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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길과 무지한 반응 (단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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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임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고, 그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은혜는 인간이 세상 속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했던 결과와는 다른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은혜가 임할 때 그것을 은혜로 아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욕심 가운데 있으며, 교만한 가운데 있는 존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죄와 교만과 욕심을 내려놓는 자들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으로 은혜를 입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통하여 입기도 하며, 환경이나 자연 만물을 통하여 입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임하기도 하며,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입기도 합니다. 지혜자의 입을 통하여 입기도 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의 입을 통하여 입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동물의 울음소리를 통해서도 은혜를 입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그러한 경로를 통한 은혜를 깨닫고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 5:5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깨닫고 받아들입니다. 어떤 자는 말씀의 교훈으로 은혜의 길에 들어서게 하시지만, 또 어떤 자는 책망과 징계의 채찍으로 그 은혜의 길에 들어서게도 하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은 이처럼 다양하게 임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교만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 은혜의 길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은혜의 길을 보여주셔도 여전히 자신의 교만과 욕심의 길을 걷다가 멸망을 당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느브갓네살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브갓네살 왕에게 지극히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교만은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은혜의 길로 향하는 반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은혜의 길에 대하여 무지한 자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단 2;37-38에 보면,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금머리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열왕의 왕”이 되게 하셨고,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주셨습니다.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왕의 후에 이루어질 모든 나라 중 으뜸이 되는 나라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현재 느브갓네살이 차지한 신분, 위치, 능력, 권세, 소유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은혜로 알며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는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장래 일까지도 미리 알려주시며 대비하게 하셨습니다. 왕의 후에 일어날 일들을 왕에게 미리 알려주셔서 대비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금머리의 바벨론, 은 가슴과 은 팔의 메대와 바사, 놋 배와 넙적 다리의 헬라, 철과 흙 다리의 로마 등에 대해 자세히 보여주시며 대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왕의 후에 분열되고 멸망할 인간의 나라들을 미리 알려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의 길로 나오도록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 왕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멸망의 나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 앞에 무릎 꿇고 들어오도록 미래의 모든 역사를 알려주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은혜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은혜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그 은혜의 길이 자신의 욕심과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임합니다. 인간의 욕심과도 다르게 임합니다. 느브갓네살은 꿈에 보여주신 은혜의 길이 자신의 욕심과 다른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은혜의 길을 버렸습니다. 현재 자신의 삶의 모든 정황을 은혜로 아는 자들은 은혜의 길로 향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2. 욕심과 교만의 눈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무지하게 반응한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과 교만은 그 사랑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느브갓네살 왕과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자신의 욕심에 일치되게 주어지는 은혜만을 은혜로 알고 그 길을 따라갑니다. 자신의 욕심과 다르게 임하는 은혜는 은혜로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은혜의 길을 거부하거나, 왜곡하거나, 정면 도전을 하기까지 합니다.

단 3:1의 말씀은 느브갓네살 왕의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라는 말씀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기대와 전혀 다른 느브갓네살 왕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는 은혜에 저항하여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호를 위해서 은혜를 주셨지만 거절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꿈과 다니엘을 통하여 멸망할 나라의 왕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왕권 앞에 무릎 꿇도록 계시를 주셨지만, 그 계시를 은혜로 받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다른 계시였기 때문에 그 계시를 통한 은혜의 길을 보지 못하고 무지한 자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멸망할 나라라고 알려준 그 나라를 인위적인 왕권으로 회복시키며, 유지해 나가고자 발버둥쳤습니다. 육십 규빗(30m) 대 여섯 규빗(3m)의 10:1의 금 신상을 만들며 자신의 욕망을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상(체렘)”은 사람의 형상과 관계있는 것으로서 왕이 꿈에 보았던 우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들어 세운 우상이 하나님께서 꿈에 보여 주신 신상과 동일한 신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보여주신 신상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뜻에 정면 도전하는 신상이었습니다. 단 2:36-43에 보면,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에게 보여주신 신상은 머리만 금으로 되었고, 나머지는 은, 놋, 철, 흙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세운 신상은 신상 전체가 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멸망할 나라들이라고 알려 주신 꿈의 신상을 모두 금으로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우며,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정면 도전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느브갓네살 왕 이후에 이어질 모든 나라도 자신에게 속하게 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고고학적으로 바벨론 동남쪽 6마일 가량 떨어진 넓은 평원에서 기초석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를 은혜로 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은혜의 길을 걸어갈 때만 은혜입니다. 그 길을 보지 못하는 자는 저주가 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의 욕심에 맞추어 해석하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건은 느브갓네살 왕의 본격적인 통치가 시작되는 때쯤에 일어난 것입니다. 왕은 신상을 통하여 세상 열국을 연합시키고, 통치권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신상을 중심으로 자신의 왕국을 통합하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반응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으로 반응함으로서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그 계시를 자신을 높이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느브갓네살 왕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의 상당수가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느브갓네살보다도 더욱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의 은혜와 권면을 받고도 그 은혜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곤고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사업의 실족을 통해 말씀하시며, 각종 환경을 통해 말씀하셔도 그 은혜의 길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교만은 결코 회개를 통한 은혜의 길을 은혜로 받지 못하고 무지한 반응을 보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은혜의 길로 들어서는 정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통치하는 공동체 전체를 고난의 풀무에 던져 넣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고 옵니다. 단 3:2는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자기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길에 무지하게 반응하는 자는 그 무지한 반응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단 3:3에 보면,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라고 알려줍니다. 결국 온 백성이 느브갓네살 왕의 무지한 반응에 끌려 다니게 되었습니다. “참집하다”는 말은 “다 모였다”는 의미입니다. 은혜에 무지한 자의 반응의 결과입니다.

3. 느부갓네살과 같은 은혜의 길에 무지한 반응에서 떠나야 한다.

은혜의 길에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느브갓네살의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무지한 반응으로 분별되어 보이지만, 그 은혜의 길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더욱 더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눈에는 참으로 어이없게 보이는 모습입니다. 단 2:46-49에서 보면,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에게 꿈과 그 해석을 알려준 다니엘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앙하며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까지도 바벨론에서 높여주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도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도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앙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높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은혜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은혜의 길을 걷는 자에게만 은혜가 은혜로 역사됩니다. 하지만 느브갓네살 왕은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높였지만, 그 은혜의 길을 걸어갈 때는 자신의 욕심과 교만으로 그 은혜의 길을 해석하며 걸어갔던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킴으로써 걸아야 할 그 길을 교만한 대적의 길로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패역한 길에 수많은 백성들도 함께하였습니다. 은혜의 길에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왕의 선택이 인간의 욕심의 눈에는 옳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너져버릴 금, 은, 놋, 철, 흙의 신상을 모두 금으로 만들어 세우고, 그 신상을 섬기면, 현재와 미래의 바벨론 왕국이 승승장구하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 왕은 그 신상을 중심으로 강제적인 통치권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 자리에 함께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은혜의 길로 알았던 것입니다.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한 신하는 여덟 계급입니다. “방백(왕의 최고 대변인)”과 “수령(군사지도자)”과 “도백(행정관리)”과 “재판관(정부의 조정관)”과 “재무관(정부의 재정관리)”과 “모사(법을 운용)”와 “법률사(판결을 내림)”와 “각 도의 모든 관원(방백들을 관리)”들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이들 앞에서 신상을 통하여 자신의 유일한 통치 권력을 나타내었습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여덟 계급이 모두 참석하여 느브갓네살 왕의 절대 권력에 복종을 맹세하며, 그가 가는 길에 함께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자신의 욕심과 교만의 눈으로 잘못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온 나라가 우상숭배의 패역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실패로 인해 훗날 후세대에 이르러 바벨론도 멸망하였고 오늘날도 요한계시록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다니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이러한 성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목자의 마음은 불에 녹는 듯 합니다.

수없이 다양한 경로와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그 은혜의 길에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성도들의 모습만큼 영적 지도자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소원과 욕심에 일치되는 은혜는 쉽게 확인하고 누리며 좋아하지만, 그 욕심에 합당하지 않은 은혜는 온전히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함을 통해 걸어가야 하는 은혜의 길을 무지한 반응으로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느브갓네살도 꿈과 해석을 전해 듣고 은혜에 감사하며 감사의 예물도 드렸습니다. 감사의 인사와 표현도 했습니다. 그 은혜를 끼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보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인간적인 왕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 왕권 아래 자신의 왕권을 내려놓는 회개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무지한 반응은 은혜의 길을 저주의 길, 대적자의 길로 걸어가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삶의 상당수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되 그에 따른 반응은 무지한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설교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듣습니다. 이 말씀들은 칭찬도 있고, 권고도 있으며, 책망도 있습니다. 그러나 듣고 받은 말씀에 대해 자신의 욕심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에 무지한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우리의 계획과 의지와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슬픈 성도의 삶입니다.

더 나아가 그 계획을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데 이용함으로써 느부갓네살의 신상과 같은 우상으로 만듭니다. 결국 은혜의 길 대신에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말씀, 들은 계시에 대해 바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아닙니다. 바른 반응은 나의 욕구,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어찌하리이까?”라는 질문을 하며 회개함을 통해 은혜의 길로 들어가는 반응을 보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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