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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요 4: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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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양식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제일 아름답다는 금강산 구경도 배가 고파서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아무리 좋은 구경도 배가 고파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 사람들이 와보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동네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 저희들이 동네에 가서 음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제 드십시오.”라고 말합니다.

31절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랍비여 잡수소서”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선생님,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음식은 들고 하셔야지요.” 라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배가 고파있는 상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 유대에서 출발하여  사마리아성까지 무려 4시간 이상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준비하여 와서 예수님에게 음식을 잡수시도록 권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 왔고 그것을 드시도록 권했다는 것은 정말 칭찬을 받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에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32절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가 우리가 잠깐 자리를 뜨는 사이에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양식은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이 자신의 삶에 최고의 우선순위라는 말입니다. “너희들도 배고프지 나도 배고프다. 그러나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지금 나를 향하여 나아오는 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양식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영혼을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을 먹는 양식으로 비유하셨을까요?
현실적으로 먹는 일보다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사흘만 굶어 보십시오. 눈이 침침하고 다리가 흔들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흘을 굶으면 남의 담을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먹어야 삽니다. 먹어야 운동도 할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가 고프니까 자식들을 잡아 먹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먹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도 영의 양식을 먹는 일이 이렇게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이 이렇게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의 양식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육의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ㅣ
육의 양식을 먹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영의 양식을 먹어야 영혼의 싱싱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비실비실한 사람 보셨습니까?
영혼을 사랑하고 회복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차가운 사람보셨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고 회복하는 일에 쓰임받는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불이 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간증이 풍성합니다. 간증이 풍성하다는 것은 그만큼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침체 가운데 빠지셨습니까? 신앙의 메너리즘에 빠지셨습니까?
영의 양식을 먹으십시오. 육적인 양식보다 영의 양식이 더 중요합니다. 영혼을 가진 우리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왜 엄청난 물질과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합니까?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우리는 영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그 일을 먹을 양식처럼 귀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생명을 살리는 일을 당신의 삶에 가장 우선순위가 되게 하십시오. 그럴 때 당신의 영혼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다시 하늘을 날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심령은 영적인 포만감을 얻게 될 것이고 당신의 모습은 천사처럼 환한 미소를 갖게 될 것입니다.

□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주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눈을 들어 밭을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절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밭을 보라!는 말씀은 바로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희어져 추수하게된 곡식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은 자연적인 추수를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추수를 넉 달 정도 앞둔 시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 말씀을 하실 때 들판은 이제 막 피어오른 보리 싹들로 파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이번에 시골을 갔는데 막 피어오른 보리 싹들로 파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유대의 파종기는 12월-1월이며, 추수기는 4월 중순부터 5월말 사이입니다. 보리는 보통 10월경에 파종합니다. 예수님께서 ꡒ너희들이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ꡓ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봐서, 그때가 12월쯤 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은 자연적인 추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을 알려면 주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와보라”는 전도를 받고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 그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은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는 말은 오늘 메시야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주님께로 나아오는 자들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거듭나야 할 영혼들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입니다.

□ 주님의 관심과 제자들의 관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제자들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1. 제자들의 관심?
본문을 보면 제자들의 관심은 당장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4시간 이상 수가성 우물까지 걸어왔습니다. 배가 고프지요, 피곤도 하지요. 얼마나 피곤했으면 예수님도 곤하여 길에 두 다리를 쭉뻗고 앉으셨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습니다.(8절) 그리고 음식을 구하여 온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랍비여 잡수소서”라며 잡수실 것을 권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저 여자가 왜 갑자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을까? 왜 동네사람들은 와 보라!는 여자의 말을 듣고 지금 예수님께로 나아올까? 저 사마리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지금 예수님님께로 나아올까? 에 대하여 궁금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의 관심은 눈 앞에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2. 주님의 관심?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밭고 자신에게 몰려 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피곤하였고 배가 고프셨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와보라”는 초청을 받고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목마른 영혼들에게 생수를 마시우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마리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피곤했고 배가 고프셨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주님의 관심은 그들의 영혼을 추수하는데 있었습니다.

3. 오늘 나의 관심은?
그렇다면 오늘 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신의 최고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까? 자녀의 진학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까? 질병에서 고침받는 일입니까? 직장을 갖는 일입니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까? 사업의 부도를 막는 일입니까? 좋습니다. 그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당신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면 오늘 당신의 관심은 바로 당신 곁에 있는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소외되고 목마른 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눈을 밭을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이 보이지 않습니까? 와보라!는 말만 전해도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영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저희 교회에 전도에 불이 붙어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매주일 전도해 오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도를 그렇게 잘 하느냐고 물어보면 주님이 내 곁에 두시고 관계를 맺게된 사람들에게 교회 자랑을 이야기하면서 한번 “와 보라”고만 하면 와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희어져 추수하게된 영혼들이 보여야 합니다. 오늘 당신의 곁에 있는 그 사람들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들입니다. 오늘 당신의 가족 가운데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바로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입니다. 오늘 당신의 자주드나는 야쿠르트 아줌마, 파출부 아줌마, 직장의 동료와 친구들 바로 그 사람들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당신 곁에 있는 그 사람들, 당신이 매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당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들이 우연히 당신 곁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추수하도록 당신 곁에 두신 영혼들입니다.
이제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안타까운 영혼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구원받아야 될 영혼들을 보십시오. 카자스탄에 우즈벡스탄에 수 많은 영혼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왜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나아갑니까?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눈에는 무엇이 가장 많이 보입니까? 돈입니까? 사치와 허영입니까? 쾌락입니까? 그것들은 모두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영혼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의 영혼을 추수하는 영혼의 추수꾼이 되십시오.

어떤 분이 아침마다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주님 오늘도 한 건 하게 해 주십시오.” 여기서 한 건은 전도를 말합니다.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도 가운데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매일 매일 당신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당신은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매일 매일 당신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 추수는 때가 있다.

35절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은 추수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를 놓치면 아무리 수고하여 지어 놓은 농사라 할지라도 헛 수고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가끔 농촌에 보면 일손이 딸려 제 때에 추수를 하지 못하여 그만 버려지는 곡식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구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영혼의 추수는 다음으로 미루면 안됩니다. 지금이 바로 적기입니다.

□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6절에 보면 거두는 자가 나오고 뿌리는 자가 나옵니다. 누군가가 뿌렸기 때문에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뿌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거두는 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오늘 교회인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뿌려놓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거두는 것입니다.  뿌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뿌려놓았습니다. 영생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어놓은 것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를 통해, 부활을 통해, 영생을 이 역사 속에 심어놓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이렇게 예수님이 심어 놓은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파종하고 가꾸는 것과 거두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사실 곡식을 심고 가꾸는 것이 어렵지 거두어 들이는 것은 쉽습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심었고 우리는 거두는 자입니다.

1. 거두는 자는 이미 삯을 받은 자이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거두는 자들은 이미 삯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품삯은 일을 마친 후에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추수는 일년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 놓았어도 추수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추수 때가 되면 서둘러서 추수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꾼이 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먼저 품삯을 주고 일꾼을 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영혼의 추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추수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먼저 삯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얻은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먼저 영혼의 추수꾼들에게 구원이라는 삯을 주시고 그 구원의 기쁨을 가진 자들로 또 다른 영혼들을 추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추수군들은 한결같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들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로 전도하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삯을 받은 자들입니다.

2. 거두는 자에게는 함께 누리는 기쁨이 있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전도를 해보면 참 희한한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는 사람보다 전도를 해 온 사람이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에게는 누구도 맛보지 못한 영적인 희열이 있습니다.
거두는 기쁨은 거두어 보는 자만이 압니다. 구경만 해 가지고는 그 기쁨을 모릅니다. 직접 농사를 짓고 그 열매를 거두어 본 자만이 그 기쁨을 압니다. 그런데 거두는 자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는 자도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영혼을 추수할 때 나도 기쁘지만 주님도 함께 기뻐하십니다.
눅15장을 보면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되신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던가요?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던가요? 송아지를 잡고 신발을 신기우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벌이지 않습니까?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와 새 생명을 얻을 때 하늘에서는 천국의 잔치가 열립니다.

왜 거두는 우리도 기쁘고 주님도 그렇게 기뻐하실까요? 거두는 자의 열매가 바로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보다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 거두러 나아가라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38절)
오늘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노라”
내가 너를 보내노라.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들을 추수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보내노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두는 자입니다. 영혼을 추수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을 거두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밭으로 가야 합니다. 당신의 일터는 바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밭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을 거두는 일입니다.
우리는 내가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내가 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심어 놓은 것을 거두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별로 낯설지 않은 말입니다.
그들의 선조가 약속의 땅에 들어와 거하게 될 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얻게 되었고 자기들이 심지도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게 되었습니다. (수24:3)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라”는 말은 그 만큼 전도가 쉽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심고 거두려고 한다면 어렵겠지만 주님이 심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해 놓으셨습니다. 나는 가서 거두기만 하면 됩니다.

순종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희어져 추수하게 될 영혼을 만나게 됩니다.
행8장을 보면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하던 빌립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광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권세가 있는 내시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재무부장관쯤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바로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이사야53장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또 그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53장의 말씀에 예언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예수님을 즉시로 영접하고 세례까지 받고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한 사람 빌립의 순종으로 복음이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고 아프리카의 수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영생입니다.

저희 집안은 저희 아버님이 예수를 믿음으로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제 4대째 믿음의 가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님 돌아가신 지 1주기가 되어 지난 주에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시골 다녀오는 길에 매형의 인도로 저희 아버님에게 복음을 전해준 가정을 잠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에게 복음을 전해준 권사님은 돌아가셨고 그 따님인 현권사님을 뵈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15살 되었을 때 현권사님의 어머니가 저희 아버지에게 그림으로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저는 짧은 시간 이었지만 이렇게 저희 아버님에게 복음을 들려 주셔서 이렇게 저희 가문이 믿음의 가문이 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저희 아버님 한분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우리의 가문은 복음의 가문,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벌써 목사가 3명, 장로가 5명 권사가5명 손자 손녀 중 한 사람도 신앙의 낙오자가 없이 예수를 섬기는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수년 전 미국에서 라이나 화이트라는 18세된 소년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TV와 신문들이 앞 다퉈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13세때 혈루병 치료중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5년 만에 숨을 거뒀고 이 때 아버지에게 남긴 말이 미국민을 감동시켰습니다.
“네가 이렇게 빨리 가야 한다니 가슴이 아프구나”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신 아버지는 저에게 소중한 선물을 주셨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셨잖아요. 저는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나는 조금 빨리 가는 것 뿐이에요”

우리는 이 시대에 영혼의 추수꾼입니다. 이제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구원받아야 될 영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고통의 멍에에 매여 울고 있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누가 저들을 구원하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영상 하나를 보면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빠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는 어린 딸의 눈물을 바라보며 오늘 나에게도 영혼 구원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는 지를 생각하며 영상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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