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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되게 하소서 (요 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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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지적한다면 분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과 북이 나뉘었고, 동과 서가 나뉘었으며, 좌와 우가 대립하고, 노와 소가 서로 이해가 안된다고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노와 사의 갈등, 여와 야의 격돌, 부와 빈의 갈등이 심화되며 하나됨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분열의 현장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작은 나라를 계속 갈라지게 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단일민족이라고 순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을 영원히 합칠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싸늘하게 대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이념입니까? 사상입니까? 역사입니까? 상처입니까? 그 배후와 실체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단은 이간하고 분열시키는 존재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이 세상 처음에도 처음사람 아담과 하와를 꾀어 하나님과 갈라지게 했습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서로 미워하게 하고 원수가 되어 대적하게 하며 전쟁하게 하는 등 갈등과 분열을 획책하여 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을 훼방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단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무력화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서로 분열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명을 잊어버리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서로 찢어져 갈등하고 미워하며 모든 에너지를 서로를 공격하게 만드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 역시 분열시켜 서로 싸우고 서로 해치는 일임을 잘 알고 분열과 갈등을 충동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가로막는 무서운 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도를 가로 막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핏값으로 원수된 관계를 화목된 관계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죄의 종이요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신분까지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갖 복과 은혜의 선물이 날마다 부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목케하고 평화의 관계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벽을 허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벽고 허무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었던 벽을 허시고 담을 허시고 그 이방인들까지 이스라엘과 화해시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본래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어마어마한 벽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과 상관 없는 백성들이라고 천시하고 무시하였습니다. 심지어 개취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냉냉하던 그들과의 사이에 있었던 담을 허무시고자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고넬료에게 보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인 교회안에 이방인이 들어오게 되고 함께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화해를 이루는 화해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로 하나를 만들고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역을 맡기시기 위해 소수의 사람을 택하셨을 때 뽑힌 사람들은 너무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충동적이면서 거친 베드로가 있고, 숙맥같이 무엇이든 쉽게 믿어버리는 안드레가 있었으며, 도마는 마음속에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태와 시몬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는 아마도 로마 사람들과 짝하여 세리의 자리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유대 열성당원 시몬은 로마의 무역을 방해하거나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켜서 로마 관리들에게 고통을 주려고 단단히 결심을 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서로 하나로 합치기 어려운 조건의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했고 함께 지내며 서로 부딪치게 하며 그들에게 공동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또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며 순종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겨주며 서로 섬기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어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성이 강하고 코드가 맞지 않던 제자들이 변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고는 함께 교회를 섬기며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앞에 두신 에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능력받기를 위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위해서도 그렇게 절실하게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제목으로 간절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열 두 제자들 뿐 만 아니라 그들로 인해 계속 제자로 태어나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기도보다 계속 반복하여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한 가지를 부르짖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단이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분열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분열시키며 교회 공동체와 가정을 분열시키고 하나된 모든 인간 관계를 분열시켜 우리로 크나큰 불행에 빠지게한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예수님을 하나됨을 강조하시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분열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처방이며 특효약입니다. 교회가 가는 곳에 반목과 갈등이 사라지고 화목과 일치가 자리를 잡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이간과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가 뿌리를 내립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님이 역사하는 곳마다 어둠과 분열의 영이 쫓겨가고 하나로 연합하게 하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가정이 깨어질 위기에 처하였다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고 치유되고 회복되며 진정한 연합을 이루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 용서하며 이해하고 화해를 이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영은 오늘도 하나되게 하며 우리 사회의 온갖 위기를 치유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기도하신 제목처럼 하나되는데 주님의 손에 붙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50억 인류중에서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 "너 왜 나하고 달라? 왜 다르게 생각해? 왜 다르게 말해? 왜 다른 것을 좋아해?" 라고 말하며 시비를 겁니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환경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입장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상대방의 다름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인정해 줄 수 잇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서로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행에 너무 민감합니다. 옷도 유행따라 비슷하게 입습니다. 머리 모양도 유행따라 쳔편 일률적입니다. 화장법도 같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보며 도무지 구별이 안된다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남들과 다르면 인정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불이 나면 교파별로 다 다르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불이 났다"하고 소리를 지르면 감리교인들은 즉시 한쪽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루터교인들은 재빨리 '불이 났다' 하고 공고문을 문에 붙인답니다. 침레교인들은 소리칩니다."모두 물 속으로!" 장로교인들은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문제를 검토하여 서면으로 보고하기로 합니다. 성공회 교인들은 행렬을 이루어 질서정연하게 나갑니다. 구세군 교인들은 피해를 보수하기 위해 냄비를 가져오고 종을 치기 시작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누가 틀렸습니까? 누가 가장 옳습니까?

이처럼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 하나 틀렸다고 비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다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어떤 사람은 손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눈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시며 어떤 사람은 발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은사에 따라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신앙의 배경에 따라 강조를 두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 성품에 따라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하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고 비난하면 곤란해집니다. 그러다보면 답답함에 짓눌립니다. 불평과 원망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차고 넘치게 될 수 있습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고집스러움을 내려놓고 내 입장에서만 보고 판단하는 경직된 마음을 내려놓고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 서로 존중하려는 마음을 품을 때 자유로와 집니다.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기 다르게 부르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장점을 다 귀히 여기시고 다 존귀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되려면 먼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라는 것은 획일적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연합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앞장서기를 축복합니다.

2.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의 어떤 대학에 무관심 클럽이라는 동아리가 생겼습니다. 동아리에서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공고를 했습니다. '무관심클럽 회원은 0월 0일 0시에 어디에서 모입니다.' 몇 명이나 모였을까요? 아무도 오지 않았답니다. 왜요? 무관심한 사람들만 모인 무관심 클럼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온갖 신경을 집중시킨채 다른 사람에게는 점점 무관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무관심해갑니까?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기때문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나뉩니다. 나를 중심으로 이익과 불이익이 나뉩니다. 나를 중심으로 별 볼일 있는 것과 별 볼일 없는 것이 나뉘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예배에 있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어디에 있는가? 관심이 많으십니다. 아벨과 같이 믿음을 보이며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가 어디에 있는가?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며 그분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키기를 소망하여 마음을 다하는 예배자에게 하나님을 관심을 집중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무관심한 여러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심을 집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걸작품으로 지으시고 몹시 만족해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 옆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희생하셨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걸작품으로 지으시고 여러분을 위해서도 핏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굉장한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우리가 서로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 단절된 벽을 허물기위해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인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마친 후 담임목사에게만 인사하지 말고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린 사람,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 스쳐지나 가는 사람 모두에게 반갑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인사를 통해 여러분이 그분에게 갖고 있는 관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생님의 건강을 위해 한 주간 기도했는데 좀 어떠십니까?'
성도들 사이의 연합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주는 바로미터입니다.

미국이 남북 전쟁 때 포토맥강이라고 하는 강을 사이에 두고 북군과 남군이 대치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전투가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그런 그날 밤입니다. 달빛이 흐르고 조용한 시간에 군사들은 불안에 떨면서 지금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군가를 부르면 양군이 전부 군가가 다릅니다. 애국가를 불러도 둘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느 군인이 누구나 다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 Home, Sweet Home,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여러분도 잘 아는 그 노래를 어느 군인이 조용하게 불렀습니다. 옆에서 따라 불렀습니다. 강 건너편에 소리가 들려졌습니다. 그들도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로 가득 찼습니다. 저들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불렀습니다. 다음날 전쟁은 없었습니다. 왜요? 근본으로 돌아갔거든요. 우리가 왜 싸워야 되는 겁니까? 즐거운 곳에서는 나를 오라고 하는데 나는 왜 여기서 이래야 되느냐 이거예요. 이게 무슨 짓이냐구요. 근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근본이 하나다. 이것을 학문적 용어로 동질성 회복이라합니다. 본질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한 교회를 섬기는 가족입니다. 한 조상의 후손인 한 민족입니다. 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됨을 힘써 지킴으로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아름다운 백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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