼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면 반드시 그 사랑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2) 그런데 룻은 또 어떠했습니까? 아직 새파랗게 젊은 청춘인데 왜 자기 인생에 대한 미련이 없겠습니까? 이미 자기 동서 오르바는 그렇게 해서 시어머니를 떠나갔습니다. 룻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젊음을 즐기겠다고 불행하게 된 시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에 붙은 인사치레가 아니라 말릴 수 없는 결심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을 통해 배운 사랑이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습니다. 14절에 보면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룻의 결심이 얼마나 견고하였는가를 말해 줍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말로 하면 “경로효친”이 아니겠습니까? 성경 말씀대로 해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과연 룻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룻은 나오미 가문에 속한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을 만나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선민 아브라함의 족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효부 룻의 증손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다윗 왕입니다. 그뿐입니까? 우리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그 가운데 5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룻입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메시야 족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잘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엄청난 현실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특히 자녀들, 그리고 젊은이 여러분,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은 케케묵은 구닥다리같은 인생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며 인생의 바른 도리요 그 결과 하나님께 축복 받는 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신약 본문에는 우리 주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사도 요한 3사람의 십자가를 중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실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마리아는 끝까지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요한이 역시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직전입니다. 그 고통이 절정에 달할 때입니다. 정말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와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자신의 고통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어머니를 두고 그냥 떠나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어머니를 모자관계로 맺어 주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 이렇게 하여 요한으로 하여금 자기를 대신해서 마리아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성지 순례차 에베소에 가면 성모 마리아 기념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평생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면서 거기서 성모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당부대로 마리아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12 사도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천수를 누리면서 100여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는 요한에게 계명에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서 장수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해야하는 것과 효도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하는 약속의 실현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가 노인을 경시하고 부모 공경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요 인간의 도리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두려운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윗사람의 말은 사리에 맞지 않아도 따라가야 한다고 응답한 것이 25.6%, 맞지 않으면 윗사람이라도 시시비비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58%, 또 부모가 반대해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63.8%, 반대하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 15%로 나타났습니다. 이론적으로 옳다 그르다 말하기 전에 이런 것이 우리 사회의 흐름입니다.

지금 어른들, 부모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 설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 독거 노인의 수가 10년 사이에 배로 늘어났다는 통계입니다. 우리 사회에 룻과 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박물관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사회는 해체되고 붕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복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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